신성 로마 제국의 콘스탄츠(Konstanz)에서 교회의 일치(causa unionis), 개혁(causa reformationis), 신앙(causa fi-dei) 등 세 가지 목적과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414년 11월 5일에 소집되어 제한적인 공의회 우위설의 영향과 속권의 개입 아래 1418년 4월 22일 폐회되기까지 약 3년 6개월 동안 진행된 제16차 세계 공의회.
〔시대적 배경〕 1378년의 이중 교황 선거로 로마 교황과 아비농 교황으로 양분된 교황청 분규를 해결하기 위해 양측 추기경단은 피사(Pisa) 교회 회의(1409)에서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1406~1415)와 아비뇽 교황 베네딕도 13세(1394~1423)를 해임하고 밀라노의 대주교인 칸디다의 피에트로(Pietro di Candida) 추기경을 교황 알렉산데르 5세(1409~1410)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5세가 1410년 5월 3일에 서거하자 피사 교회 회의에 참석하였던 추기경들은 볼로냐(Bologna)에서 후임 교황으로 볼로냐와 로마냐(Romagna)의 교황 사절인 코사(Baldassare Cosa) 추기경을 교황 요한 23세(1410~1415)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피사 교회 회의의 해임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은 로마 교황과 아비농 교황, 그리고 피사 교황이 각각 스스로가 합법적 교황임을 주장하여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를 분열시킨 '서구 대이교 (西歐大離敎)의 혼란 상태가 발생하였다.
1414년에 헝가리의 왕이자 독일 제국의 왕인 지기스문트(Sigismund, 1411~1437)는 공의회를 통해 서구 대이교를 해결하기 위해 요한 23세와 공의회 소집에 관한 협상에 나섰다. 그해 10월 13~30일까지 지기스문트는 교황 요한 23세의 위임을 받은 자라렐라(Francesco Zararella, 1360~1417) 추기경을 만나 콘스탄츠에서 11월 1일에 자신의 이름으로 공의회 소집을 발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10월 31일 요한 23세는 지기스문트와 직접 만난
자리에서 40일 안에 교황이 직접 공의회 소집을 발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탈리아 추기경을 포함한 대부분의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요한 23세는 소집되는 공의회에서 피사 교회 회의의 로마 교황과 아비농 교황 해임 결정을 확인함으로써 자신이 유일한 합법적 교황으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12월 9일에 요한 23세는 공의회 소집 칙서를 공포하였고 지기스문트는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에게 공의회 초대장을 보냈다.
〔공의회의 진행〕 교회 일치 : 요한 23세는 11월 5일 콘스탄츠의 주교좌 성당에서 공의회의 개회를 선언하였다. 제1차 총회(1414. 11. 16)에서 공의회 소집에 관한 교황 칙서가 승인된 다음, 교황은 교령 〈앗 호노렘>(Ad ho-norem)을 통해 공의회의 의제로 가톨릭 신앙에 위해(危害)를 끼치는 오류들에 대한 심사와 가톨릭 교회의 올바른 개혁 및 바람직한 평화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제11차 톨레도(Toledo) 교회 회의(675)의 법규 1조를 인용하여 회의 참석자의 자세를 주지시키고 운영 위원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11월 19일 로마 교황의 대표들이 콘스탄츠에 도착하면서 피사 교황의 합법성에 대한 격론이 일어났다. 아울러 아비뇽 교황의 대표들과, 12월 24일에 지기스문트와 함께 도착한 독일 대표들이 참석함으로써 이탈리아인이 아닌 추기경과 주교들의 숫자가 증가하였다. 