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 공의회

- 公議會

〔라〕Concilium Constantinopolitanum · 〔영〕Council of Constantin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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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24년 콘스탄틴 대제(306~337)에 의해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이후 제국의 중심지가 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현 Istanbul)에서 네 차례 개최되었던 보편공의회(381, 553, 680~681, 869~870) .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장기간 지속되었던 아리우스주의(Arianismus) 논쟁의 종식과 성령의 신성을 부정한 마체도니우스파(Macedoniani)에 대항하여, 정통 신앙을 수호할 목적으로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가 381년 5월부터 7월 9일까지 개최한 제2차 보편 공의회.
참석자 : 공의회 기간 중 사망한 안티오키아의 멜리시오(Melitius Antiochena, +381) 주교가 주재한 이 공의회에는 약 150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이 중에는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azianzenus, 329/330~389/390), 니사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yssenus, 335?~395?), 예루살렘의 치릴로(Cyrillus Hierosolymitanus, 315?~387) 다르소의 디오도로(Diodorus Tarsens, ?~394?) 세바스테(Sebaste)의 베드로(Petus) 등이 참석하였다. 또한 황제의 뜻에 따라 마체도니우스파의 시지쿠스(Cyzicus)의 엘레우시우스(Eleusius)와 람프사쿠스(Lampsacus)의 마르티누스(Martinus)가 이끄는 36명의 주교들도 참석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380~384)인 디모테오(Timothaeus)가 이끄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주교들은 불참하였다. 공의회가 폐막된 후 황제는 7월 30일에 훈령을 반포하여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선포하였다. 비록 서방 교회의 주교나 교황의 사절은 파견되지 않았지만, 동서방 교회 모두 이 공의회를 두 번째 보편 공의회로 인정하고 있다.
신앙 고백문 :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뜻에 따라 대다수의 공의회 교부들은 성령의 신성(神性)을 옹호하였지만, 마체도니우스파는 이를 거부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342~348, 350~360)였으며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령의 신성을 거부한 마체도니우스(Mace-donius)의 추종자인 마체도니우스파는, 성령이 성자와는 달리 품위(dignitas)에 있어서 하위이며 단순한 직무자(minister)나 천사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래서 아타나시오(Athanasius Alexandrinus, 295?~373)가 362년 소집한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는 성령이 성부, 성자와 동일한 분임을 명백하게 선포하였던 것이다.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역시 성령의 신성을 재천명하려고 하였으나, 마체도니우스파의 주교들이 이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공의회 교부들의 신앙 고백과 당시 이단들을 단죄하는 내용을 담은 교서가 작성되었다. 이 교서는 현재 전해 오지 않지만, 382년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 서한을 통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교부들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본체(οὐσία)임을 주장하면서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고백하였다. 또한 칼체돈 공의회(451)의 증언에 따라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교부들이 신경을 작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본래 이 신경은 예루살렘 교회의 세례때 사용한 신앙 고백문에 성령에 관한 표현을 첨가하였는데, 후대에 첨가된 '성자로부터' (Filioque)라는 표현만 빼면 현재 미사에서 사용하는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과 같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공의회가 이 신경을 작성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칼체돈 공의회 전까지 이를 증언하고 있는 문헌이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레봉(J. Le-bon)과 켈리(J.N.D. Kelly), 리터(A.M. Ritter) 등의 학자들은, 칼체돈 공의회에서 '150명 교부들의 신앙 진술' (Ex-positio fidei CL patrum)이라고 명명한 신앙 고백문이 니체아 신경을 반복하면서 마체도니우스파에 반대하며 성령의 신성 부분만 첨가한 것으로 본다. 칼체돈 공의회 회의록에 나타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신앙 고백문은 다음과 같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희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흘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나이다. 그분께서는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이 신앙 고백문은 니체아 신경을 반복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라고 루가 복음서 1장 33절을 인용하면서, 안치(Ancyra)의 마르철루스(Marcellus)와 시르미움(Sirmium)의 포티누스(Photinus)의 오류를 반박하고 있다. 또한 성령께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라고 고백함으로써 성령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님' (Dominus)이란 표현은 피조물이 아닌 분을 가리키는 성서상의 단어이며, '생명을 주시는' (vivi-ficans)이라는 표현은 피조물의 모든 생명의 원천임을 강 조하는 것이다. '성부에게서 발하시고' (qui ex Patre proce-dit)라는 표현은 성령이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마체도니우스파의 주장을 일축하고 있다. 아울러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qui cum Patre et Filio si-mul adoratur et conglorificatur)라는 표현은 바실리오(Basili-us Magnus, 329~379)가 자신의 저서인 《성령론》(De Spritu Sancto, 375)을 통해 벌인 논쟁을 연상시킨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똑같이 영광과 흠숭을 받는다면, 같은 본성을 지닌 것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공의회의 결정 : 그리스어로 전해져 오는 공의회 결정집(collection of canons)은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가 7개의 규정을 결정한 것으로 전하는 반면, 라틴어로 쓰여진 결정집은 4개의 규정만을 소개하고 있다. 교회사가인 소크라테스(Sokrates Scholasticus, 380?~450?)와 소조메노(S.H. Sozomenus, 380?~?) 역시 4개의 규정만을 명백하게 암시하면서, 나머지 3개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그로 인해 학자들은 5조와 6조는 382년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에서 구성된 것이고, 7조는 5세기 중반에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안티오키아의 주교(459~470) 마르티리오(Martyrius)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췌된 것으로 본다.
