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특히 교황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8~9세기경 프랑크 왕국에서 조작된 문서.
중세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이 문서의 내용에 따르면,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대제(306~337)는 교황 실베스테르 1세(314~335)에게 안티오키아(Antioquia),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알렉산드리아(Alexandita) 및 예루살렘(Jerusalem)에 대한 수위권과 로마와 서방의 여러 주(州) 및 이탈리아 전역에 대한 통치권, 그리고 성직자들에 대한 최고 재판권을 부여하였다고 한다. 이 문서는 교황권의 반대자들에게도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이 문서는 754년 롬바르드족에 대항하기 위해 피핀 왕과 교섭하는 과정에서 교황 스테파노 2세에 의해 처음 언급된
이래 역대 교황들이 같은 목적으로 이용해 오다가, 15세기에 들어서야 이 문서의 진실 여부가 의심받게 되어 결 국 거짓 문서임이 밝혀졌다.
〔시대 배경〕 '콘스탄틴 대제의 황제령' (Constitutum Constantini)이고도 불리는 콘스탄틴의 증여 문서는 교회와 동로마 제국 및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에 관련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권위와 명예에 있어서 교황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자, 동로마 제국 황제는 교황과 총대주교의 갈등 관계에서 조정자 역할을 자처하였으며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정략에 따라 법을 고치고, 성화상 파괴 정책을 펼치는 등 서방 교회 특히 교황을 중대하게 위협하였다. 이런 상황이 계속 유지되고 있을 때, 프랑크왕국 카롤링거 왕조 최초의 왕인 피핀 3세(751~768)는 교황 스테파노 2세(752~757)에게 토스카나(Toscana), 라벤나(Ravenna), 베네치아(Venezia), , 이스트라(Istra) 그리고 스폴레토(Spoleto)와 베네벤토(Benevento)의 공작령 등 자신이 롬바르디아족(Combram)으로부터 빼앗은 중부 이탈리아의 모든 영토를 증여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것이 이후 '교황령' (敎皇領, Status Pontificium)이 형성되는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새 교황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콘스탄틴 대제의 고대 로마 제국을 계승한 동로마 제국의 권리 요구를 저지할 법적인 근거가 필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로마와 라벤나뿐만 아니라, 원칙적으로 이탈리아 반도 전체와 서유럽을 동로마 제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6~8세기까지 동로마 황제권과의 대결을 거쳐 이미 교황에게 귀속되어 있고 현지 주민들로부터도 인정된, 로마 제국을 계승한 정치적 지도권을 지닌 교황의 입장에서 동로마 제국의 요구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교황과 프랑크족(Franks)의 제휴는 배신으로 간주되었고, 영토에 대한 결정 또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교황 측에서는 문서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내 용〕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도시의 위상에 따라 그 도시에 있는 교회의 위상이 결정된다고 간주하였 다. 즉 콘스탄티노플에 황제와 통치 기구들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총대주교의 위상이 높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콘스탄틴의 증여 문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5세기 후반에 작성된 <실베스테르의 전설>(Legenda S. Silvestr)을 참고하여 조작되었다. 이 문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의례적으로 전통적인 신앙 고백이 서술되고, 이어지는 첫째 부분은 콘스탄틴 대제가 어떻게 나병(癩病)에서 기적같이 치유되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대제가 나병에 걸리자 이교 제관들이 온갖 약을 다 사용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마침내는 어린아이의 피를
가득 채운 욕조에서 목욕을 하면 나을 수 있다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아이 어머니들의 통곡 소리를 듣고 모정에 감동된 대제는 그 권고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그날 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나타나 치유를 약속하였으며, 이후 교황 실베스테르 1세로부터 세례를 받자 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이야기이다. 둘째 부분이 이 위조 문서의 핵심으로, 콘스탄틴 대제가 베드로 사도와 그 후계자들 즉 교황 실베스테르 1세와 로마 주교좌에 로마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유럽 전역(Romae urbis et omnes Italicae seu occidentalium regionorum provincias, locaet civitates)에 대한 통치를 위임하고 전세계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의도에서 자신의 주거를 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콘스탄틴 대제의 기부는 법적으로 보장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으며, 교황에게 자신의 권력만이 아니라 왕실의 관직에 따른 칭호와 상징, 라테란(Lateran) 궁전까지 증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문서는 서방 세계에서 교황에게 황제와 같은 권한이 양도되었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증여 문서에 의하면, 콘스탄틴 대제는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황제가 되기를 권하였지만 교황이 이를 거절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는 교황이 원하였다면 황관을 쓸 수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콘스탄티노플이 황도가 된 것은 교황 자신의 원의와 묵인에 의한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교황은 언제든지 수락을 철회할 수 있고 황도를 콘스탄티노플에서 로마로 다시 바꿀 수 있다. 이것이 문서 위조자가 노린 주요 목적이었고, 이는 오로지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주장도 있다. 즉, 교황 스테파노 2세와 피핀의 관계에서 교황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서라는 설이다.