더욱이 아이(Pierre d'Ailly, 1350~1420)와 필라스트르(Guillaume Filastre, 1348?~1428)와 같은 프랑스 추기경들은 교회 분 열의 해결책으로 세 교황의 자발적 퇴임이나 강제적 폐위를 제기하면서 교황 선출권의 범위를 고위 성직자에서 신학자, 교회법 학자, 하급 성직자, 세속 군주의 파견 대표들에게로 확대하자고 제안하였다. 1415년 2월 6일에 공의회는 파리 대학교의 제도를 본떠 주교단을 네 국가, 즉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으로 나누어 국가별 토의와 표결을 통해 공의회 결정을 선언하기로 정함으로써 공의회에서 요한 23세를 지지하는 피사파 이탈리아 추기경단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제2차 총회(3. 2)에서 요한 23세는 두 대립 교황들의 퇴임을 전제로 자신의 사퇴를 약속하였지만, 자신에게 불리해진 공의회를 해산시키려는 의도에서 3월 20~21일 밤 비밀리에 콘스탄츠를 탈출하여 샤프하우젠(Schaff-hausen)으로 갔다. 그러나 공의회는 지기스문트의 주도로 계속되어, 제3차 총회(3. 26)에서 합법적 집회이며 교황이 부재중이더라도 그 권위를 상실하지 않고 교회의 일치와 개혁의 목적이 완수될 때까지 지속되며 공의회의 토론을 거친 결정 없이는 다른 장소로 옮길 수 없고 참석자들은 폐회 때까지 떠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때 프랑스, 영국, 독일이 국가 모임에서 공의회 우위설을 정식으로 제기하자 추기경단과 이탈리아 대표단은 지기스문트에게 항의하였고, 자라렐라 추기경은 제4차 총회(3.30)에서 공의회 우위설은 이단 단죄에 따른 신앙 교리의 선명(鮮明)과 교회 분열의 해결에 관한 문제에만 제한하는 온건한 공의회 우위설 성향의 교령 초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전날(3. 29) 요한 23세가 샤프하우젠에서 브라이자흐(Breisach)로 옮겨가서 자신의 사임 약속은 독일 왕의 강압에서 나온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제5차 총회(4.6)는 "머리에서 지체들에 이르는 교회의 전반적 개혁"(generalis reformatio eccle-siae in capite et membris)에 관한 사항에
도 공의회 우위설을 적용하는 과격한 성향의 교령 <헥 상타>(Haec sancta)를 발표하였다. 제6차 총회(4. 17)에서 요한 23세의 재판 절차가 준비되고 제7차 총회(5. 2)에서 소환을 결정한 다음, 공의회는 세 차례의 재판 과정을 거쳐 제12차 총회(5. 29)에서 교령 <사크로상타>(Sacrosancta)를 통해 요한 23세를 폐위하였다. 이어서 지기스문트는 로마 교황 및 아비뇽 교황과 로마 교황의 사임에 관한 협상에 나섰다. 1415년 7월 4일에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는 독일 왕과 합의하여 그의 특사인 도미니치(Giovannni Dominici, 1356?~1419) 추기경이 콘스탄츠에서 공의회 소집을 선언한 다음 사임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페르피낭(Perpignan)에 있던 베네딕도 13세가 국왕의 사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1417년에 공의회는 제29차 총회(3. 8) 에서 불복종의 죄목으로 그를 고소하여 여섯 차례에 걸쳐 궐석 재판을 진행한 다음 제37차 총회(7. 26)에서 해임 선고를 내렸다. 이어서 제39차 총회(10.9)에서 교황 선출과 교회 개혁의 순위 결정에 대한 격론이 있은 다음, 먼저 교황 선거를 실시하되 앞으로 선출된 교황으로부터 공의회를 통한 개혁 단행을 보장받는 교령 <프레구엔스>(Frequens)를 통과시켰다. 제38차 총회(7. 28)에서 공의회 합류 승인을 받은 아라곤(Aragon)과 카스티야(Castilla)의 스페인을 포함한 다섯 국가의 대표 각각 6명이 11월 11일에 벨라브로(Velabro)의 성 그레고리오 성당의 부제 추기경 콜론나(0do Colonna)를 이른바 '공의회 교황' 마르티노 5세(1417~1431)로 선출함으로써 서구 대이교는 끝났다.