1조는 니체아 공의회의 권위를 다시 한 번 천명하면서 모든 이단을 파문에 처하였다. 특히 에우노미우스파, 아리우스파, 마체도니우스파, 사벨리우스파, 마르첼리아누스파, 포시우스파, 아폴리나리우스파 등을 단죄하였다. 2조는 각 교구 주교의 재치권은 자신의 교구 밖에서는 통용되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초대받지 않은 경우, 주교는 자신의 교구 밖에서 서품식이나 어떠한 교회일도 수행할 수 없음을 규정하였다. 여기서의 교구 개념은 현재의 개념과는 다르다. 오히려 로마 제국의 행정 구역 개념과 연결되기에 여러 관구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3조는 콘스탄티노플이 '새 로마' 이기 때문에, 주교 역시 로마 주교 다음 영예의 특권을 누린다고 적고 있다. 이 조항은 로마의 수위권이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것보다는 정치적인 중요성에서 오는 것이라는, 서방 교회에서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던 원칙에 근거한 것이다. 4조는 막시무스(Maximus) 주교의 서품이 불법이라고 선포하였다. 유배 생활을 끝내고 379년 말경 콘스탄티노플에 온 막시무스는 처음에는 당시 주교인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에게 환대와 신뢰를 받았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당시 주교(373~380)인 베드로의 도움으로 콘스탄티노플의 합법적인 주교가 되려고 한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그레고리오 주교가 병중에 있던 380년 어느 날 밤 몰래 주교 서품을 받았다. 이에 대중들이 분개하자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지지를 얻으려 하였으나, 황제는 그레고리오 주교의 지지자였기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의회는 막시무스의 서품이 불법적인 것이라 선포하였고,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당시 원로원 의원이었지만 세례를 받지 않은 넥타리오(Nectarius 임명하였다. 그는 곧 세례를 받고 주교 서품을 받아 381 ~397년까지 콘스탄티노플 주교직을 수행하였다.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Theodorus Mopsuestenus, 350?~428), 치루스의 테오도레토(Theodoretus Cyrensis, 393?~460?), 에데사(Edesa)의 이바스(Ibas, 435~457) 등의 신학자들과 그들의 저서를 포함하는 '삼장서' (三章書, Tria Capitula)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가 553년 5월 5일부터 같은 해 6월 2일까지 개최한 제5차 보편 공의회.
