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움

〔라 · 영〕Colos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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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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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

고대 로마의 건축 중에서 가장 웅대한 역사적 기념물로, 로마 건축 기술의 절정으로 평가받는 원형 경기장.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시기에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네로 황제(54~68)가 로마의 일곱 구릉(丘陵) 가운데 에스퀼리노(Esquilino), 팔라티노(Palatino), 첼리오(Celio) 세 언덕 사이에 세웠던 '황금의 집' (Domus Aurea) 정원의 인공 호수가 있던 저지대를 매립하여 56m를 높이고 그 위에 세워졌다. 당시의 배수로를 통해 콜로세움 바닥 밑으로 지금도 물이 흐르고 있다. 콜로세움의 본래 이름은 '플라비아누스 원형 경기장' (Amphitheatrum Flavianum)이다. '콜로세움' 이란 명칭은 베다 존자(Beda Venerabilis, 672/673~735)의 비문에 경기장 옆에 서 있던 35m 높이의 거대한(colosseus) 네로 황제의 황금 청동상이 언급되면서 이 경기장의 원래 이름 대신 불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 제국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69-79)가 예루살렘을 정벌한 후 그곳에서 데려온 수많은 유대인 노예들을 동원하여 서기 70년에 콜로세움 축조 공사를 시작하여, 서기 80년에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79~81)가 완성하였 다. 이를 두고 선임 황제의 재산으로 백성들을 위한 원형 경기장을 건설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것을 염두에 두었으리라는 정치적인 동기를 부각시켜 평가하는 이도 있다. 콜로세움의 외벽 높이는 50m이고, 타원형 평면의 장축 및 단축의 지름은 각각 188m와 156m, 둘레는 527m이며, 경기장의 장축과 단축은 각각 6m와 54m이다. 또 공사에 사용된 석회화(石灰華, travertino)는 10만m³가 넘고, 돌 블록을 연결하는 데 쓰인 꺾쇠만 300톤에 이른다. 일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콜로세움 공사는 5년 정도 걸렸으며, 이렇게 단기간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사 현장의 조직력과 시공 기술의 탁월성 때문이라고 한다. 이 거대한 원형 경기장의 준공 기념 행사는 100일 이상 지속되었는데 이때 희생된 맹수는 5,000마리가 넘었다.
콜로세움은 각 층마다 기둥의 양식을 달리하고 있는데,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고린토식으로 되어 있고, 4층만 다른 층과 달리 직사각형의 창문이 있는 벽체(壁體)로 되어 있다. 또 1, 2, 3층은 80개의 개방된 궁형 창(弓形窓)으로 둘러져 있는데, 출입구 역할을 하는 바닥 층의 개방된 궁형 창들에는 각각 번호가 매겨져 있으며, 관중들의 입장권에는 지정된 출입구 번호가 기재되어 있었다. 관중석은 사선(斜線)으로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곳으로 신분에 따라 네 층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황제석은 어떤 공간에서 경기가 벌어지더라도 관람하기 편하고 맞은편에서 입장하는 검투사를 잘볼 수 있도록 관람석의 중앙에 침대형 의자로 마련되어 있었다. 콜로세움은 4만~5만 명, 입석까지 포함하여 7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는데, 경기 후 많은 관중들이 한꺼번에 퇴장하더라도 혼잡스럽지 않고 신속하게 퇴장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비가 오거나 햇빛이 강할 때에는 휘장막(揮場幕, velarium)을 쳐서 하늘을 가렸는데, 이 휘장막은 외벽 상부에 돌출된 깃대에 도르래와 고정 고리 장치를 활용하여 설치하였다. 경기장 바닥은 마치 우리 나라의 실내 씨름판처럼 나무판을 깔고 그 위에 모래를 덮었기 때문에, 후에 경기장을 아레나(arena, 모래)라고 불렀다. 맹수 사냥 시합 중에는 관중들의 안전을 위하여 아레나 주위에 튼튼한 철망을 둘러치고 장대로 지탱하였으며, 이 장대의 끝부분은 뾰족하게 만들어서 맹수들이 철망에 오르거나 아레나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여 수많은 궁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콜로세움에서 벌어지던 경기 중에는 모의 해전(模擬海戰, naumachia)도 있었는데, 물을 경기장에 넣고 빼는 번거로움 때문에 나중에는 폐지되었다. 도미티아누스(81~96) 황제는 경기장의 최상층부를 완성하고 경기장 아래에 미로와 같은 지하 시설을 만들었는데, 검투사의 대기실, 맹수 우리, 무대 효과 장치 보관실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 외에도 콜로세움의 건축가들은 경기장 세트와 장비, 사람과 맹수들을 적시에 또는 동시에 경기장에 올려 놓을 수 있는 승강기 장치까지 고안해냈다.
콜로세움에서 열리던 경기 중에서 검투사 시합은 매우 잔인한 양상을 띠었다. 콘스탄틴(306~337) 대제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 경기를 금지하려 하였지만, 이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열광 때문에 막지 못하였다. 한편 5세기경 동방에서 온 텔레마쿠스(Thelemachus)라는 수도승이 검투사 시합 도중에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어 관중들을 향
해 이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경기를 중단할 것을 호소하자, 관중들은 성난 목소리로 야유를 퍼부으면서 그를 돌로 쳐 죽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검투사 시합이 더이상 행하여지지 않았으며, 마침내 483년에 법으로 금지되었다.
콜로세움은 로마의 흥망성쇠를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베다 존자는 "콜로세움이 서 있는 한 로마도 흥하리라. 콜로세움이 무너지는 날에는 로마도 멸망하리라. 로마가 멸망하는 날에는 이 세상도 멸망하리라"라고 읊었다. 콜로세움은 먼저 야만족들의 로마 약탈로 파괴되고, 그 후 여러 차례의 낙뢰와 지진 등으로 훼손 · 방치되었으며 다른 건물을 짓기 위해 이곳에서 석재를 가져가기까지 하였다. 1490년부터 원형 경기장 내부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의식이 재현되었지만, 이교적인 부분이 포함되었다고 하여 1500년 중엽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에 의해 중지되었다, 1790년 교황 베네딕도 14세(1740~1758)는 원형 경기장의 훼손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하고 순교지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부여하여 콜로세움을 최대한 복원하고 이곳에 십자가를 세웠다. 그리고 교황 비오 7세(1800~1823)가 재차 복구 작업을 벌여 철리오 언덕 옆에 벽돌 제조장을 설치하여 거대한 축대로 넘어지지 않게 보수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후임 교황들에 의해 여러 차례 복구 작업이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는 매년 파스카 금요일에 교황이 이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십자가의 길 예식을 주례한다. (→ 로마 ; 십자가의 길)
※ 참고문헌  Bruno Brizzi, ROMA : I Monumenti Antichi, Colombo, 1973/ A.C. Carpiceci, ROMA come 'era 2000 annifa, Firenze, 1981/ G. Cozzo, Il Colosseo, Roma, 1971/ R.A. Staccioli, Antica Roma, Roma, 1989/ Touring Club Italiano, ROMA e Dintorini, Milano, 1977. [金喜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