교회 신앙 : 제8차 총회(1415. 5. 4)는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가 살아 있는 동안 발표한 저서와 논문을 통해 가톨릭 신앙을 거슬러 전파한 주장을, 영국 요크(York)의 대주교와 보헤미아(Bohemia) 프라하(Pra-ha)의 주교도 단죄하였음을 상기시키면서 그를 '거짓 그리스도인' 이라고 규정하고 그의 주장을 45개 항의 명제로 작성하여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또한 위클리프의 저서를 읽고 가르치고 해설하고 인용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45개 항의 명제 내용을 언급하는 가톨릭 신자는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공지하였다. 제12차 총회는 1411년에 위클리프의 주장은 가톨릭 신앙을 훼손하는 오류이며 이단이라고 옥스퍼드 대학 교수들이 평결한 260개 항의 명제를 토론하였다. 제15차 총회(1415. 7. 6)는 260개 항에서 발췌된 58개 항의 명제에 대한 로마 교회 회의(1413. 2. 10)의 단죄를 확인하면서 위클리프를 이단자로 선언하였다. 이어서 지역 교회의 주교들과 이단 심문관들에게 위클리프의 주장이 담긴 저서들을 소각하고 공의회 교령의 준수를 관찰하되 교령을 어기고 경고를 받고서도 순종하지 않는 신자를 처벌하라고 지시하였다. 아울러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공의회 중인 1418년 2월 22일에 칙서 <인테르 쿵타스>(Inter cunctas)를 통해 지역 교회의 대주교, 주교, 이단 심문관들에게 제8차 총회에서 단죄한 위클리프의 45개 항 명제를 알렸다.
또한 제15차 총회는 위클리프의 후계자로 보헤미아의 종교 개혁가 후스(Jan Hus, 1372?~1415)를 지적하면서, 교회가 단죄한 위클리프의 이설(異說)을 후스가 강의와 설교를 통해 가르치고 설파하면서 교회 결정을 비판하였다고 언급하였다. 한편 후스가 공의회에 출두한 자리에서, 그리고 저서나 논문에서 제시한 주장을 교회 학자들이 검토하여 작성한 30개 항 명제는 신앙 교리에 어긋나는 오류로 교회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선의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위해를 끼치며 불충의 길로 이끄는 주장이라고 규정하면서 후스의 저서를 번역하거나 강의 및 설교에 인용하는 행위를 금지하였다. 또한 후스의 위험한 주장을 교회 안에서 몰아내기 위해 지역 교회의 주교들은 그의 주장이 담긴 저서와 논문들을 세심하게 조사하여, 후스의 저서와 이단 혐의가 있는 저서에 대한 공개 소각을 시행하면서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후스의 추종자들을 교회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총회는 후스가 명백한 이단자이며 그의 주장은 오래전 교회가 단죄한 오류와 이단이라고 선언하면서, 공의회에서 보인 후스의 태도로 보아 오류와 이설을 포기하고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므로 사제직을 박탈하고 화형 선고를 내린 다음 이단자로 국가 법정에 넘겼다. 이어서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인테르
쿵타스>를 통해 지역 교회의 주교들과 이단 심문관들에게 제15차 총회에서 단죄한 후스의 30개 항 명제를 알렸다.