배경 : 칼체돈 공의회(451)의 결정 사항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그리스도 단성설(monophysitismus)을 따르는 이들에게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테오도라(Theodora) 황후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543년경 단성설을 따르는 이들은 삼장서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을 형성하였고, 여기에 오리제네스주의자들도 가세하였다. 544년 황제가 삼장서에 반대하는 훈령을 반포하자 대다수의 동방 주교들이 여기에 동조하였다. 하지만 서방 교회에서는 《삼장옹호》(Defensio Trium Capitulorum)를 저술한 헤르미아네(Hrmiane)의 파쿤도(Facundus)와 교황 비질리오(537~555)의 조카인 루스티코(Rusicus)와 같은 반대자를 등장시켰다. 교황은 처음에는 황제의 훈령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훈령에 서명한 이들과 통교하기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547년 1월부터 콘스탄티노플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태도를 바꾸어, 동서방 주교들의 모임을 개최하여 삼장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일부 서방 교회 주교들은 교황에게 모임을 중단하고 각자 서면 투표를 하도록 조언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칼체돈 공의회의 권위를 살리면서도 삼장서를 단죄하는 <판결문>(Judicatum)을 548년 4월 11일에 발표하였고, 이 <판결문>은 서방 교회에 많은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551년과 553년에 새로운 훈령을 발표하여 거듭 삼장서의 단죄를 선언하였다. 교황은 이에 반대하면서 시칠리아나 이탈리아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여 많은 서방 교회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의 개최 및 진행 : 결국 553년 5월 5일 하기아 소피아 대성전 부속 건물의 큰 홀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552~565)인 에우티키오(Euychius)의 주재로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541~570) 아폴리나리오(Apollina-rius),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545~559) 도미노(Domi-nus), 그리고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파견한 3명의 사절단 주교와 14명의 아프리카 주교를 포함한 약 158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의회가 개최되어 삼장서 문제만을 다루었다. 5개의 총대주교좌가 각각 동일한 숫자의 주교를 파견할 것을 황제가 요구하였기 때문에, 공의회 교부들 중에는 서방 교회보다 동방 교회 교부들이 훨씬 많았다. 교황은 신병상의 이유로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사실 삼장서 단죄에 결부되는 것을 피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5월 14일에 교황은자신처럼 공의회에 참여하기를 꺼리는 16명의 서방 교회 주교들-9명의 이탈리아 주교들, 2명의 아프리카 주교들, 2명의 일리리쿰(Illyricum)주교들, 3명의 소아시아 주교들-이 서명한 '헌장' 을 반포하여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의 작품에서 뽑은 60개의 명제를 단죄하면서도, 이미 사망한 그를 파문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또한 테오도레토와 이바스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였는데, 이미 칼체돈 공의회에서 이들이 이단에 물들었다는 의혹을 벗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의회는 5월 17일과 19일에 열린 회기에서 오류에 빠진 채 사망한 이에 대해서도 단죄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5월 26일에 열린 7차 회기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작성한 문건과 비질리오 교황이 삼장서를 단죄하였던 일련의 문헌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황제의 요청에 따라 교황을 단죄하지는 않았지만, 미사 때 기억할 생사자(生死者) 명단(diptycum)에서 이름을 삭제하였다. 6월 2일에 열린 마지막 회기에서 공의회는 14개 조항의 파문문(anathematismus)을 반포하여 테오도로의 모든 저술 작품 및 에페소 공의회(431)에서 발표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Cyrillus Alexandrinus, 380~444)의 파문문에 반대하는 테오도레토의 신학적 진술과 마리(Mar)에게 보낸 이바스의 편지를 단죄하였다.
결과 : 약 6개월 동안 이 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한 교황은 결국 "아우구스티노의 모범을 따라" 이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인준하는 서한을 12월 8일 콘스탄티노플의 에우티키오 총대주교에게 보냈다. 그리고 554년 2월 23일의 두 번째 '헌장' 에서 자신의 태도를 밝히면서 칼체돈 공의회에서 결정한 것과 최근의 단죄에 대한 화해를 꾀하고자 노력하였다. 실바 타로우카(P. Silva Tarouca)는 비질리오 교황의 편지나 삼장서를 단죄한 두 번째 헌장이 실제로는 교황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교황이 공의회의 결의 사항에 동의하였다고 여겨지는 기원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브레스(R. Devresse)는 비질리오 교황의 후계자이며 원래 삼장서의 옹호자였다가 태도를 바꾼 교황 펠라지오 1세(556~561)가 그 헌장의 저자라고 주장한다. 공의회의 결정 사항은 동방의 단성설을 따르던 이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정치적 야심이 결부되어 칼체돈 공의회와의 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다. 물론 공식적으로 칼체돈 공의회에 대해 반대의 뜻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에페소 공의회의 연장선에서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대한 단죄로 삼장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그리스도 단의설(mono-theletismus)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668~685)가 680년 11월 7일부터 681년 9월 16일까지 개최한 제6차 보편 공의회.
