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고대 도시 중 하나. 현재 터키(Turey)의 최대 도시이자 항구인 '이스탄불' (Istanbul)이다. 라틴어 지명인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는 '콘스탄티누스(Consantinus)의 도시' 라는 의미이다.
〔기원과 유래〕 이 도시는 지리적으로 흑해와 지중해의 길목이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무역과 군사적 요충지로서 그 중요성이 대단히 컸다. 따라서 고대부터 거대한 무역 항구를 이루어 동 · 서양의 무역 및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곳이었으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내려 뻗은 삼각뿔 형태의 반도 지형으로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만(灣)으로 되어 있어, 외적이 침략하기 어려운 천혜의 요충지였다.
이곳에 처음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000년경이었으며 기원전 658년 메가라(Megara)의 왕 비자스(Βνζας)가 자신의 이름을 딴 '비잔티온' (Βυζάν-τιον)이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비잔티움(Byzantium)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그 후 아테네(Athe-nae)인, 스파르타(Lacedaemon)인들의 지배를 거쳐 기원전 512년부터는 페르시아(Persia)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알렉산더 대왕(기원전336-323)에게 정복당한 이후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69~79) 황제 때 독립 도시로서의 여러 가지 특혜를 박탈당하고 로마 제국에 속한 아시아의 한 주(州)로 합병되었으며, 196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 황제에 의해 도시가 거의 파괴되고 주민들은 산개(傘蓋)되었으나 곧 재건되었다. 현재의 이스탄불이란 지명은 '도시 가까이' 라는 뜻의 그리스어 '에이스 텐 폴린' (εἰς τὴν πόλιν)에서 유래한 것이며, 슬라브인들은 '차리그라드'(Tsarigrad) 즉 '황제의 도시' 라고 불렀다.
〔새 로마, 콘스탄티노플의 역사〕 공동 황제였던 리치니우스(308~324)에게 비잔티움을 양도받은 콘스탄틴 대제(306~337)는 토착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도시를 파괴 하였으나, 기원전 500년부터 서기 1850년까지 지진 발생 햇수가 무려 154년(발생 일수 501일)이나 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잦은 지진 때문에 크게 번성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자연적인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틴 대제가 이곳을 제국의 수도로 정한 이유는 게르만족들의 끊임없는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연 재해에 대해 언급한 책이나 소식을 더이상 유포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이주민들이 좋은 조건에서 살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혜택을 베풀었다. 도시의 공간적인 배치나 구조도 로마와 비슷하게 계획하여 14개 구역으로 나누어 건설하고, 일곱 개의 언덕 위에 건설된 로마를 생각하며 새로운 도시를 '일곱 언덕의 도시' 라고 불렀다.
콘스탄틴 대제는 이 새로운 도시가 로마 이상의 위상을 갖도록 하기 위해 인적 구성이나 궁궐, 문화 활동, 도시의 건축 등 모든 면을 최상으로 선택하였다. 부자들은 집을 모자이크로 장식하고 주인의 가마 행렬 앞에서 군중들을 헤쳐 길을 트게 하는 많은 수의 노예들을 늘 대동하여 부를 과시하였으며, 식사 때에는 악사, 무희, 곡예사들을 동원하여 여흥을 즐기는 등 사치가 극에 달하였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들로 인해 '새 로마'(civitas iunior Romae), 즉 콘스탄티노플의 정치적인 위상과 역할은 곧 로마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후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와 로마 사 도좌의 갈등을 예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최고 전성기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가 세상을 떠날 즈음인 565년이었으며, 바실리우스 2세(976~1025)의 치세를 마지막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1453년 메흐메트 2세(1444~146, 1451~1481)의 침략으로 동로마 제국의 역사는 끝났다. 그 뒤 1566년에 다시 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1922년 군사력의 약화로 이슬람의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탄생하면서 1923년 수도를 앙카라(Ankara)로 이전하였다.
〔그리스도교와의 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기원 : 콘스탄티노플에 그리스도교가 전해진 기원은 불투명하다. 교황 빅토르 1세(189~198/199?) 시기에 반(反)삼위 일체를 주장하다가 로마에서 축출된 비잔틴 출신 무두장이 테오도토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전해졌다는 설도 있으나, 외국인들의 왕래가 잦고 문화 교류가 활발한 콘스탄티노플의 지리적인 위치를 보아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에 트라치아(Thracia)의 헤라클레아(Heraclea) 대교구 소속의 한 사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의 유래 : 콘스탄틴 대제는 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였던 리치니우스와 합의하여 밀라노(Milano)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는 내용의 편지를 각 지방 총독들에게 보냈다(313). 그러나 이러한 배려만으로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에 입각하여 제국을 통치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과거 로마 제국의 황제처럼 그 역시 제국 종교의 대사제(Pontifex Maximus) 역할까지 겸한 체제와 권한을 포기하지 않았 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백성들이 믿는 이교(異敎)의 위력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새 로마' 건설을 마치고 모든 신민들이 참석하는 '새 로마' 천도 의식을 거행하면서 그리스도교 예식과 이교도 의식을 병용하였다고 한다.
