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순교자.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소속의 신부. 현대의 대속자(代贖者)이자 순교자 중 한 사람. 축일은 8 월 14일.
〔생 애〕 1894년 1월 7일 폴란드 우지(Łódź) 근처의 즈둔스카볼라(Zdúnska Wola)에서 출생한 콜베의 세례명 은 라이문도(Raimunds)였다. 1907년 10월에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레오폴리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0년 9월 4일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면서 막시밀리아노라는 수도명을 택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중등 교육과 수련을 받고 1911년 9월 5일에 첫 서약을 하였으며, 1912년 12월에 로마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로마의 프란치스코회 국제 신학원에 머물면서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보나벤투라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23세였던 성인은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신학원장 이뉴디(S. Ignudi) 신부의 허락하에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 (Militia Immaculatae)라는 모임을 결성하였다(1917. 10. 16). 이 모임은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에게 자신을 철저히 봉헌하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서 활동하는 일종의 신심 단체이다. 현재 이 단체의 사업은 전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
1914년 11월 1일에 종신 서약을 한 콜베는 1918년 4월 28일 사제품을 받고 1919년에는 폴란드로 돌아왔다. 귀국 직후 크라쿠프(Kraów)의 프란치스코회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동료 수사들은 물론 대학생들과 군종 신부들 안에서 기사회 조직을 만들었다. 로마에서 귀국할 때부터 폐결핵을 앓고 있던 그는 결국 1년 6개월 동안 요양소에서 생활하였고, 1921년부터는 한쪽 폐로만 살아야 하였다. 1922년부터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Rycerz Niepokalanje)라는 잡지를 발행함으로써 매스 미디어를 통한 사도직을 시작하였는데, 매월 발행되는 이 잡지의 부수는 1939년에 100만 부에 이르렀다. 후에 그의 출판 사도직에는 세 가지 다른 잡지와 하나의 일간지가 추가되었다. 그중 하나인 《블루》(Blue)는 교회와 성모 마리아를 옹호하는 성격의 잡지로, 처음에는 시험적으로 5,000부를 발행하였으나 곧 폴란드 전국에 보급되는 대중적인 잡지로 성장하였다.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는 초기에 그로드노(Grodno, 1923)에서 발행되다가, 1927년에는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 (Miepokalanów)이라는 수도 생활 공동체에서 발행하였다. 이 마을은 콜베 신부가 바르샤바(Warszawa)에서 40km 떨어진 방대한 지역에 설립한 공동체이다. 그리고 1930년에는 일본 나가사키(長崎)에도 이와 비슷한 형태의 수도원을 세웠다. 1930년 그는 교황 비오 11세 (1922~1939)의 특별 강복을 받은 후 일본으로 건너가 그 해 5월 나가사키 근처에 '원죄 없으신 성모의 뜰' 이라는 작은 수도 마을을 세우고, 성모와 선교에 관한 소식지인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無原罪の聖母の騎士)를 발행하였다. 이 소식지는 폴란드에서 발행하는 동명 잡지의 내용을 일본어로 옮긴 것으로, 일본에서 발행되는 가톨릭 잡지 중에서 가장 널리 보급되었다. 성인은 이렇게 6년 동안 일본 선교를 위해 노력하였다.
콜베 신부는 수도 생활의 개혁자로 일컬어진다. 그것은 사제 서품을 받지 않은 평수사들도 사도직을 위해서 각자 다양한 능력을 키우기 위해 훈련을 받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그가 중국, 한국, 인도에 세우려고 계획한 공동체들은 외부적인 이유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였다. 1936년 그는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 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38년 무렵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의 분원은 전세계에 762개나 되었다.
폴란드 내에서 유명해진 콜베 신부는 1939년 독일이 침공하여 폴란드 서부 지역의 3분의 2를 차지하자, 그해 9월 19일부터 12월 8일까지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나치에게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혔다가 곧 풀려났다. 이후 그는 가난한 이들과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 에 거주토록 하면서, 이들을 보호하고 돕기위해 노력하였다. 1941년에 콜베 신부가 <자유>라는 기고문을 발표하자, 나치는 이 기고문을 작성하고 유대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2월 17일에 그를 체포하였다. 처음 바르샤바의 파비악 형무소에 감금되었던 콜베 신부는, 2월 28일에 '죽음의 수용소' 라고 일컬어지던 아우슈비츠(Auschwitz)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그는 저명한 가톨릭 신부라는 이유로 더욱 혹독한 매질과 고문과 처벌을 받으면서도, 동료 수감자들에게 "증오는 파괴를 낳을 뿐이며 사랑은 창조를 낳는다" 라고 설명하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격려하였다. 그러던 중 1941년 7월 말경, 한 수감자가 수용소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나치는 한 명이 탈출하면 그 벌로 열 명을 처형하였다. 나치에 의해 지목된 열명의 처형자 중에는 폴란드 사람인 가조브니체크(F. Gajowniczek)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처형이 정해지자 자기에게는 가족과 아이들이 있다고 울부짖었고 이를 본 콜베 신부가 자원하여 대신 죽겠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나치 지휘관인 프리츠(Fiiz)는 이를 허락하였고, 콜베 신부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지하 감옥에 갇혔다. 나치의 처형 방법은 아사형(餓死刑)이었다. 다른 동료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2주 이상을 물과 음식 없이 생존한 콜베 신부에게 나치는 결국 독극물을 주사하였고, 그는 1941년 8월 14일 아우슈비츠의 감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 경〕 오늘날 콜베 신부가 죽음을 맞이한 감방은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1948년 5월 24일에 그의 시복을 위한 자료 수집 절차가 파도바(Padova)에서 시작되어 1954년에 종결되었고, 1960년 3월 16일 교 황청에서 시복을 위한 절차가 시작되었다. 마침내 콜베 신부는 1971년 10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 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10월 10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자비의 순교자' (Martyr of Charity)라는 칭호와 함께 그를 시성하였다.
콜베 신부는 잡지와 신문을 통해서 성모 마리아를 위해 보속을 바칠 것을 주장하는 많은 글을 발표하였으며, 마리아론에 관한 논문과 영성에 관한 깊은 내용을 담은 편지도 남겼다. 그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가장 깊었고, 또 성모 마리아에게 매우 특별한 공경을 바친 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 성모의 기사 수녀회)
※ 참고문헌 J.E. McCurry, 《NCE》 8, 2003, p. 2291 D. Farmer, Oxford Dictionary ofSaints, Oxford Univ. Press, 1996, pp. 283~284/ L. Di Fonza, O.F.M. conv., 《Cath》 6, pp. 1467~1468. 〔宋炯萬〕
콜베, 막시밀리아노 마리아(1894~1941)
Kolbe, Maximilianus Maria
글자 크기
11권

1 / 3
콜베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