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드랭, 샤를 드 (1588~1641)

Condren, Charles 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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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오라토리오회 설교가. 17세기 프랑스 가톨릭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친 영성 저술가.
〔생애와 활동〕 콩드랭은 1588년 12월 15일 프랑스 수아송(Soissons) 인근 보뷔앵(Vauxbuin)의 귀족 집안에 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프로테스탄트에서 개종한 사람으로 모(Meaux) 지역에 있는 몽소(Monceaux)의 지역 장관이었다. 아버지는 콩드랭이 왕의 근위병이 되어 출세하기를 원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기도와 학문에 전념하여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고, 1년 동안 철학을 강의한 후 1614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해 소르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614~1615년까지 여러 곳에서 설교 활동을 하였다. 당시의 젊은이들처럼 콩드랭도 프란치스코회를 비롯한 수도회에 관심을 가졌으나, 교수직을 맡으라는 스승 뒤발(A. Duval)의 권고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다 "나는 네가 사제가 되기를 원하고 나의 교회에 봉사하기를 원한다"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결국 1617년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였다. 이후 그는 자신의 성소에 대해 어떤 갈등도 하지 않았다.
오라토리오회의 초대 총원장이던 베륄(P. de Bérulle, 1575~1629)은 이단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강연회의 조직을 입회한 지 얼마 안 된 그에게 맡겼고, 가르멜 수도원의 영성 지도까지 맡겼다. 또한 그의 추천으로 콩드랭은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1610~1643)의 동생인 오를레앙공 가스통(Gaston, duc d'Orléans, 1608~1660)의 고해 신부가 되었다. 콩드랭으로 인해 루이 13세와 그 동생은 좋지 않던 관계를 청산하고 화해를 하였다. 그는 1618년에 느베르(Nevers) 1619년에는 랑그르(Langres) 그리고 1621년에는 푸아티에(Poitiers)에 오라토리오회 공동체를 신설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회헌 작성에도 참여하였다. 1624년에 그는 생마글루아르(Sainte-Magloire) 공동체의 원장이 되었고, 1625년에는 총원장인 베륄의 고해 신부가 되었다. 그리고 1629년 총원장이 사망하자 본인의 뜻과는 달리 오라토리오회의 2대 총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두 번이나 도망치면서 사퇴 의사를 표명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총원장이 된 그는 새로운 지역에 9개의 공동체, 2개의 본당 그리고 6개의 대학을 설립하는 등 오라토리오회의 기초를 다지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오라토리오회 조직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공동체의 행정을 중앙 집권화시켰고, 총원장의 지도 아래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였다.
콩드랭은 베륄처럼 성직자들의 생활 쇄신과 이상적인 사제상의 구현을 원하였다. 그래서 쉴피스회의 설립자인 올리에(J.J. Olier, 1608~1657)와 회원들에게 신학교를 설립하여 신학과 성서 등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오라토리오회가 대학, 신학교 등과 같은 교육 기관을 설립 · 운영하는 데 중점을 두도록 정하였다. 그로인해 종교 개혁의 여파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가톨릭 교회의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많은 활동과 함께 지속적으로 명상을 하였던 콩드랭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 치우침이 없었고 생활은 소박하고 마음은 따뜻하였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였다. 그렇게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그는 1641년 1월 7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 상〕 콩드랭의 사상에서 근본이 되는 것은 베륄처럼 하느님 중심주의이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경신례가 찬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베륄의 생각과는 다르다. 콩드랭은 "인간이 자신을 완전히 무화(無化)시키며 자기애를 포기하고 십자가상의 그리스도 희생 안에서 하느님께 봉헌 제물로 자신을 바침으로써 경신례가 가능하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런 하느님의 마음에 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에게 복종하는 것과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밖에 없다. 콩드랭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고, 원죄로 인해 파괴된 인간성 때문에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며, 그분 앞에 빚을 지고 있다고 하였다. 인간은 자신을 하느님께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만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희생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육화된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희생은 인간성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가야 하는 길이 제시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걷기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며, 자기 부정을 통하여 하느님께 희생 제물로 자신을 바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며, 전력을 다해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성령이 인간 안에 들어오도록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게 한다면 영혼의 모든 더러움에서 깨끗해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 소멸되어 그와 하나될 때까지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의 존재가 삶 안에 받아들여지기를 갈망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예수는 미사를 통해 하느님께 드리는 희생물이 되어 매일 제단에 바쳐진다. 이 희생은 세상의 시작과 함께 시작되었고,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으며, 미사 안에서 계속된다. 미사가 이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교회는 영원한 하느님을 흠숭하기 위해 성체(희생 제물)를 봉헌하는 미사를 드려야 한다. 콩드랭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구원자와 중개자라는 역할보다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우리의 사제라는 인상이 강하다. 하느님인 동시에 인간인 예수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인간의 원죄를 대속하고, 인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봉헌한 희생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경배자이며 우리의 기도가 된다.
콩드랭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 역시 이 영성에서 나온다. 성모 마리아의 삶 자체가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
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성모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콩드랭은 성모 마 리아의 삶의 원천이며 원리인 삼위 일체를 경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제의 직분 역시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희생 제물(성체)은 사제직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에 들어갔다. 사제가 제단에서 희생물을 봉헌할 때 예수의 이름만이 아니라 모든 성인들의 통공 속에서 "이는 내 몸이다" 라고 말한다. 이 친교는 성인들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신비체)을 형성하는 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된다. 따라서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와 일치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하며, 특히 사제는 성찬 전례를 거행할 때 더욱더 강하게 이 일치를 느껴야 한다. 사제들의 첫 임무는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자신을 하느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일이며, 이것은 주교에게 순명함으로써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참여한 오라토리오회 회헌의 설립 정신은 사랑 안에서 신학생들을 교육시키고 정화시켜, 교회에 사제직을 올바르게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공급하는 일이었다.
