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황제(306. 7. 15~337. 5. 22). 로마 제국 내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최초로 허용한 인물. 정식 이름은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Constantinus)이다.
〔시대적 배경〕 콘스탄틴 대제가 권좌에 오를 당시 로마 제국은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의 잔인한 박해로 민심이 동요되고 외적이 자주 침입하던 불안정한 상태였다.
305년 로마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던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4~305)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286~305)가 퇴위하고 콘스탄티우스 1세(Constantius I,305~306)와 갈레리우스(Galerius, 305~311)가 제위에 올랐다. 동로마 지역을 다스렸던 갈레리우스 황제는 말년에 혹독한 질병을 앓으면서 자신의 병이 그리스도인들이믿는 신의 징벌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끼며 심경의변화를 일으켜, 리치니우스(Licinius, 308~324)와 콘스탄틴 대제와 함께 311년 3월에 사르디카(Sardica)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여전히 제한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리스 도인에 대한 박해가 완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서로마 지역에서도 콘스탄티우스 1세 시기부터 그리스도인들에게가하던 박해가 완화되었다.
〔생 애〕 콘스탄틴은 280년경 나이수스(Naissus, 현 유고슬라비아의 Nish)에서, 일리리아(Illyria)의 사병이었다가 후에 황제가 된 콘스탄티우스 1세와 여인숙 가정부였던헬레나(Helena)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는 289년 막시미아누스 헤르클레우스(MaximianusHercleus)의 의붓딸인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하기 위해 헬레나와 이혼하고 부제(副帝, Caesar, 293~305)로 갈리아, 영국, 스페인을 다스렸다. 콘스탄틴 대제는 니코메디아(Nicomedia, 현 터키 Ismit)에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의 궁정에서 교육을 받았다.
305년 5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황제직에서 물러나자 콘스탄티우스는 제1 정제(正帝)가되었고, 로마에서는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Maxentius, 306~312)가 세베루스(Severus, 306~307)에 대항하여 황제가 되었다. 영국의 요크(York)에서 아버지와 합류했던 콘스탄틴은, 막시미아누스와 막센티우스의 연합 제의를 받아들여 307년 세베루스를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와중에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서거하자 306년 7월 25일 휘하의 군대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으며, 307년 3월 31일 트레비스에서 막시미아누스의 딸인파우스타(Fausta)와 결혼하고 황제로 선포되었다.
콘스탄틴 대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창안된 사두 분권 체제(四頭分權體制, 四分領統治, Tetra- rchia)를 철회하였고, 310년 마르세유(Marseille)에서 장인인 막시미아누스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7월에 그를 사형시킨 후 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어 공동 황제였던 리치니우스와 합의하여 3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 312년 10월 28일 밀비오(Milvio)다리 근처에서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로마 원로원으로 부터 선임 황제(senior Augustus)의 칭호를 받아내었다.313년에는 밀라노(Milano)에서 리치니우스를 만나 제국내의 모든 종교에 동등한 권리를 허용하는 밀라노 관용령(Edictum Milanensie)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누이인 콘스탄시아(Constania)를 그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그 후 종교적인 견해 차이로 두 사람 사이의 반목이 심해졌고, 급기야 324년에는 전쟁이 일어나 몇 차례의 전투 끝에 콘스탄틴 대제가 승리하였다. 리치니우스는 콘스탄시아의 주선으로 사면되었으나 야만족들과 동맹을 맺어 권력을 탈취하고자 모반을 일으켰다가 데살로니카에 감금된 후 325년에 결국 사형되었다. 이로써 40여 년간 동서로 갈라졌던 로마 제국은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다시금 단일 황제 체제가 되었다.
