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보니, 다니엘레 (1831~1881)

Comboni, Dani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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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콤보니.

성 콤보니.

성인. 아프리카의 선교사. 주교. 콤보니의 예수 성심 선교회(Comboni Missionaries of the Heart of Jesus, M.C.C.J.)와 니그리지아 신심 수녀회(Missionary Sisters Pie Madre della Nigrizia)의 창설자. 축일은 10월 10일.
〔생 애〕 1831년 3월 15일 북부 이탈리아의 브레시아(Brescia) 근처 가르다(Garda) 호숫가의 리모네 산 조반 니(Limone San Giovanni)에서 출생한 다니엘레는 농부였던 부모에게서 태어난 여덟 자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었다. 교구 신학교를 다닌 후 베로나(Verona)에 있는 마차(Mazza) 신부의 선교사 양성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장차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겠다는 뜻을 품고 신학 이외에도 몇 가지 외국어와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1854년에 사제품을 받았으며, 1857년 수단 선교를 위한 탐험대와 함께 중앙 아프리카로 파견되었고, 동료인 네 명의 신부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거쳐 현재 수단의 수도인 하르툼(Khartoum)으로 갔다. 그들은 나일 강 상류 지방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지만, 음식물과 물의 부족, 기후, 적대적인 환경 때문에 짧은 시간 동안 세 명의 신부가 사망하였다. 그래서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은 이 지방의 선교를 포기하였고, 콤보니 신부와 남은 동료는 1859년 이탈리아로 귀환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콤보니 신부는 1861 1864년까지 마차 신부의 신학교에서 선교사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구원을 위한 계획》(Piano per la rigenerazione dell'Africa, Torino, 1864)을 발간하고 프랑스, 스페인,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를 돌며 기금을 조성하였다.
1864년 콤보니 신부는 아프리카 선교를 위한 계획을 구상하였는데, 그것은 '아프리카인들을 통해서 아프리카를 구원하자' 는 것이었다. 즉 유럽인들은 해안선을 따라서 선교지를 구축하고, 그곳에서 아프리카인들을 교육시켜 내륙으로 보내어 다른 아프리카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는 여성 선교사들을 활용하는 방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1867년 교황의 허가를 얻은 콤보니 신부는 베로나 사제회(Verona Fathers)라고도 불리는 콤보니의 예수 성심 선교회를 설립하였고, 이집트의 카이로에 아프리카인 남성과 여성을 위한 두 개의 학교를 세웠다. 그가 새로운 사제회를 설립한 이유는, 베로나의 새 교구장이 선교 단체가 선교를 목적으로 자체 신학생이나 사제를 양성하도록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금을 위한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콤보니 신부는 베로나 수녀회(Verona Sisters)라고도 불리는 니그리지아 신심 수녀회를 설립하였다(1872) 그리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에 제출하기 위한 서류를 준비하였는데, 여기에는 자신의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1870년 7월 18일 이 문서를 승인하였다.
콤보니 신부는 1872년에 수단, 누비아 그리고 큰 호수들의 남쪽 영토들(인구 1억)을 포함하며 이집트부터 짐 바브웨까지, 그리고 홍해부터 말리까지를 관장하는 중앙아프리카 대목구의 부대목(provicar apostolic)에 임명되었으며, 1877년에는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콤보니 주교는 하르툼의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매진하였고, 자신의 대목구를 구석구석 찾아다니는 한편 하르툼, 엘오베이드(ElObeid), 베르베르(Berber), 텔렌(Delen) 말베스 (Malbes) 등지에 선교지들을 세웠다. 그리고 당시에 성행하였던 노예 무역과 노예 학대를 근절하기 위해서 애썼는데, 이를 위한 기금 모금을 위해 파리를 여행하던 중 프리메이슨단(Freemasonry)에 납치되기도 하였다.
콤보니 주교는 선교지를 확보하고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유럽과 아프리카를 다섯 번이나 오갔다. 그리하여 터키에서 파견된 이집트 총독 및 수단 총독과 친분을 맺어 노예 무역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다. 1881년 7월 엘오베이드에서 하르툼으로 여행하는 도중 말라리아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수개월간 계속 일을 하던 그는 결국 그해 10월 10일 하르툼에서 세상을 떠났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6년 3월 17일에 그를 복자품에 올렸으며, 2003년 10월 5일 시성하였다.
〔평 가〕 콤보니는 유럽에 흑인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언어학자, 지리학자, 민속학자로서 과학 학술지에 다양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언어의 천재로서 유럽의 여섯 개 언어와 아랍어 및 딩카족(Dinka)과 바리족(Ba), 누비아 흑인 방언 등에 능통하여 누비아 언어 사전을 편집하였고, 딩카족과 바리족의 언어에 대한 연구 논문도 발표하였다. 딩카족과 바리족의 방언에 관한 미테루츠너(Mitterrutzner)의 저서들(Brixen, 1866, 1867)은 콤보니의 원고를 기초로 한 것이었다. 《선교사의 삶에서 하루의 일부분》(Un passo al giorno sulla via della missione, Bologna, 1997), 《문서들》(Gli scritti, Bologna, 1991)과 같은 그의 보고서와 서간들은 아프리카 문명사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아프리카 탐험에서 발견한 역사적인 장면>(Quadro storico delle Scoperte Africane, 1880)이라는 논문 등 지리학에 관해서도 많은 글을 남겼다. (→ 선교회)

※ 참고문헌  J.M. Carillo · K.I. Rabenstein, 《NCE》 4, 2003, p. 1/ M.R. Nikkel,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ristian Missions, ed. by G.H. Anderson, Simon & Schuster Macmillan, 1998, pp. 146~147. 〔宋炯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