3세기를 거치면서 대도시의 주교좌들을 더 큰 단위의 조직으로 묶으려는 노력이 이루어져, 총대주교좌(patri-archates)가 성립되었다. 325년에 열린 니체아 공의회 법규 제6조는 로마,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안티오키아(Antioquia)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 대도시의 주교들이 지녔던 '옛 특권' 이 보존되어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그러나 5년 후 그 옛 특권을 결정적으로 저해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즉 '새 로마' 인 콘스탄티노플이 건설되어, 도 시가 팽창하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교회들이 생겨난 것이다. 당시까지 헤라클레아 대주교의 권위 아래에 있던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는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서의 위상에 걸맞게 콘스탄티노플 주교좌의 서열도 그에 상응한 위치로 격상되기를 바랐다. 즉 주교좌들 간의 서열 문제가 불거져 나오게 된 것이다.
7세기 초반에 출현한 전설에 의하면, 비잔티움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시작된 것은 사도 안드레아에 의해서 였다고 한다. 아마도 '새 로마' 의 위신에 걸맞게 그리스도교의 역사성을 드러내고 12사도의 으뜸인 베드로 사도의 주교좌에 버금간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일 먼저 부르심을 받은 안드레아 사도를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전설은 기록상으로 입증되지 않았으며,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호칭 문제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서 논란이 한참 일어나고 있을 때 뒤늦게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7세기 초부터 서방에까지 급속히 확산되어 《로마 순교록》(Martyrolologium Romanum)의 10월 31일에 삽입되었다.
215년경까지는 어떠한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이름도 거명되지 않았으며 10세기에 거론되었던 초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좌도 3세기의 기록에서는 실제로 찾아볼 수 없다. 메트로파네스(Metrorphanes, 315~327?) 이후부터 에야 비로소 고위 성직자의 이름이 기록에 나타난다. 콘스탄티우스 2세(337~361)와 발렌스(364~378) 황제의 지원으로 40여 년 동안(339~378) 이단인 아리우스주의(Arianismus)의 요새가 되었던 콘스탄티노플은 378년 발렌스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azianzenus, 329/330~389/390)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되어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정통 가톨릭을 복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381년 종교적 일치를 위해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가 소집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법규 제3조에 의해, 콘스탄티노플 주교좌의 위상은 격상되었다. 즉, '새 로마' 인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는 옛 로마 주교에 버금가는 영예를 갖는다고 규정한 것이다. 이 같은 규정은 당시까지 동방에서 가장 중요한 주교좌로 간주되던 알렉산드리아 주교에게는 심각한 굴욕이었다. 그래서 테오도시우스 1세 서거(395) 후, 제국에는 두 개의 동등한 권한이 있음이 주장되었다. 즉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에 각기 황제가 있듯이, 교회에도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에 각각 한 사람씩 최고의 장상이 있어야 한다는 양두 체제(兩頭體制)가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계획이었다. 이 문제는 451년 칼체돈 공의회에서 일시적으로 해결되었다. 즉 법규 28조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에게 대도시인 폰투스(Pontus), , 아시아, 트라치아 관구의 대주교들이 갖고 있던 권한과 동등한 권한이 부여된 것이다. 이 규정으로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의 교회들과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였고,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에게도 후대에 와서야 일반화되었던 총대주교의 직위가 주어졌다. 또한 덕망 높은 에페소(Ephe-sus), 체사레아(Caesarea) , 헤라클레아의 주교들이 이 새로운 총대주교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교황 레오 1세(440~461)의 사절들은 즉시 항의하였고, 교황 또한 28조는 무효라고 선언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6세기 초까지 35년간(484~519) 아카치우스(Acacius)이교가 생겼을 때 '새 로마' 의 주교에게는 '보편적 총대주교 (Ecumenical Patriarch)라는 직함이 주어졌다. 545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지위는 로마의 주교 다음이며, 그 외의 다른 모든 주교보다 높다고 선언하였다(Novellae 131, 2). 