쾨글러, 이냐시우스 (1680/1682~1746)

Kögler, Ignat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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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의 예수회 중국 선교사. 신부. 중국명은 대진현(戴進賢), 자(字)는 가빈(嘉賓). 독일 바이에른(Bay- ern) 주의 란츠베르크(Landsberg)에서 1680년 또는 1682년에 출생하였고, 1696년 예수회에 입회하여 지원기를 마친 뒤 스페인으로 건너가 수련기를 거치고 1714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1716년 3월 13일에 13명의 선교사와 함께 포르투갈의 리스본(Lisbon)을 떠나 같은 해 8월 31일 중국 마카오에 도착하여 선교사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1725년에 예수회 북경 수도원 원장이 되었고, 1732년에 동양 순찰사(東洋巡察使)를 역임하였으며, 1738년 예수회 중국 관구 부관구장이 되었고, 1741년에 다시 동양 순찰사를 역임하였다.
쾨글러가 중국에 갔을 때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하여 선교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였기 때문에 선교 방면에서는 두드러진 활약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어와 수학, 천문학 등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과학 기술 방면에서는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1717년 1월 2일 청(淸) 황제 강희제(康熙帝, 1661~1722)의 부름으로 북경에 가서 《천문 역산 지리서》(天文曆算地理書)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그 뒤 1725년에는 흠천감 감정 (欽天監監正)이 되었으며, 1731년 예부시랑(禮部侍郎)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예부시랑이 된 뒤에도 흠천감 감정을 계속 맡아 1746년 북경에서 사망할 때까지 29년 동안이나 종사하였다.
그가 흠천감 감정으로 있으면서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당시 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서양 천문학의 최신 학설을 역서(曆書) 작성에 도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서광계(徐光啓, 1562~1633)의 《숭정역서》(崇禎曆書)가 천문학이 발달함에 따라 결함을 드러내자 1723년 《숭정역서》를 수정한 《역상고성》(曆象考成) 42권이 간행되어 '신수시헌칠정법' (新修時憲七政法)을 사용하였으나, 《역상고성》에 의한 계산 또한 불충분하여 1730년 6월에 발생한 일식 예보가 적중되지 않았다. 그래서 쾨글러는 일식 계산에 필요한 해와 달의 운동을 케플러(J. Kepler, 1571~1630)의 혹성 이론을 사용하여 설명하였다. 독일의 천문학자 케플러는 천체에 대한 서양의 전통적인 원 궤도설을 타파하고 혹성의 타원 궤도설을 주장하였는데, 천문학자 카시니(G.D. Cassini, 1625~1712)가 그 정확성을 관측하였고 이 카시니의 관측법을 쾨글러가 따랐던 것이다. 이를 '쾨글러의 신법' 이라고 하는데, 그가 1730년에 착수하여 1741년에 완성한 《역상고성후편》(曆象考成後編)에 도입되어 있다.
〔조선에 끼친 영향〕 조선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 역법을 배우기 위하여 비상한 노력을 경주하였는데, 18세기 조선의 역법 발전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괴글러였다. 우리 나라 사신으로서 최초로 쾨글러를 만난 사람은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이었다. 그는 1720년에 북경에 사신으로 가서 흠천감의 괴글러와 수아레스(J. Suarez, 蘇霖)의 방문을 받았는데, 이때 천문(天文) · 역법(曆法)에 대해 질문하여 그들의 답변을 들었으나 분명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뒤에 다시 쾨글러에게 서면으로 절묘한 서양의 천문 · 역법 · 수학 등에 대해 깨우쳐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에서 1723년 《숭정역서》를 수정한 《역상고성》 42권을 간행하여 신수시헌칠정법을 사용하게 되자, 조선 정부도 다음해인 1724년 동지사에게 명령하여 흠천감으로부터 《역상고성》을 구입케 한 뒤 1725년부터 신수시헌칠정법을 사용하였다. 또 괴글러가 중국의 역서 작성에 카시니의 관측법을 도입하자 조선 정부는 1733년에 일관(日官) 안중태(安重泰)를 북경의 흠천감에 파견하여 쾨글러의 신법을 배워 오게 하였으며, 그는 많은 역서와 서양제의 일규(日圭) 및 월규(月圭)를 구입하여 돌아왔다. 1741년에는 일관 안국린(安國麟)과 역관 변중화(卞重和)가 북경의 천주당을 왕래하면서 흠천감 감정 괴글러, 감부(監副) 페레이라(A. Pereira, 徐懋德)와 깊은 교분을 맺으며 많은 서적들을 구입하여 돌아왔다. 이어 1743년에도 일관 안국빈(安國賓)이 역관 변중화 · 김재현(金在絃)과 함께 북경에 가서 흠천감의 쾨글러와 하국신(何國宸)을 방문하여 지도를 받았으며, 또한 이 해에 쾨글러의 신법이 들어 있는 《역상고성 후편》을 일관 김태서(金兌瑞)와 역관 안명설(安命說)이 구입해 왔다. 이러한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1744년부터는 역서 작성에서 일전(日纏) · 월리(月離) · 교식(交食)은 《역상고성 후편》에 의거한 카시니의 신법(喝法)을 따르고, 오성의 운행에 대해서는 《역상고성》에 의거한 매곡성(梅穀成)의 매법(梅法)을 따르게 되었다. (→ 북경대교구 ; 북당 ; 서학 사상 ; 중국 ; 한역 서학서)
※ 참고문헌  方豪, 《中國天主教史 3冊, 香港, 公教真理學會, 1970/ L. Pfister, Notices biographiques et bibliographiques sur les Jésuites de l'ancienne Mission de Chine 1552~1773, Paris, 1932(馮承鈞 漢譯, 《入華耶蘇會士列傳》, 商務印書館, 臺北, 1960)/ 徐宗澤, 《明清間耶蘇會士譯著提要》, 中華書局, 1949/ 姜在彥, 《조선의 西學史》, 민음사, 1990. 〔徐鍾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