배경 : 648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스 2세(641~668)는 칙령(Typos)을 반포하여 그리스도 단의설 논쟁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교황 마르티노 1세(649~653)는 649년에 105명의 서방 교회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라테란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그리스도 단의설을 단죄하고, 그리스도 안에는 두 의지가 있음을 천명하였다. 마르티노 1세의 후임 교황들도 계속해서 그리스도 단의설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678년에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도노 교황(676~678)에게 서한을 보내어, 12명의 주교와 4명의 서방 교회 수도원장을 파견하여 동서방 신학자들의 모임에서 교황을 대리하도록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서한이 도착하기 전에 서거하였고, 후임자가 된 아가토 교황(678~681)은 680년 부활 대축일에 즈음하여 125명의 이탈리아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로마 교회 회의를 개최, 그리스도 단의설을 단죄하는 내용의 신앙 고백문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3명의 이탈리아 주교, 3명의 교황 사절(apocrisiarius), 라벤나(Raven-na) 대주교의 특사, 4명의 수도자 등으로 구성된 교황의 사절단은 이 고백문을 갖고 680년 9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회의 개최 및 진행 : 황제는 680년 9월 10일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679~686)인 l오르지오(Georgius)에게 공의회 소집을 명령하는 칙령을 보냈다. 회의가 개최된 황제궁의 둥근 지붕의 홀(trullos) 때문에 '인 트룰로' (in Trullo) 혹은 '트룰리아노' (Trulliano)라고 불리는 이 공의회는 680년 11월 7일에 43명의 동방 교회 주교들과 3명의 교황 사절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하였는데, 총 18회기 중 11회기까지는 황제가 직접 주재하였다. 공의회에는 교황 사절단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제오르지오,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인 마카리오(Macarius, ?~681), , 예루살렘 총대주교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가 파견한 사절, 그리고 일리리쿰에서 온 주교들과 로마 제국 각 지역에서 온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그리스도 단의설 논쟁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제4차와 제5차 보편 공의회의 회의록과 교황 레오 1세(440~461)의 <플라비아노에게 보낸 교의 서한>(Epistola dogma-tica ad Flavianum)이 낭독되었다. 이 와중에 교황 비질리오에게 보낸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536~552) 메나(Menas)의 서한과 같은 거짓된 문헌이 발견되었는데, 이 문헌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610~638)인 세르지오(Sergius)가 그리스도 단의설을 주장하는 중요한 근거였다.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인 마카리오는 다양한 교부 선집(選集)을 인용하면서 이 서한의 진정성(眞正性)을 주장하였고, 그리스도 안에 두 의지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빠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문집의 편파성이 발견되어 결국 3월 20일과 22일에 열린 회기에서 파문을 받고 유배를 떠났다.
이에 앞서 공의회는 3월 7일의 8차 회기에서 아가토 교황의 그리스도 단의설에 대한 단죄를 수용하였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제오르지오 총대주교는 두 의지에 관한 교의를 받아들였다. 9월 11일에 개최된 17차 회기에서 공의회는 교의적 가르침을 결정하고, 9월 16일의 18차 회기에서 이를 공포하였다. 174명의 교부들과 황제가 서명한 이 가르침은 칼체돈 공의회의 신앙 정식과 아가토 교황의 단죄문을 재구성한 것으로, 그리스도가 두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두 의지와 분리할 수 없는 두 작용(energia)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그 결과 그리스도 단의설과 유일 작용론(monoenergismo)을 주장한 이들을 단죄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세르지오, 알렉산드리아의 치로(Cyrus) 교황 호노리오 1세(625~638) 안티오키아의 마카리오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결정을 통해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재천명하였다.
영향 : 공의회는 이 결정 사항을 아가토 교황의 후임자인 교황 레오 2세(682~683)에게 발송하였다. 교황은 이를 승인하면서 서방 교회의 모든 주교들 역시 이에 서명하도록 하였고,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는 공의회 결정 사항을 제국의 모든 지역에 훈령으로 반포하였다. 레오 2세는 교황 호노리오 1세를 단죄한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은 채 공의회 결정 사항을 재확인한 것이다.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869년 10월 5일부터 870년 2월 28일까지 개최된 제8차 보편 공의회. 배경 : 867년 9월 24일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바실리우스 1세(867~886)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858~867, 877~886)인 포시우스(Photius)를 파면하면서 후임에 이냐시오(Igna-
tius)를 임명하였다. 황제와 이냐시오 총대주교(867~877)는 포시우스에 의해 서품된 주교들과 신부들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공의회를 개최하기 위해 교황 니콜라오 1세(858~867)에게 특사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황제의 특사가 로마에 도착하였을 때 교황은 이미 사망한 후였기에(867. 11. 13), 그의 후계자인 교황 하드리아노 2세(867~872)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였다. 동로마 제국에 관해 선임 교황이 취하였던 노선을 충실히 이어받은 교황은 869년 6월 로마에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포시우스를 단죄하고 새로운 보편 공의회의 법적 기초를 세워 교황의 특사들이 공의회를 주재하도록 하였
다.