위클리프와 후스 이외에도 공의회는 두 가지 보헤미아 사건을 다루었다. 첫째는 보헤미아에서 위클리프의 주장을 설파하던 중 후스를 옹호하기 위해 콘스탄츠로 온 프라하의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1365?~1416) 사건이었다. 제6차 총회(1415. 4. 17)와 제7차 총회(1415. 5. 2)에서 히에로니무스의 소환이 결정된 다음 제21차 총회(1416. 4. 17)는 히에로니무스가 처음에는 위클리프와 후스에 대한 공의회의 단죄에 동의하고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후에 자청한 청문회에서 잘못된 결정이라고 번복하였다고 밝히면서, 그의 주장을 위클리프와 후스의 가르침과 같다고 판정하여 이단자로 단죄한 다음 화형을 선고하여 국가 법정으로 넘겼다. 둘째는 보헤미아에서 영성체 전 공복재를 거부하고 평신도의 양형 영성체를 주장하는 스트리브로(Stribro)의 야코우벡(Jakoubeck) 사건이었다. 제15차 총회(1415. 6. 15)는 공복재와 평신도의 단형 성체 배령은 충분한 이유가 있어 교회에 도입되어 오랫동안 준수되어 온 전례 관습으로 어느 누구도 교회의 허가 없이는 바꿀 수 없다고 밝히면서,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은 빵과 포도주의 두 형상 안에 모두 들어 있다는 교회 가르침을 확인하였다. 이어서 평신도의 성체 성혈의 양형 배령을 시행하는 사제는 파문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지역 교회 교구장 주교들은 교회 전례 관습을 반대하는 행위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엄격하게 처벌하도록 명하였다.
또한 제15차 총회에서는 폭군 살해(Tyrannnicida)의 합법성에 대한 문제가 신앙 · 윤리적 관점에서 격론으로 이어졌다. 프란치스코회 수사인 프티(Jean Petit)는 1407년 11월 23일 부르고뉴(Bourgogne)의 새 공작 장(Jean sans Peur, 1371~1419)이 오를레앙 공(Duc d'Orleans) 루이(Louis)를 암살한 사건에 대해 국왕과 왕권의 안전을 위한 정당한 행위라고 변호하는 논문 <어느 폭군>(Quilibet tryrannus)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1414년 2월 23일 파리 대학교 학장인 제르송(Jean de Gerson, 1363~1429)이 오류라고 비판하자, 이 문제를 부르고뉴 공작이 상소하여 공의회 신앙위원회가 다루었다. 제르송은 신앙위원회에 논문들을 제출하면서 프티의 단죄를 주장 하였고, 부르고뉴파의 지도자인 아라(Arras)의 주교 포레(Martin Porré)는 단죄를 반대하였다. 총회는 신앙과 윤리적인 면에서 오류인 명제들이 모든 국가의 헌법과 질서에 위해를 가하고 있음을 밝히면서도 부르고뉴 공작에 대한 정치적 배려에서 프티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어떠한 폭군의 봉신이나 신하가 신서(臣誓)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재판관의 판결이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그의 군주를 살해할 수 있고 살해하여야 한다. 그러한 살해는 칭찬받을 만한 행위이다"라는 명제를 신앙과 윤리에 있어서 오류와 이단, 국가와 국왕에 대한 불충과 명예 손상으로 배척 · 단죄하였다.
교회 개혁 : 콘스탄츠 공의회는 교황과 교황청의 중앙 집권적 행정 체제와 재화(財貨) 집중의 재정 정책에서 발생되는 악폐를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헥상타>를 통해 공의회의 주도권을 확립한 다음 1415년 7월 17일에 4개 국가에서 8명씩, 그리고 추기경단에서 선출한 3명으로 구성된 개혁 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개혁안 작성에 착수, 제39차 총회(1417. 10.9)에서 <프레구엔스>가 가결되었다. 이 교령은 첫 부분인 공의회에 관한 사항에서 공의회를 교회 개혁의 수단으로 보아 앞으로 선출되는 교황들에게 정기적으로 공의회를 소집하는 의무를 지웠다. 교황들은 콘스탄츠 공의회의 폐회 이후 5년 안에 공의회를 소집하고 다음 공의회는 7년 안에, 그 이후로는 10년마다 공의회를 소집해야 하며, 공의회를 앞당길 수 있지만 연기할 수 없으며 공의회의 동의를 얻어 다음 공의회의 장소를 확정해야 하였다. 이어서 네가지 개혁에 대한 결정문이 나왔다. 첫째, 교황청에 분규가 발생할 때 대립 교황의 권한은 정지되고 공의회가 최고 행정권을 행사한다. 둘째, 선출된 교황은 투표 결과 이전에 사도적 전승의 가톨릭 신앙 수호를 선언한다. 셋째, 교황은 주교와 수도원장을 본인의 동의 없이 그리고 중요한 이유 없이 또는 추기경단 다수의 동의서 없이 전임할 수 없다. 넷째, 교황은 교회를 순회할 때 고위 성직 자에게 지불해야 할 순석료(巡錫料)를 징수하거나 사망한 성직자의 재산을 거둬들이지 않는다.