이에 따라 주교 요한 4세 네스테우테스(Johannes IV Nesteutes, 582~595)가 자신에 대한 공식 칭호로 '총대주교' 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는 격렬하게 항의 하였으나, 황제가 승인하였다는 이유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들은 계속해서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이 헤라클레아 관구에 속한 교구에서 동로마 제국의 수석 총대주교좌로까지 승격된 데에는 고위 성직자들의 야심과 황제 교황주의(Caesarpapismus)에 담긴 정치적인 의도가 크게 작용하였다. 온 제국에 명령하는 황제와 원로원들의 최상위 권력 구조에 걸맞게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도 제국의 다른 모든 주교들에 대해 서열상 우위에 있어야 하며, 적어도 제국의 모든 주교로부터 상소(上疏)를 받을 수 있는 권한 등 상위의 재치권을 가져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이유로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인정된 로마 주교의 명예와 권한 등의 최상권을 탈취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 주교가 지닌 최상권의 신앙적인 본래의 근거를 외면하고, 로마가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로마 주교가 첫 자리를 점유하였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황제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인위적으로 조성하여 자기 휘하의 주교들이 교계 제도상 제2 인자로서의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로마 주교에 버금가는 특권을 요청하였지만, 이미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공인된 로마 주교좌의 보편 교회에 대한 수위권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라는 위상에만 근거를 둔 것이라면, 동로마 제국이 해체되고 터키라는 단일 국가의 일개 도시로 격 하된 콘스탄티노플에 현재도 총대주교좌가 있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막연하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동로마 제국 황제의 관계 :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활동은 이교도 시기에 로마 황제들의 정치적 이론에 따라 구상된 종교의 역할에 준하여 조정되었다. 즉 황제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대리자로 신적 직무를 부여받았으며, 하느님의 영감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영적인 지도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물질적 복지를 보장하여 주는 권한과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도록한 것이다. 이에 따라 황제는 교회 업무에 개입하여 조종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제국 수도의 총대주교는 비록 그가 황제의 동반자 혹은 조언자로 여겨졌을지라도 특별한 경우 외에는 관할 구역 안에서 직무상 영적 영역에 대한 권한을 독립적으로 요구할 수 없는 종속 관계로 전락하였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콘스탄틴 대제와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라는 국교를 통하여 제국을 안정시키고 제국의 다양한 계층을 일치시키고자 시작한 과업을 완수시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이해하였다. 따라서 제국의 안정과 일치를 저해하는 그리스도교 내의분열, 예를 들면 그리스도 단성설과 같은 이단은 절대로 방치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또한 종교적 영역에서 그리스도교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이교와 이단을 배척하고자하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그는 황제의 권력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오(Ambrosius, 339~397)는 황제가 교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황제가 있으며, 종교 문제에 있어서 황제는 특히 로마의 주교에게 종속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교회의 고유한 영역까지도 자신의 통치 대상으로 삼고 심지어는 교의 문제에도 간섭하였다. 이러한 교의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으로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1~451)와 같은 이단들과 그러한 경향을 지닌 사람들, 예를 들면 아카치우스(471~489)나 성화상 파괴를 주장하는 총대주교들의 활동이 가능해졌다.