콩드랭의 신학과 영성에는 아우구스티노(Augusinus Hipponensis, 354~430)가 언급한, 죄로 인해 크게 손상된 인간 본성에 대한 주제를 발견할 수 있고, 희생 제물을 통해 순수의 결백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대속' (代贖) 개념을 찾을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대속 사상이나 인간의 죄 상태를 강조하는 콩드랭의 사상이 매우 비관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 대부분이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고 특히 바오로 서간과 요한 복음서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며, 당시 유행하던 아우구스티노의 사상과 엄격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그의 신학 사상은 영적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하느님의 위대함이나 인간의 의존성, 원죄에 의한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있으며, 나아가 인간이 자기 본성과 이기심에서 벗어나 자신을 완전히 무화시켜 하느님께 사랑의 희생물로 바치지 않는다면 그분에 대한 경험을 할 수 없고 그분께 영광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시사해 준다.
〔저 서〕 콩드랭은 단 한 권의 책도 출판하지 않았다. 신경성 질환에 시달렸지만, 그의 글은 그가 사망한 후 다 른 사람들의 손에 의해 편집 · 출판되었다. 작품 중 특히 중요한 것은 《사제직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명상》(L'Idée du sacerdoce et du sacrifice de Jésus-Christ, 1677)이다. 이 책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여러 개의 명상을 언급하는데, 1부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오라토리오회 회원이 편집하였고, 2~4부는 얀센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을 때의 케넬(P. Quesnel, 1634~1719)에 의해 편집되었다. 따라서 이 책은 전적으로 콩드랭의 것이라 말하기는 어려우나, 그의 기본 입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담화와 편지》(Discours et Lettres, 1643)가 유명한데, 이 책은 콩드랭의 169개 서간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콩드랭의 대화를 적은 비망록을 기초로 편집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들에 대한 고찰》(Considérations sur les mystères de Jésus-Christ, 1899)이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책들이 출판되었으며, 그의 생애에 대한 두 권짜리 전기인 《샤를 드 콩드랭 신부의 생애》(La vie du Père Charles de Condren)는 1643년에 편집 · 출판되었다.
〔평 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자 사제로서 일생을 살았던 그의 영성은 당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시대 프랑스의 영성가들처럼 콩드랭도 신비주의자였으며, 그의 핵심적 메시지는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되고 새롭게 창조되어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하는 데 있다. 그의 사상은 특히 올리에와 에우데스(J. Eudes, 1601~1680)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베륄은 콩드랭에 대해 "요람에서부터 기도의 영성을 받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올리에는 "우리 세기의 가장 큰 빛이었다"라고 평하였으며, 그의 생애를 전기로 출판한 아멜로트(D. Amelote, 1609~1678)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사람 중에 가장 경이로운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이미지였다" 라고 평하였다. 빈천시오 아 바오로(Vincentius a Paulo, 1581~1660)는 "그와 비슷한 사람을 지금까지 보지 못하였다" 라고 여러번 반복하였으며, 상탈(J.-F. de Chantal, 1572~1641)은 "하느님이 교회에 그를 준 것은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사에게 설교하기 위해서였다" 라고 찬사를 보냈다. (→ 베륄, 피에르 드 ; 오라토리오회 ; 올리에, 장 자크)
※ 참고문헌  P. Amelote, La vie du Père Charles de Condren composée par un pretre, 2 vols., Paris, 1643/ A. Pin, Vie du P. Charles de Condren, Paris, 1858/ A. Perraud, L'Oratoire de France au XVII et au XIX siecle, Paris, 1866/ M. Lepin, L'Idée du sacrifice dans la religion chrétienne, principalement d'après de P. de Condren et M. Olier, Paris · Lyon, 1897/ L. Batterel, Mémoires domestiques pour servir a l'histoire de I'Oratoire, publ. par Ingold et Bonnardet, 6 vols., Paris, 1902~1905/ H. Bremond, Histoire littéraire du sentiment religieux en France Ⅲ, Paris, 1921, pp. 284~418/ M. Leherpeur, L'Oratoire de France, Paris, 1926/ P. Pourrat, W.H. Mrrchell trad., Christian Spirituality, vol. 3, New York, 1927, pp. 350~352/ B. Kiessler, Die Struktur des Theozentrismus bei Pierre de Berulle und Charles de Condren, Berlin, 1934/ A. Portaluppi, Dottrine spirituali, Brescia, 1943/ G. Rotureau, 《Cath》 II, pp. 1482~1484/ F. Antolin Rodriguez, I, pp. 430~431/ A. Molieu, 《DSp》2, pp. 1373~1388/ P. Auvray · A. Jouffrey eds., Lettres du Père Charles de Condren, Cerf, Paris, 1943/ J. Galay, Le sacrifice d'après I'Ecole Française de Spiritualié, Paris, 1951/ A. Molien, 《DSAM》 II, pp. 1373~1388/ L. Mezzadri, A lode della gloria. Il sacerdote nell'école française. XVII-XXX secolo, Jaca Book, Milano, 1989. 〔李再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