제40차 총회(1417. 10. 30)는 앞으로 선출될 교황이 공의회의 폐회 이전에 공의회의 동의를 얻어 시행할 교황(청)에 관한 18개 항의 개혁 분야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즉 ① 추기경의 수와 자질과 국가, ② 교황청의 교회록(beneficium) 보유, ③ 교회록 초년도 헌납금과 교황청 행정 수수료, ④ 교회록 수여와 교회록의 계승권, ⑤ 교황청에서 다루는 소송, ⑥ 교황청에의 상소, ⑦ 교황청 상서원과 내사원, ⑧ 교황 분규 기간에 이루어진 면속권과 교회록의 합병, ⑨ 성직 공백으로 인한 교회록 일시보유, ⑩ 성직 선거 확인, ⑪ 공석 교회록의 과세, ⑫ 교회(로마 교회를 포함한 교회) 재산 소유권 양도 금지, ⑬ 교황에 대한 징계와 폐위의 이유와 방법, ⑭ 성직 매매의 폐지, ⑮ 14항의 관면, ⑯ 교황과 추기경의 생활 유지, ⑰ 16항의 관면, ⑱ 10분의 1세 등이다.
이러한 18개 항의 개혁 과제는 교황 선출이 이루어진 후에 개최된 제43차 총회(1418. 3. 21)의 교황 마르티노 5세의 일곱 가지 개혁 법령에서 실현되었다. 첫째는 면속권에 관한 법령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1370~1378)의 서거 이후 주교좌 성당과 수도회 그리고 개인과 장소에 부여된 면속권은 무효화하며 앞으로는 심사 후에 면속권을 부여할 것이다. 둘째는 교회록의 합병에 관한 법령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서거 후에 정당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교회록의 합병은 무효화한다. 셋째는 성직 공석 중의 수익에 관한 법령이다. 교황은 공석 중 본당과 수도원에서 나온 소득을 거워들여 교황 궁무처에 귀속하지 않는다. 넷째는 성직 매매에 관한 법령이다. 성직 매매의 방법으로 서품된 성직자에게 성무 집행 정지령을 내리며, 성직 매매의 목적으로 돈을 주고받은 성직자는 파문한다. 다섯째는 관면에 관한 법령이다. 직무에 부여된 교회록을 받고 직무 수행을 거부하거나 소홀히 하는 성직자는 교황을 포함한 어느 누가 부여한 관면이라도 무효화한다. 여섯째는 세금에 관한 법령이다. 교황은 교황보다 낮은 직무자가 본당과 신자들에게 부과하는 세금 금령의 엄수를 명한다. 일곱째는 성직자의 생활에 관한 법령이다. 성직자의 복장은 평신도와 구별될 수 있어야 하되, 복장이나 외모에 있어서 청렴한 모습을 갖추도록 명한다.