회의 개최 및 진행 : 오스티아(Ostia)의 도나토(Dona-tus) 주교, 네피(Nepi)의 스테파노(Stephanus) 주교, 마리노(Marinus) 부제 등으로 이루어진 교황 사절단이 주재한 가운데 869년 10월 5일 하기아 소피아 대성전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공의회 참석 교부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1차 회기에는 교황 사절단 외에 12명의 주교만이 참석하였고, 6차 회기에는 37명의 주교가, 마지막 회기에는 100여 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참석 교부의 숫자가 이렇게 적은데도 불구하고, 이 공의회는 제8차 보편 공의회로 인정받고 있다. 공의회 자체에서 보편 공의회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으며, 교황 하드리아노 2
세와 요한 8세(872~882)도 이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공의회 행전의 라틴어본을 만든 아나스타시오(Anastasio il Bibliotecario)의 증언과 메트로파네(Metrofane), 스틸리아노(Stiliao), 니체타 다비드(Niceta David) 등과 같은 동시대 그리스어권 저자들의 증언 및 새로 선출된 교황의 서약문에서도 보편 공의회성이 드러난다. 또한 적어도 11세기 후반부터 나타나는 서방 교회 공의회 문집(colle-zioni canonistiche) 및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 문헌에서도 드러난다.
소수의 공의회 교부들만이 참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의회의 결정 사항은 큰 의미를 지닌다. 이미 1차 회기에서 로마 교황의 법적 수위권을 명백하게 고백하는 정식을 정하였고, 성화상 파괴자들과 포시우스의 오류에 대한 단죄를 하였다. 이 단죄문은 비록 포시우스로부터 서품을 받지 않았더라도 그와 통교를 한 모든 이들과의 화해 조건이 되었다. 이 조건하에서 10명의 주교, 11명의 신부, 9명의 부제, 6명의 차부제가 2차 회기에서 보편 교회에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테오필로(Theophilus) , 자카리아(Zaccaria), 그리고 포시우스에게 서품을 준 그레고리오 아스베스타(Gregorio Asbesta) 등은 완고하게 화해하기를 거부하였다. 포시우스 자신도 869년 10월 20일에 개최된 5차 회기와 10월 29일에 개최된 7차 회기에 참석하였지만 공의회 결정 사항을 따를 마음이 없었고 공공연하게 교황 사절단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파문에 처해졌다.
870년 2월 28일에 개최된 마지막 회기에는 황제 바실리우스 1세와 콘스탄티누스 황태자, 불가리아 왕이 파견한 10여 명의 특사, 동프랑크의 왕인 루트비히 2세(804?~876)가 파견한 공의회 행전의 라틴어본을 만든 아나스타시오를 포함한 3명의 특사가 참석하였다.
결정 사항 : 마지막 회기에서 공의회는 기존 일곱 차례의 보편 공의회 결정 사항을 재천명하는 신앙 고백문을 선포하고, 교황 니콜라오 1세와 하드리아노 2세의 훈령에 따라 포시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단죄하였다. 또한 두 통의 공의회 서한을 공표하였는데, 한 통은 모든 신자들에게 보내는 것이고 다른 한 통은 교황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가톨릭 교회 교의의 일반적 원칙(1조)과 교황의 수위권(2, 21조), 성화상 공경(11조) 교회의 자유(12, 13, 14, 17, 19, 21, 22조), 상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의 권리(10, 15, 17, 18, 20, 23, 24, 26조), 포시우스와 그 추종자들을 반대하는 내용(4, 5, 6, 8, 10, 25조) 파문당한 이가 성화상을 만들거나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7조)하는 27개의 규정을 발표하였다. (→ 그레고리오, 나치안츠의 ; 그레고리오, 니사의 ; 그리스도 단의설 ; 니체아 신경 ;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 디오도로, 다르소의 ; 마체도니우스파 ; 삼장서 논쟁 ; 성부 수난설 ; 아리우스주의 ; 아타나시오, 알렉산드리아의 ; 치릴로, 예루살렘의 ; 포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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