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20세기 가톨릭 신학계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한 사람. 교회 일치 운동가. 도미니코회 회원.
〔생 애〕 1904년 4월 13일 프랑스의 세단(Sedan)에서 태어난 콩가르는 랭스(Reims)에서 소신학교를 다녔다.
1921~1924년까지 파리 가톨릭 연구소에서 철학 수업을 받았으며, 1925년 도미니코회에 입회한 후 1926~1930년까지 투르네(Tournai)의 르 솔코아(Le Saulchoir) 도미니코회 신학원에서 신학을 배웠다. 1930년 1월에 사제 서품을 받고 1931~1939년까지 자신이 수학한 르 솔코아 신학원에서 기초 신학과 교회론을 가르쳤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던 기간을 제외하면, 1954년 이신학원을 강제로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콩가르의 열정적인 신학 연구와 강의는 계속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전의 활동 : 콩가르는 무엇보다도 왕성한 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신학적 관심사를 드러냈고, 이러한 그의 학문적 노력은 곧 신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교회 일치 운동에 관한 콩가르의 집중적인 관심이 가톨릭 교회 내에서 눈길을 끌었다. 그는 교회 일치 운동에 관한 시리즈로 '우남 상탐' (Unam Sanctam)을 기획 · 편찬하였는데, 그 첫 권으로'가톨릭 교회 일치 운동의 원리' (Principes d'un oecuménisme catholique)라는 부제를 붙인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교의 분열》(Chretiens desunis, 1937)을 발간하였다. 이 책에서 콩가르는 그리스도교의 분열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시도하였고, 편견 없이 프로테스탄트의 특성을 설명하였다. 그 외에도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는데, 특히 가톨릭 교회가 교회 일치 운동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에 대한 원론적인 문제도 제기하였다. 학문적 열정이 꽃피기 시작할 무렵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콩가르는 1939년 프랑스군 장교로 참전하였는데, 1940년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이후 5년 동안 수용소에서 생활하였다. 1945년 종전이 되어 돌아온 그는 이듬해부터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교회 일치 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때 콩가르는 교회사가인 묄러(J.A. Möhler, 1796~1838)와 도미니코회 신학자인 세누(M.-D. Chenu, 1895~1990)로부터 사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 영향으로 교회의 원천과 기원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였다. 콩가르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와의 통교 및 일치 그리고 바로 이 바탕 위에서 교회 신앙 생활의 근본 원칙을 찾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삼위 일체로서의 성령론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는 신학적인 고리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는 교회 일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사제직과 신학적 기본 입장을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1946~
1956년까지 그의 신학적 입장 또는 교회에 대한 해석이 교황청과 입장 차이를 보이면서, 그의 삶은 위기에 직면 하였다. 당시 교황청의 신앙 교리성은 콩가르의 신학적 견해와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신스콜라주의 또는 신토 마스주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7년과 1948년에 도미니코회 총장이었던 수아레스(E. Suarez)로부터 경고를 받은 콩가르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후퇴시켜야 했다. 마침내 1952년 교황청은 교회 내의 진정한 개혁과 쇄신을 위한 기본 원칙 및 범주를 설정하고자 하였던 그의 저서 《교회에서의 참된 개혁과 거짓 개혁》(Vraie et fausse Réforme dans I'Eglise, 1950)의 재발간과 번역을 금지시켰다. 이후 콩가르의 모든 저술은 도미니코회 총장의 검열을 거쳐야만 출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 내 위계 질서와 평신도의 역할에 관한 저서 《평신도 신학을 위한 지표》(Jalons pour une théologie du laicat, 1953)는 발간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콩가르는 교회의 위계 질서에 대한 비판과 평신도가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에 참여해야 하는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1954년부터 본격적인 고통이 그에게 시작되는데, 우선 르 솔코아 신학원에서 더이상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어 그곳을 떠나야만 하였다. 이로써 콩가르의 소위 첫 번째 유배가 시작되었다. 콩가르는 예루살렘에 있는 도미니코회의 성서 연구소에서 생활하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철저한 단절과 고립을 체험하였다. 1954년 겨울에 그는 로마로 소환되었고, 신앙 교리성과의 오랜 대화가 시작되었다.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콩가르는 메모를 할 수 없었고, 대화 내용에 관해서는 쌍방 모두 절대 침묵이 요구되었다. 사실 당시 그에게 로마 체류는 두 번째 유배나 다름없었다. 교황청은 1955년 그를 프랑스로 돌려보내지만, 그해 11월 다시 프랑스를 떠날 것을 지시하였다. 1956년 2월에 콩가르는 영국의 케임브리지에 도착하였다. 이것이 그의 세 번째 유배였다. 영국 생활은 그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고 아무런 전망도 없어 보였다고 한다. 