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 대륙의 북서쪽 끝에 위치한 국가로, 공식 명칭은 콜롬비아 공화국(Repúlica de Colombia) 동쪽으 로는 베네수엘라와 브라질, 남쪽으로는 에과도르와 페루, 북서쪽으로는 파나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카리브 해, 서쪽으로는 태평양을 면하고 있다. 면적은 1,141,748k㎡, 인구는 42,800,000명(2003)이며, 수도는 보고타(Bogotá)이다. 공용어로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국민은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메스티소(mestizo, 58%), 스페인계 백인(20%),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 물라토(mulato, 14%), 흑인(4%), 흑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삼보(sambo), 인디오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있다. 인구의 90%가 가톨릭 신자이나, 일부 인디오들은 토속 신앙을 신봉한다.
이 지역에는 본래 칩차족(Chibchas)이 살고 있었는데, 1525년 스페인의 로드리고 데 바스티다스(Rodrigo deBastidas)가 산타 마리아(Santa Maria) 시를 건설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식민 활동이 시작되었다. 1559년경에 페루 부왕령(Virreinato de Peru)의 일부로 산타 페 데 보고타아우디엔시아(Santa Fé de Bogotá Audiencia)가 세워졌으며, 1719년부터는 현재의 콜롬비아 · 베네수엘라 · 파나마를 포함한 누에바 그라나다(Nueva Granada) 총독부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스페인의 가혹한 지배는 식민지 주민의 불만을 격화시켜, 1810년 안토니오 나리뇨(Antonio Nariño, 1765~1823)를 지도자로 한 최초의 독립 혁명이 일어났다. 이어 1819년에는 국민적 영웅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 1783~1830)가 누에바 그라나다를 침공하여 보야카(Boyacá)에서 스페인군을 무찌른 뒤(보야카 전투), 콜롬비아 · 베네수엘라 · 에과도르 · 파나마의 지도자들이 앙고스투라(Angostura, 현 Ciudad Bolívar)에서 의회를 소집하고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 공화국을 창설하였다. 이후 1830년 베네수엘라와 에과도르가 콜롬비아 공화국에서 분리된 후 누에바 그라나다로 불리다가, 1858년부터 그라나다 연방, 1863~1886년 콜롬비아 합중국, 그리고 콜롬비아로 국명이 개칭되었다.
1843년 중앙 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헌법이 제정되었고, 자유당과 보수당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1899~1903년까지 참혹한 내전이 발생하였다(천일 전쟁). 이런 와중에 1903년 미국의 배후 조종을 받은 파나마
가 독립하였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타협으로 제2차 세계대전(1939~1945)까지는 자유당과 보수당 양당 간의 정권 교체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전후 양 정당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1946년 이러한 안정이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 1948년 자유당 내의 좌파 세력을 대변하며 민중의 지지를 얻고 있던 호르헤 엘리세르 가이탄(Jorge Eliécer Gaitán,1903~1948)이 암살되자, 거의 내전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1953년 이 혼란기를 틈탄 군부가 직접 개입하여 구스타보 로하스피니야(Gustavo Rojas Pinilla, 1900~1975) 장군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에 1958년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은 군정에 저항하여 군사 독재 종식과 폭력을 마감하기 위한 타협안으로 4년마다 서로 번갈아 가며 대통령을 맡고 다른 정부 요직은 동수로 나눈다는 데 합의하였으며, 이 국민 전선 정부는 1958년부터 1974년까지 이어졌다. 1990년대까지는 기존의 정당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내전과 전국적인 게릴라전으로 인해 콜롬비아의 정국은 혼란스러웠고, 결국 2002년 5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반군 소탕과 주민 보호를 공약으로 내건 무소속의 알바로 우리베(Alvaro Uribe)가 당선되었다.