〔문헌의 진위 판명 과정] 처음에는 이 위조 문서의 신빙성에 대해 별다른 반박이 없었지만, 이탈리아의 여러
대학에서 민간 변호사들이 종종 문서의 유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들은 콘스탄틴 대제의 행동은 막대한 기부와 권력 이양을 의미하며 자신의 권력을 무리하게 사용하는 행위라는 점, 당시까지 어떠한 지도자도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본질적인 정부 기관의 업무나 위탁된 땅들을 무상으로 이양한 사례가 없다는 점을 의문으로 제기하였다. 그러나 쿠사의 니콜라오(Nicolaus Cusanus, 1401~1464), 발라(Lorenzo Valla, 1405~1457), 페곡(Reginald Pecock, 1392/1395?-1460/1461?) 등 15세기의 인문주의자들이 그 진정성에 의심을 품고 위조된 것임을 밝혀내기 전까지 콘스탄틴의 증여 문서는 오랜 세월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다.
〔작성 장소와 시기〕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문서가 작성된 시기는 교황 스테파노 2세 혹은
바오로 1세(757~767) 때인 750~760년 사이, 즉 교황과 동로마 제국 황제의 관계가 깨진 시점으로 여겨진다. 이 위조 문서가 교황 스테파노 2세에게 넘겨진 것은 확실한 듯하지만, 작성자와 작성 장소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 라테란의 성직자 그레고리오, 부제 추기경 요한 외에도 그리스토포로(Chinstphorus)가 최고 책임자로 있는 교황청 상서국에서 위조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확정적인 증거는 없다.
〔적용된 사례〕 이 문서는 적어도 11세기 중엽부터, 예를 들면 1054년 교황 레오 9세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체룰라리우스(Michael Cerularius, 1043~1058)에게 쓴 편지 등에 의하여 교황령만이 아니라 교황의 수위권 그리고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부터 인노첸시오 3세(1198~1216) 및 보니 파시오 8세(1294~1303)에 이르는 시기 동안 교황직의 세계 지배권을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데 기여하였다. 교황들은 실제로 이 위조 문서의 작성에 확실히 관여하지 않았으며 다만 이 문서를 진본으로 믿고 선의(善意)로 즐겨 사용하였다.
〔평 가〕 교황 스테파노 2세는 754년 7월 28일 생드니(Saint-Denis)에서 피핀과 그의 아들-후의 카를 대제(Carolus Magnus, 768~814) -그리고 카를만(Karlman)의왕위 도유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만이 수여할 수 있었던 '로마 최고 귀족' (Patricius Romanorum)이란 칭호를 그들에게 부여하였다. 이러한 처사는 <콘스탄틴의 증여 문서>에 근거하여 교황이 황제로서의 권위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었다.
당시 황제와 지역 군주들은 교회의 재산을 탐내고 고위 성직자 임명에 월권적으로 관여하였기에, 이 문서는 이러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 위조 문서 작성자는 지역 주교들의 권리를 더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교회의 충분한 독립을 보장받기 위해 교황좌의 권위를 고양하고자 한 듯하다. 그러나 교황 수위권의 기반은 세속 황제의 인정이나 세속의 최고 권력을 양위받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맡긴 사명과 권위이다. 따라서 당시 세속 권력의 부당한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방안으로 '콘스탄틴의 증여 문서' 를 위조하였다는 것은 교회가 당면한 어려움을 세속적인 방법에 의존한 시행 착오의 결과이며 매우 정당하지 못한 행위였다. (→ 교황령 ; 스테파노 2세 ; 카를 대제 ; 콘스탄티노플 ; 콘스탄틴 대제 ; 피핀)
※ 참고문헌 K. Bihlmeyer · H. Tuchle, Storia della Chiesa, Morcelliana, 1973/ M. Charles, 100 Punt Calore della stroria della Chiesa, Ed. Paoline, 1984/ I. Daniele, Costantino, 《EC》 IV, pp. 725~7291 J. Danielou · H. Marrou, The Christian Centuries I, trad., V. Cronin, London, 1964/ A. Franzen,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H. Jedin ed., Handbook of Church History III, Herder, 1969/ D. Knowles · D. Obolensky, The Christian Centuries II, London, 1969/ J. Lorts, Storia della Chiesa 1, Ed. Paoline, 1980. 〔金喜中〕
콘스탄틴의 증여 문서
- 贈與文書
〔라〕Donatio Constantini · 〔영〕Donation ofConstantine
글자 크기
11권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황제와 같은 권한을 양도하는 콘스탄틴 대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