콘스탄틴 대제는 자신의 세 아들을 부황제로 임명하였다. 317년에 콘스탄티누스 2세(Constantinus Ⅲ), 323~324년에는 콘스탄티우스 2세(Constantius II), 그리고 333년에는 막내 아들인 콘스탄스(Constans)를 임명하고, 335년에는 자신의 이복 형제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Julius Constantius)의 아들 달마시우스(Dalmatius)를 부제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분명히 이전의 사두 분권체제를 복원하여 자신이 신임할 수 있는 같은 혈통의 가족에게 권력을 나누어 제국을 다스리도록 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뛰어난 장군이며 정치가였던 콘스탄틴 대제는 337년5월 22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니코메디아 근교 안키로
나에서 아리우스주의자인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Eusebius Nicomediaem, +342)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고 사망하였다. 그리스 교회는 후에 콘스탄틴 대제를 그의 어머니 헬레나와 함께 성인으로 공경하였으며, 그를 사도들에 빗대어 '13번째 사도' 라고 불렀다. 한편 서방 세계는 그에게 '마뉴스' (Magnus, 大帝)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개종과 신앙심〕 일반적으로 그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밀비오 다리 전투' 로 보고 있다. 락탄시오(L.C.F. Lactantius, 250?~321?)에 의하면, 밀비오 다리 전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황제가 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는데, 예수가 병사들의 방패에 X자를 거꾸로 세우고 세로변의 끝을 구부린 십자가 모양을 그려 넣으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후에 그리스도의 모노그람마(Monogramma Christi)가 되었다.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Caesariensis, 260/265?~339)가 집필한《콘스탄틴의 생애》(De Vita Constantini)에 의하면, 전투 직전인 정오쯤 자기 아버지의 신에게 기도하던 콘스탄틴대제와 그 부하들이 태양 너머 십자가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이 상징과 함께하면 승리할 것이다" (Hoc signovictor eris)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저녁 예수가 그에게 나타나서 병사들의 방패에 십자가 형태를그려 넣으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일부 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부정하지만, 락탄시오는 이 사건이 신빙성이 있다고 하였다. 역사적 사실성에 대해서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콘스탄틴 대제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계시를 받았는지 아니면 환시나 꿈을 통해 보았는지의 사실 여부를 떠나 확실한 공통점은, 그가 밀비오 다리의 최후 결전을 하느님의 힘으로 승리하였다는 확신을 가졌다는 것이다.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동기나 그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위에 관해서는 부정하는 학자들도 많다. 그가 죽기 전까지 세례를 연기한 사실이 그 근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요르단강에서 세례 받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며, 당시에는 그런 일이 흔한 일이었다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콘스탄틴 대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를 확신하였고 교회와 그 지도자들을 매우 존경하였으며, 그들이 신앙을 전파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가 권력을 장악하였을 때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전체 인구 5천만 명 가운데 10%에도 못 미치는 그리스도인들은 소수 집단이었으며, 일반 대중들과 지성인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여전히 부 정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콘스탄틴 대제는 특히 서방에서 대다수 신민들의 의견과 충돌하는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지 않았고, 선임 황제들의 종교 정책을 바꾸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느님께 신적 부르심을 받았다고 확신하였으며,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하느님의 힘을 빌리면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의 생활이 당시에 성행하던 스토아학파적인 금욕주의를 따른 것은 분명하지만, 점진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윤리를 따르게 되었다. 그 증거로 노예, 결혼, 과부, 고아들에 관련된 법들이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에 따라 개정되었다.