〔가톨릭의 역사〕 1508년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보호 통치' (reduccións, '선교구' 라고도 함)를 통해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회원들은 새로운 산업을 장려하고 기술을 전파하였으며, 병원을 설립하고 학교도 운영하면서 식민주의자들의 착취로부터 원주민들을 보호하여 '칩차족의 보호자' 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도덕과 충돌하는 우상 숭배 및 일부 다처제와 같은 관습으로 인해 칩차족에 대한 선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프란치스코회에 이어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예수회, 카푸친 작은 형제회 등 여러 수도회가 이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수행하였다. 1534년 산타 마르타(Santa Marta)와 카르타헤나(Cartagena) 교구, 1546년 포파얀(Popayán) 교
구, 1564년 산타 페 데 보고타 교구가 설립되었으며, 1582년에는 산타 페에 처음으로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교회는 식민지 시기 이 지역의 지적 · 정신적 문화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여러 교육 기관을 운영하였고, 출판물들을 발행하였으며, 1738년 최초의 신문이 예수회에서 발행되었다. 또한 종교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한 문학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독립 이후 교회의 권위는 상당히 실추되었고, 성직자의 수도 급격히 감소하였다. 1853년 자유주의 정부는 가톨릭 교회에 공식적인 종교의 지위를 부여하였지만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천명하면서 교회 밖에서의 결혼과 이혼을 허용하였으며, 1861년에는 식민지 시기 동안 축적된 교회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였다. 그러나 1887년과 1892년 두 차례에 걸쳐 바티칸과 협약을 체결한 뒤,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몰수 하였던 교회의 재산을 보상하였다.
20세기 중반에 들어와 정치 경제적 불안이 심각해졌고, 1960년부터는 게릴라 활동이 증대하기 시작하였다.
몇몇 교회 지도자들은 게릴라 활동에 가담하여 투쟁하였는데, 1966년 가난한 이와 함께하던 카밀로 토레스(Ca- milo Torres) 신부가 게릴라전에 참가하였다가 전사함으로써 교회에 상당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1968년 콜롬 비아의 메데인(Medellín)에서 열린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단 총회는 라틴 아메리카의 불의로 가득 찬 현실을 언급하고 평신도들을 역사와 교회의 전면에 부각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해방 신학을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 그러나 몇 해 뒤에 콜롬비아의 주교들은 해방 신학에 반대하였고, 메데인 회의에서 정해진 '지침' 을 거부하였다. 교회 안에서는 콜롬비아 교회의 이러한 경향을 거부하는 평신도들이 주도하는 여러 단체들이 생겨났는데, 이 단체 구성원의 상당수는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교회 안에서의 특권을 반대하고 제도 교회와의 타협을 거부하였다.
1936년 국교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으나, 여전히 콜롬비아인들의 대다수는 가톨릭 신자이고 가톨릭 교회는 콜롬비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교회는 학교 수가 부족한 농촌 지역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등 사회 각 부문에서 많은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20세기 후반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종종 정부와 무장 단체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하여 성과를 얻기도 하였으나, 여러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무장 단체로부터 위협을 받거나 살해당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처럼 혼란스러운 콜롬비아의 현실 속에서 교회의 역할은 여전히 크다고 할 수 있다.
2003년 현재 콜롬비아의 신자수는 38,639,000명이며, 대교구 12, 교구 48, 본당 3,685개에, 추기경 3, 대
주교 18, 주교 87, 신부 7,848(교구 소속 5,514, 수도회 소속 2,334), 종신 부제 218, 수사 1,022, 수녀 17,413명이 있다. (→ 라틴 아메리카 ; 메데인 문헌 ; 보호 통치 ; 해방 신학)
※ 참고문헌 강석영, 《라틴 아메리카史》 하,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1996/ David B. Barrett, World Christian Encyclopedia, vol. 1, Oxford Univ. Press, 2001, pp. 201 ~204/ M.G. Romero, 3, 2003, pp. 1020~1024/ 2004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p. 297~298/ Ammuario Pontificio 2004, Città del Vaticano, 2004. 〔金志煥〕
콜롬비아
〔영〕Colomb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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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미사를 봉헌하는 콜롬비아 교회의 신자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