로마 교황의 입장에서 제국의 수도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간 것은, 복음 정신에 입각하여 신앙의 문제에 보다 자율적으로 대처하고 신앙을 순수하게 전승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즉 교황들은 예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플 주교들처럼 권력 구조상 단순한 궁정 주교로 전락해 버릴 위험도 없었다. 결국 동로마 제국에서는 황제들이 교회를 통치한 반면, 서방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자율성이 성숙하게 성장되는 기회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로마 사도좌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의 갈등 : 서방에서뿐만 아니라 동방에서도 일반적으로 인정된 로마 교회의 우위성에 따라, 로마 주교는 이탈리아의 수석 주교이자 동시에 서방 교회의 총대주교라는 특별한 위치를 갖는다. 343년에 개최된 서방 교회의 사르디카(Sardica, 현 불가리아의 소피아) 공의회는 교의상의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로마의 주교가 전 교회를 위한 최고 항소법원이라고 선언하였다. 교황 다마소 1세(366~384)는 교황으로는 처음으로 로마 교회를 '사도좌' (Sedes Apostolica)라고 불렀으며, 교황 레오 1세는 로마 주교가 베드로의 후계자로 사도 베드로의 힘과 권위를 부여받아 세계의 모든 교회를 이끌고 통치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는 확신에 바탕하여 수위권을 행사하였다. 그는 다른 주교들은 교회를 보호하려는 교황의 사목적인 열망의 협력자로 불림받은 것이지, 교황이 지닌 충만한 권력을 함께 나누기 위해 불림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in partem sollicitudinis, non in plenitudinem potestatis : 서한 14, 1). 황제 교황주의 정책으로 인해 종종 교황을 그의 의지에 복종시키려고 하였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도 로마의 주교를 "첫째" 그리고 "하느님의 모든 사제들의 으뜸"(553년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I, 1, 7 ; 545년의 Novellae 131, 2)이라고 칭하였다. 동방에서 그리스도론 논쟁이, 서방에서는 구원론 논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로마 주교의 발언은 권위가 있었으며, 교황 사절들은 공의회에서 상석을 차지하였다. 519년 동방 주교들이 교황 호르미스다(514~523)의 교서를 받아들임으로써 아카치우스 이단이 종식되자, 그들 또한 로마의 가르침에 승복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로마 교회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보편적 총대주교' (πατριαρχης οικουμενικος)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그리스어로는 '보편적' (οικουμενικος)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제한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하지만, 서방 교회에서는 전세계 교구들을 지칭하는 뜻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총대주교가 그 용어를 쓰는 것에 즉각 반대하였고, 이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카엘 3세(842~867)가 교회 내에 분쟁이 일어난 것에 대해 책임을 물어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이냐시오(Igna-tius, 847. 7. 4~858, 867. 11. 23~877. 10. 23)를 파면시킨 후 포시우스(Photius, 801?~897)를 총대주교로 임명(858. 12. 24~867. 9.25, 878~886. 12)하였다. 교황의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황제가 행한 이러한 조치들 때문에 로마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비록 반목하는 집단들을 화해시키고 일치시키는 포시우스의 능력은 높이 평가받았지만, 평신도였기 때문에 나흘에 걸쳐(858. 12. 22~25) 필요한 서품 예식을 차례로 받은 후 총대주교로 착좌하였다는 사실도 비정상적인 임명으로 간주되었다.
성화상 논쟁(Controversia sacrarum imaginum, 726~843)은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관계를 더욱 긴장시켰다. 로마 교회를 비롯하여 정통성 있는 교의를 수호하려는 측에서는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왔던 성화상 공경을 지지하였고, 황제의 뜻에 복종하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측에서는 우상이라며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불화의 근본적인 원인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간의 경쟁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가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또한 십자군 전쟁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동방 교회 신자들이 로마에 대해 지닌 감정을 악화시켰다. 십자군들의 행동이 본래의 취지와는 전혀 맞지 않게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1182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대량 학살과 1204년의 제4차 십자군 원정대들의 참혹한 폭력으로, 콘스탄티노플과 로마는 감정적으로 완전히 분열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는 점령 초기부터 십자군들로 인해 일어난 참상을 치유하고 화해시키고자 노력하였지만, 처참한 피해를 본 그곳 사람들은 화해를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들은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제국을 보존하려는 황제들과 함께 로마와의 동맹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열린 리용 공의회(1276)와 피렌체 공의회(1439)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비해 로마 교회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인정하였지만 이는 극히 소수의 성직자와 사람들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졌을 뿐, 1450년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성당에서 개최된 공의회에서 로마와의 동맹을 꾀한 총대주교가 파면되었다. 1452년 12월 콘스탄티누스 11세(1448~1453)는 이전의 화해 동맹의 유효성을 재선언하고 서방 세계와의 군사적 동맹을 도모하였지만, 결국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제국은 함락되었다.
로마 사도좌와의 단절 : 일반적으로 미카엘 체룰라리우스(Michael Cerularius, 1000?~1059)가 총대주교좌에 있을 때(1043~1058) 동 · 서방 교회가 완전히 분열되었다고 이해하지만,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이는 점진적인 분열의 과정을 거친 것이라고 한다. 즉 양쪽 교회 간에 지속적으로 축적되어 왔던, 의사 소통의 어려움에 따른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교차되면서 생긴 결과라는 것이다. 동방 교회 사람들 중 라틴 문화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으며, 로마에도 비잔틴 문화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들이 더더욱 없었다.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는 평신도로서 매우 연만한 나이에 성직자로 임명되었다. 서방 교회에 대하여 극단적인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그는 전례에서 누룩이 들어 있는 빵을 사용한다거나 토요일마다 전례를 거행하는 등, 서방 교회에 체계적으로 대항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라틴 교회들이 서방 교회와는 다른 이 같은 예식에 동참하지 않자, 새 총대주교는 그곳들을 폐쇄시키고 로마에 위협적인 서신을 보내는 등 서방 교회에 대한 악의적인 선전 활동을 펼치며 다소 과장된 주장을 하였다.