그의 모든 저술이 검열을 거치면서 반려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글도 공개적으로 발표될 수 없었다. 이러한 세상과의 단절은 그에게는 깊은 밑바닥 체험이자 치명적인 순간들이었다. 사실 콩가르는 도미니코회 신학원에서의 교수직 박탈과 퇴출, 계속되는 유배 등에 처한 자신을 방어할 어떤 힘도 없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단지 정의일 뿐이었다고 하지만, 그것마저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인간들 사이의 생명력 있는 소통과 중재에 특별한 의미를 두면서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움직이고자 하였으나, 이러한 그의 기본적 입장이 그와 친분이 있었던 교회 지도층 인사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더구나 이런 상황에서 콩가르는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는 신앙 교리성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나 순종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열린 신앙과 사고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1956년 11월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고,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대주교인 베버(Weber)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신학자로서의 활동 : 당시 공의회를 준비하고 있던 교황 요한 23세(1958~1963)는 콩가르를 오해와 박해에서 풀어 주었다. 그리고 1960년 7월 그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위원회의 신학 고문으로 위촉하였다. 가톨릭 교회 개혁과 쇄신에 대한 콩가르의 주장은 공의회의 진행 과정에서 그를 가장 영향력 있는 공의회 신학자로 만들었다. 그와 신스콜라주의자들의 화해는 거의 불가능하였지만, '개혁과 쇄신' 이라는 공의회 정신에 비추어 그의 신학적 입장의 정당성이 인정받게 되었다. 공의회 정신에 맞추어 그는 가톨릭 교회 개혁의 선봉에 서려고 하였고, 이런 측면에서 교회 내 평신도의 역할, 진정한 교회의 전승 그리고 그 주제들이 종말론과 맺고 있는 역동성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원천과 초대 교회 전통의 올바른 계승을 통한 가톨릭 교회 정신의 회복과 삶의 쇄신이 그의 핵심적 주장이었다. 또한 공의회에서 콩가르는 교회 · 교회 일치 · 계시 · 선교 · 사제직 그리고 현대 세계에서의 교회의 역할에 관한 문건 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공의회가 끝난 후인 1968년에, 그는 르 솔코아로 돌아갔다. 그리고 말년에는 파리에 머물면서 공의회가 제시한 교회 개혁과 그 정신의 발전을 위해서 시대의 징표
를 읽는 신학 저술 활동을 계속하였다. 공의회 이후 그의 대표적 저술로는, 초기 교회의 역사에 관한 저서인 《중세 전기의 교회론》(L'ecclésiologie du haut moyen-âge, 1968), 《성 아우구스티노부터 근대까지의 교회》(L'Eglise de Saint-Augustin à l'époque moderne, 1970) 그리고 서구 신학사에서 잊혀져 있던 성령론의 복구를 시도하여 집필한 《나는 성령을 믿는다》(Je crois en l'Esprit-Saint, 1979~1980, 전 3권)가 있다. 또한 교회 내부에서 현실적으로, 또 구체적으로 발생된 사안들-예를 들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1988년 파문당한 르페브르(M. Lefebvre, 1905~1991) 대주교에 관한 문제, 정치 신학과 해방 신학, 카리스마에 관한 운동 등-에도 콩가르는 관심을 갖고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콩가르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1994년 11월 24일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으나, 이듬해 6월 22일 그는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평 가〕 20세기 가톨릭 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콩가르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다. 역사와 현실에 대한 투명한 느낌을 갖고 있던 사상가이자 신비주의자로 평가되는 콩가르는 우선 무엇보다도 교회의 본질에 관해 열정적인 연구를 하였고, 교회의 구체적 실천에 천착하였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그 실천적 차원 의 분열이 그를 교회 일치 운동의 위대한 선구자로 만들었다. 그의 비판과 종합 정신이 공의회 신학자인 그에게 가톨릭 교회 쇄신을 위한 사상적 원천을 제공하였다. 공의회 이후에도 그의 비판적 정신은 끊임없이 현대 교회에 활 력을 주는 이론적 · 실천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전통의 예언자" (J.-P.Jossua)라고 불린다. (→ 신학사)
※ 참고문헌 V. Dunne, Prophecy in the Church. The vision of Yves Congar, Frankfurt a. M., 2000/ E. Fouilloux, Friar Yves, Cardinal Congar, Domincan : Itinerary of a Theologian, U.S. Catholic Historian 17, 1999, pp. 63~90/ W. Henn, The hierarchy of truths according to Yves Congar, O.P., Roma, 1987/ J.-P. Jossua, Le Père Congar. La théologie au service du Peuple de Dieu, Paris, 1967/ T.I. Macdonald, The Ecclesiologie of Yves Congar. Fundamental Themes, Lamham, Md., 1984/ C. Meakin, The same but different? The relationship between unity and diversity in the theological ecumenism if Yves Congar, Lund, 1995/ A. Nichols, Yves Congar, London, 1989/ M. Osner, 《LThK》 2, 1994, pp. 1295~1296/ E. Sauser, 《BBKL》 21, 2003, pp. 282~285. 〔吳敏煥〕
콩가르, 이브 마리 조제프(1904~1995)
Congar, Yves Marie-Joseph
글자 크기
11권

콩가르 추기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