폐회 : 제44차 총회(1418. 4. 19)에서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교령 <쿠피엔테스>(Cupientes)를 통해 콘스탄츠 공의회가 결실을 거두기를 바라면서 공의회는 교황이 교부들의 동의와 인준을 받아 정한 장소에서 소집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그리고 공의회가 폐회되기 한 달전에 차기 공의회의 장소를 정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이탈리아의 파비아(Pavia)를 공의회 장소로 지정하고, 공의회 참석 의무를 지닌 성직자들에게 참석을 명하였다. 제45차 총회(1418. 4. 22)에서 교황은 공의회를 폐회하면서 대사를 반포하였다. 즉 공의회 참석자들이 두 달 안에 합당하게 죄의 용서를 받으면 대사가 부여되며 이러한 대사 부여는 임종 때에도 적용된다고 밝혔다. 아울러 신자들에게도 대사 반포 후 1년 동안 매주 금요일에 금식재를 준수하면서 죄의 용서를 받으면 대사를 부여하며, 그 다음해에는 임종 때 대사를 원하는 사람이 대사받기에 장애가 없으면 대사가 부여된다고 첨언하였다.
〔평 가〕 1958년 10월 28일 베네치아(Venezia)의 총대주교인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1881~1963) 추기경이 교황에 선출되자 콘스탄츠 공의회를 소집하고 이 공의회에서 폐위된 요한 23세의 교황명을 선택하였다. 또 1959년 1월 25일에 공의회(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소집 계획을 밝히면서 앞으로 교회 행정은 교황(청) 중앙 집권 체제를 벗어나 전교회(全敎會)에 대해 주교들이 평등한 권한을 지니고 공동 책임을 갖는 체제로 전환함으로써, 공의회가 주교단의 기구로서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되기를 원하였다. 특히 공의회에서 주교단의 공동 권한과 공동 책임을 강조하는 교황 요한 23세의 구상은 가톨릭 교회사가들 사이에서 콘스탄츠 공의회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독일 교회사가인 프란츤(A. Franzen, 1912~1972)의 견해에 따르면 오늘날 연구자들의 관심 대상은 콘스탄츠 공의회의 합법성과 주요 사조, 교령 <헥상타>와 <프레구엔스>의 해석이라고 밝히면서, 연구 결과 콘스탄츠 공의회가 부당하게 의혹을 받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콘스탄츠 공의회의 합법성 : 오늘날 대부분 학자들은 1415년에 공의회에서 그레고리오 12세의 특사를 통해 공의회 소집을 선언하였을 때 로마 교황의 합법성이 확인되었고, 이후 콘스탄츠 공의회가 합법적 공의회로 인정되었다고 전해오는 견해를 반대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레고리오 12세의 공의회 소집은 합법성에 필요한 구성 요인이 아니며 <헥 상타>를 통해 세계 공의회로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1409년에 피사 교회 회의가 두 대립 교황인 로마 교황과 아비농 교황을, 중세 교회법 이단 조항에 따라 교황청 분규 상황을 조장함으로써 교회 일치와 교황 권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단죄, 폐위함으로써 로마 교황의 합법성은 상실되었다. 따라서 피사에서 선출된 알렉산데르 5세에 이어 요한 23세가 콘스탄츠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개회하였을 때 그는 합법적 교황으로 행동하였고, 이러한 공의회 소집과 공의회 개회는 적법한 행위이며, 콘스탄츠 공의회는 처음부터 적법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415년 3월에 요한 23세가 콘스탄츠를 빠져나감으로써, 이후 공의회는 2년 7개월 동안 교황 없이 진행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의 주요 사조 : 일부 학자들은 공의회의 구성원이나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들이 공의회주의자들이었다는 이유를 들어, 공의회 문헌을 작성하고 선언하는 데에 공의회 우위설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학자들은 공의회 우위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보수적 성향을 지닌 대부분의 교부들은 교회 혁명을 원하지 않았고 교회 분열이라는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중세 교회법을 적용하여 대립 교황들을 해임함으로써 공의회의 권위를 보호하고 교회 질서를 회복할 수 있었다. 아울러 독일의 왕인 지기스문트와 독일 대표단을 제외하고 공의회를 주도한 제르송과 아이와 같은 온건한 공의회주의자들도 교계 제도의 철폐, 교회의 민주화, 교회 조직의 해체와 같은 급진적이며 혁명적 주장을 내세워 이단으로 단죄된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Masilius da Padova, +1342)의 공의회 우위설을 반대하면서, 교황들의 대립 상황에서 교회 질서 회복을 위해 교황을 공의회에 예속시키고 공의회 권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교황의 권위를 살리고 존중하며 교계 제도는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기구이고, 교황의 수위권은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직접 나왔음을 확고하게 주장하였다.