〔종교 정책〕 그리스도교와의 관계 : 그의 초기 종교관이 종교 혼합주의적인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는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확신하였다. 어떤 박해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그리스도교의 생명력을 목격한 후, 콘스탄틴 대제는 교회를 국가의 확고한 기반으로 삼으려고 결심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교는 제국 내의 모든 국민을 결속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공개적으로 허용한 문건을 서양사에서는 일반적으로 '밀라노 칙령' 이라고 하지만, 그 내용과 형식으로 보아 법적인 요건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칙령이라기보다는 '밀라노 관용령' 또는 밀라노 협정' 이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이들에게 각자가 믿는 종교를 따를 자유를 허가하도록 결정하였다" 라고 시작하는 밀라노 관용령은, 첫째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막론하고 로마제국의 모든 신민들에게 적용되는 종교 자유의 원칙을 선포하였다. 둘째 그리스도인들' 만을 지칭하여 박해 시대에 몰수한 그리스도인들의 재산과 이미 팔린 재산까지도 그리스도교에 아무 조건 없이 반환하도록 하였다. 이 항목은 이후부터는 그리스도교를 합법적으로 재산을 취득할 수 있는 공인된 단체나 사회로 인정하고, 이미 몰수된 부동산에 대한 재산 반환 청구권까지 인정함으로써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 밀라노 관용령이 바탕이 되어 향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모든 법적인 조치가 호의적으로 변하였는다는 점도 큰 의의가 있다. 예를 들면 313년에는 성직자가 군대를 비롯한 공적의무에서 면제되었으며, 321년과 333년에는 교회의 유산 상속이 인정되었고 민사 재판권이 주교들에게 속한것으로 공적으로 승인되었다. 또한 321년에는 주일이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교회에 노예 해방권을 부여하였으며, 교회의 재산을 인정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모든 도시의 교회에 규칙적으로 보조금을 주게 하였다.
콘스탄틴 대제는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았다는 것과 교회와 국가가 조화롭게 일치 ·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하느님의 종" (ServusDei)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였으며, 자신이 교회에 정당한 호의를 베풀었기 때문에 이전의 황제들이 옛 이교 국가종교의 주인이었던 것처럼 자신도 교회의 주인이라 생각하였다. 전기 작가 에우세비오는 콘스탄틴 대제가 자신을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의 주교" 라고 불렀다고 전하며 (《콘스탄틴의 생애》 IV, 24), 다른 대목(I, 44)에서는 더 나아가 "일종의 보편 주교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교 및 이단에 대한 정책 : ① 이교 : 312년 로마에 개선하였을 때 콘스탄틴 대제는 원로원에서 부여한 칭호를 받아들였지만, 신전에서 거행하는 종교 예식은 거절하였다. 로마의 콜로세움(Colosseum) 옆에 있는 콘스탄
틴 대제의 개선문에는 신들의 문양을 넣고 태양 광선을 형상화한 왕관을 씌워 신처럼 보이게 하는 모습들을 그려 넣었으며, 그의 승리가 신의 이끎에 의한 것이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런 표현은 그리스도교와 이교도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모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통치 전역에 이교인들이 하느님의 성스러운 법으로 개종할 것을 타이르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대제관 직무를 유지한 채 '불패의 태양신' (Sol In-victus)과 '영원한 빛 (lux perpetua)에 대한 전설들을 자신의 동전들 및 기념비들에도 넣었다. 이는 로마의 영원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민들이 이교도인 동시대의 종교적인 기반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316~326년에 기념일마다 이교도적 행사를 거부하여 원로원으로부터 원성을 샀다. '불패의 태양신' 은 차후에 그리스도교에 흡수되었다. 예를 들어 베드로 대성전 밑에 마련된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 율리우스(Julius) 가문의 납골당에서 발견된 모자이크에 그려진 태양신(Apollo-Helios)의 머리에는 십자가 형상을 첨가하여 그리스도교화 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이교적인 요소를 그리도교적인 내용으로 전환한 하나의 시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② 이단 : 콘스탄틴 대제는 처음부터 교회의 일치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염려하였다. 그래서 313년 아프리카에서 일어났던 도나투스주의(Donatismus)라는 이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14년 아를(Arles)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325년에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us)라는 이단을 다루기 위해 제1차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공의회는 박해가 종식되고 평화 시대를
맞이한 교회가 개최한 최초의 세계 공의회로, 철학적 신관(神觀)으로 성자 종속설(subordinaitianismus)을 주장한 아리우스주의를 논박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일한 본체를 지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그리스도론을 정의함으로써 정통 신앙을 수호하였다. 또한 이 공의회에서 이집트에서 멜리시우스(Melitius)에 의해 야기된 이교(異敎) 문제를 해결하면서 부활 대축일 날짜를 확정하였다. 니체아 공의회는 이후 교의적인 논쟁이 있을 때마다 제1차 니체아 공의회의 신경이 정통성의 기준이 될 정도로 교회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지역 교회에 한정된 규정을 결의하는 지역 교회의 공의회와는 달리 관습적으로 존중되던 교회의 중요한 생활규범들을 전세계 교회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규정으로 입법화시킨 세계 공의회로서 의의를 갖는다.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로의 천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은 가장 오래된 고대 도시의 하나로 흑해와 지중해의 길목이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지리적인 여건때문에 무역과 군사적 요충지로서 그 중요성이 대단히 컸다. 그러나 잦은 지진과 급변하는 기후 탓에 크게 번성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자연적인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틴 대제는 정치적 ·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즉 서로마 제국에 끊임없이 침략해 오는 게르만족들을 막기위해 천도를 결정하면서 도시를 본격적으로 제국의 수도에 걸맞게 재건하였다. 이 새로운 도시의 위상을 높이고자 '새 로마' (civitas iunior Romae)라 부르며 여러 가지로 애쓴 결과, 후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와 로마 사도좌의 갈등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326년 11월 26일 마침내 로마 제국의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 건설의 주춧돌이 놓여졌으며, 330년 5월 11일에 완공되었다.