이에 교황 레오 9세(1049~1054)는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1042~1055)에게 불편한 심기를 전하고 총대주교를 책망하는 글을 담은 공문을 보냈다. 이 사절단의 책임자는 실바 칸디다의 훔베르트(Hum-bert di Silva Candida) 추기경이었다. 그는 교회의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었고, 이 과업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교권이 속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야 하며 더욱이 속권이 교권에 예속되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기에, 속권에 전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동방 교회에 강한 불쾌감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적인 이해 타산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의 위상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총대주교는 교황 사절들을 무례하게 대하며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훔베르트 추기경은 1054년 7월 16일 미사에 참례한 성직자와 회중 앞에서 공공연하게 총대주교를 비난하며 격렬한 항의 서한과 파문 교서를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중앙 제대 위에 놓고 떠나갔다. 그러나 파문 교서를 공표할 전권이 훔베르트에 게 과연 위임되었는가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아울러 양쪽 교회가 감정적으로 주고받은 파문의 법적인 효력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왜냐하면 교황 레오 9세는 이미 그해 4월 19일에 사망하였고, 후계자 빅토르 2세(1055~1057)는 1055년 4월 13일에야 선출되었기에 교황좌는 공석이었다. 따라서 체룰라리우스 측에서는 교황도 아니고 로마 교회도 아닌, 사절들만을 파문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한 단절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1964년 11월 21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일치의 재건' 을 촉진하기 위해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을 공포하였다. 이 교령은, "교회의 분열은 그리스도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며 세상에는 걸림돌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여야 할 지극히 거룩한 대의를 손상시키고있다"며, "이 모든 것에 외부 원인이 더해져 상호 이해와 사랑의 부족으로 분열의 빌미가 되었다"라고 밝혔다. 따라서 "이제 친교와 일치를 회복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긴요한 사항 외에는 다른 짐을 더 지우지 않아야' (사도 15, 28) 할 필요가 있으며, 온갖 경쟁심을 물리치고 사랑의 정신으로 그들과 형제적 협력을 발전시켜" 나가도록 권고하였다. (→ 동로마 제국 ; 동방 전례 ; 비잔틴 교회 ; 비잔틴 예술 ; 사도좌 ; 성화상 논쟁 ; 수위권 ; 십자군 ;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 체룰라리우스, 미카엘 ; 총대주교 ; 칼체돈 공의회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 콘스탄틴 대제 ; 터키 ; 포시우스 ; 황제 교황주의)
※ 참고문헌 K. Bihlmeyer · H. Tuechle, Storia della Chiesa I. II, Morcelliana, 1973/ L. Brehier, Constantine et la fondation de Constantinople, 《Rev Historique》 119-2, 1915, pp. 241~272/ Ch. Bur, John Chrysostom and His Time I-II, London, 1959. 1960/ G. Dargon, Naissance d'une capitale. Constantinople et ses institutions de 330 a 451, Paris, 1975/ I. Dujceb, 《DPAC》 I, pp. 806~812/ L. Duchesne, The Early History ofthe Christian Church II, London, 1912/F. Dvornik, The Idea ofApostolicity in Btzantium and the Legend of the Apostolic Andrew, Cambridge, 1958/ A. Fliche · V. Martin ed., Storia della Chiesa, IIVI, Torino, 19721 A. Franzen,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E.A. Grosvenor, Constantinople I-II, London, 1895/R. Janin, 《DHGE》 XIII, pp. 626~754/ H. Jedin, History of the Church(The Imperial Church from Constantine to the Early Middle Ages), II, New York, 1980/ H. Mattingly, Christianity in the Roman Empire, New York, 1967/ E. Oberhummer, Realencyclopedie, 4-1, pp. 963~1013/ G. Ostrogorsky, Histoire de l'Etat Byzantin, Paris, 1956/ H.Rahner, Chiesa e struttura politica nel cristianesimo primitivo, Jaca Book, 1975/ S. Vailhe, Les origines de I'Eglise de Constantinople, Echosd'Orient 10, 1907, pp. 287~295. [金喜中]
콘스탄티노플
〔라〕Constantinopolis · 〔영〕Constantin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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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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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 있는 콘스탄티노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