<헥 상타>와 <프레구엔스>의 해석 : <헥 상타>가 언급하고 있는 "교회의 전반적 개혁"이라는 문구를 독일 왕 지기스문트와 독일인 및 일부 영국인은 공의회 수위권의 주창과 교황 수위권 불허로 해석하였으나, 대부분 참석자들은 정상적 상황에서 교황권을 제한하는 주장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상이한 해석은 콘스탄츠 공의회 이후 교황 지상주의와 공의회 우위설 사이의 지속적 논쟁의 원인이 되어 바젤 공의회, 종교 개혁 과정, 갈리아주의의 등장, 페브로니우스주의(Febronianismus, 주교단 우위설)논쟁,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의 중요한 주제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론에 대한 토론에 다시 등장하였다. 오늘날 보트(P. de Vooght)를 포함한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콘스탄츠 공의회는 공의회 우위설을 고무(鼓舞)한 <헥 상타>를 신앙의 규범으로 정의하였다. 즉 공의회는 신앙과 교회 행정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최종 결정을 내리는 곳으로서, 공의회 교부들에 따르면 예외적 경우만이 아니라 정상적 상황에서도 신앙 문제에 관한 상소의 최고 법정이며, <프레구엔스>는 공의회 우위설의 정의를 완결하였고, 교의적 구속력을 지니고 있어 앞으로 공의회가 교회 행정을 맡으며, 교황 마르티노 5세 자신도 온건한 공의회주의자로서 칙서 <인테르 쿵타스>에서 공의회 우위설에 대해 적어도 무언의 확인을 하
였다.
프란츤과 예딘(H. Jedin, 1900~1980)을 비롯한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은 역사적 사실을 들어 <헥 상타>의 교의적 구속력을 반대하고 공의회 교령들의 비상적(非常的)특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교령들은 위기 상황에 대한 비상 해결 수단이었을 뿐 신앙에 관한 전반적 선언이 아니다. 공의회의 교부들 어느 누구도 <헥 상타>를 통해서 공위회 우위설에 대한 무오류적 교의 정의를 선포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 아울러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공의회에의 상소를 금지함으로써 <헥 상타>를 인정하지 않았고, 절대적 유효성을 지닌 교의적 문헌으로 선언하지 않았다. 아울러 <프레구엔스>는 <헥 상타>의 공의회 우위설에 대한 확인이며 교회 조직을 입헌 군주국 정치 체제로 전환하고 교회에 의회 제도를 도입할 목적을 담고 있는 교령이 아니다. 간헐적으로 소집되는 공의회는 어떤 안건도 처리할 수 없고, 법에 따라 10년마다 소집되는 의회는 의회 제도를 뿌리내릴 수 없으며, 교회의 항구적 조직을 개혁할 수 없다. <프레구엔스>는 교의적 의미가 없는 교회 규율에 관한 공의회 문헌이다. (⇦ 지기스문트 ; → 공의회 우위설 ; 교황 지상주의 ; 마르티노 5세 ; 서구 대이교 ; 위클리프, 존 ; 제르송, 장 드 ; <헥상타> ; 후스, 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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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츠 공의회
- 公議會
[라]Concilium Constantiense · [영]Council of Const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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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추기경단은 교황청 분규 해결을 위해 베네딕도 13세를 해임하였다(1378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