〔평 가〕 일반적으로 콘스탄틴 대제의 정책은 제국의 일치와 평화였지만, 그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생애의 마지막 7년 동안에도 이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그가 그리스도교를 보호 · 육성한 것은 그리스도교라는 단일 종교를 통해 광대한 제국에 있는 다민족들의 일치와 결속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그의 선임황제들이 행한 폭압적인 군주 체제에 비하면 제국 내에 일치와 평화가 많이 진작되었고, 설령 그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실이 초기의 그러한 정치적인 목적에 의한것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완전히 외면하였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궁정 생활이나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그가 보여 준 행위들로 판단하건대, 많은 결과들이 신앙심에 의한 행위였다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단과 이교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려고 노력하다가 교회의 순수한 문제에까지 부당하게 참견하기도 하였다. 도나투스주의와 아리우스주의를 다루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하고 그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결정된 사항을 국법으로 선포하였다. 그는 아리우스(Arius, 256?~336)뿐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Athanasius Alexandrinus, 295?~373)도 추방하였고, 그리스도교적 국가의 기초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제국 교회(帝國敎會) 이른바 '황제 교황주의' (Caesaropapismus)의 기초를 세웠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선임 황제들이 행사한 절대 권력의 전례(前例)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며 또한 인간적인 한계를 극복하기도 쉽지않았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이러한 종교관이 그 후 동방 정치 제도의 전형이 된 것은 역사의 부정적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밀라노 관용령의 결과, 콘스탄틴 대제는 교회를 변화시킨 주인공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로마 제국을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을 가진 새로운 사회로 변모시키고 새로운 문명을 창출해 낸 주역이 되었다. 이 밀라노 관용령을 계기로 그리스도교가 제도화되고 제국 교회로 전락하면서 복음 정신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였다는 부정적인 비판도 있지만, 교회는 선교 사명의 본성상 사회로부터 소
외된 격리 단체나 항구적인 불만 세력의 지하 운동 단체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이 로마제국의 모든 지역에 더욱 활발하게 선포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그리스도교 정신을 확산시키는 첫걸음을 내딛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한 것이 전적으로 콘스탄틴 대제의 덕분만은 아니다. 로마 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참혹하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갈레리우스 황제도 끝내는 스스로 박해를 종식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할 수밖에 없던 시대의 흐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떠한 형태였든지, 그리스도교를 보호하고 지원하였던 콘스탄틴 대제가 죽으면서, 이제 교회는 내외적으로 자생력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 니체아 공의회, 제1차 ; 도나투스주의 ; 밀라노 관용령 ; 아리우스주의 ; 아타나시오, 알렉산드리아의 ; 콘스탄티노플 ; 콘스탄틴의 증여 문서 ; 헬레나 ; 황제 교황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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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대제(280?~337)
- 大帝
Magnus Constanti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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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대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