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랭, 장 앙투안 (1903~1950)

Colin, Jean Anto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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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세례명은 요한. 한국 이름은 고일랑(高一郞)
1903년 12월 25일 프랑스 칼바도스(Calvados)의 바이외(Bayeux)에서 신심이 깊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 다. 1920년 10월 바이외의 대신학교에 입학한 뒤 군대에 소집되어 군 생활을 하다가, 선교사의 소명을 받고 1923년 5월 15일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여 1927년 9월 24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한국 선교의 명을 받고 6월 4일 인천제물포항에 도착한 그는, 입국 직후부터 장호원(현 감곡) 본당의 4대 보좌 신부로 재직하며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익혔다. 1931년 7월부터 공세리 본당 4대 주임으로 활동을 시작한 콜랭 신부는 특히 아이들에게 올바른 신앙심을 심어 주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며, 미사의 존엄성을 인식 시키기 위해 6~13세 사이의 소년 16명을 대상으로 1933년 3월 15일 보미사회(어린이 복사단)를 조직하였다. 또한 신자들의 의무인 교무금을 바치게 하였고 교무금 영수증도 발급해 주었다. 그리고 이 지역의 교세가 점차 확대됨에 따라 성당 증설의 필요성을 느끼고 온양 지역에 본당을 신설하고자 대지 1,007평을 매입하는 등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쳤다. 1936년 서울의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수로 발령을 받은 콜랭 신부는, 신학교가 일제에 의해 1942년 2월 폐쇄되자 본국으로의 귀국을 거부하고 5월 혜화동 본당에서 분리되어 신설된 제기동 본당의 초대 주임(1942~1947. 9)으로 부임하였다. 부임 뒤 가을부터 성당 건립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5월 단층 성당을 완공한 그는 검소한 생활로 신자들에게 모범
이 되었다.
1948년 대전 지역이 독립 포교지로 설정되면서 파리외방전교회가 그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게 되어, 6월 서산(현 서산 동문동) 본당 7대 주임으로 부임한 콜랭 신부는 본당에 수도원을 건립하고자 성당 뒤 밭 1,000평을 매입하고, 수녀 지원자 3명을 데려다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그 계획은 무산되었고, 콜랭신부는 전쟁 발발 후 신자들과 성당을 버리고 피난을 갈 수 없다는 사제의 관습에 따라 성당에 머물다가 결국 8월 16일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대전 목동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그는 체포된 뒤 심한 고문을 받고 9월 21일 대전으로 이송되던 중 예산군 신양 장터에서 폭격을 당하여 행방 불명되었으며, 9월 23~26일 사이에 살해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해는 찾지 못하였고, 현재 서산 본당 입구에 그의 추모비가 있다.
※ 참고문헌  《M.E.P. 선교사 약전》/ 정병배, 《瑞山東門本堂 七十年史(1917~1987)》, 천주교 대전교구 서산 동문 교회, 1987/ 천주교 제기동 교회 50년사 편찬위원회, 《제기동 본당 50년사》, 천주교 제기동 교회, 1992/ 공세리 본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공세리본당 100년사》, 천주교 대전교구 공세리 교회, 1998. 〔洪延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