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러, 살바토르 (1903~197)

Koller, Salv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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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회 성 오틸리엔 연합회 소속 한국 선교사. 수도명은 살바토르. 세례명은 요셉(Joseph). 한국 성은 이 (李) .
콜러는 1903년 8월 5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교구에 속한 암베르크(Amberg) 근처의 리에덴(Rieden)에서 태어나 레겐스부르크 교구의 소신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23년 김나지움을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년 동안 법정 수련을 받은 후, 1924년 5월 12일 유기 서약을 하였다. 같은 해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운영하던 철학 대학에서 철학 과정을 끝내고, 뮌헨 대학교로 옮겨 신학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1929년 3월 10일 파울하버(Faulhaber) 추기경의 주례로 성 오틸리엔 수도원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30년 4월 21일 연길 수도원으로 파견된 그는, 9월 연길 수도원에 도착하여 한국어와 중국어를 공부하다가
1931년부터 두도구 본당과 이 본당이 옮겨간 옹성라자(饔聲砍子 본당의 보좌 신부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2년 6월 5일 랍(K. Rapp, 朴) 신부가 일본군에게 피살된 후, 1934년 장티푸스로 주임과 보좌 신부가 모두 목숨을 잃은 대령동 본당과 본당에서 설립한 해성학교를 맡았다. 1935년 3월 3일 밤 마적단이 대령동 본당을 습격하여 전소시키자, 그는 다조구로 본당을 옮겨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1936년 6월에는 덕원 신학교 출신으로 최초의 연길 지목구 신부가 된 김충무(金忠務, 글레멘스) 신부가 첫 미사를 그의 본당에서 봉헌하였다. 콜러가 본당 신부로 있을 때 복사를 하였던 학생 중에는 후에 수원교구장이 된 김남수(金南洙, 안젤로) 주교도 있다. 그는 본당의 발전과 신자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1946년 5월 중국 공산당에 의해 본당이 폐쇄된 후 남평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1950년 1월 15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귀환하였다.
콜러 신부는 수용소에서 얻은 여러 가지 병으로 장기간 요양을 하다가 1955년부터 투칭(Tutzing)의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운영하는 병원의 지도 신부를 역임하였고, 1962년부터 말레르스도르프(Mallersdorf) 수녀원의 고해 신부로 있었다. 그는 1977년 3월 3일 말레르스도르프 성 마리아 병원에서 선종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성 오틸리엔 수도원 묘지에 묻혔다. → 대령동 본당 ; 연길교구)
※ 참고문헌  D. Drexl OSB, Necrologium congregationis Ottiliensis 1888~2000, St. Ottilien/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91/ Todesanzeige von Abtei St. Ottilien, 19771 주성도, 《주성도 신부 자서전》, 분도출판사, 1993/ Schematismus Monachorum Et Fratrum ongregationis Ottiliensis O.S.B. 1933~1946. 〔宣智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