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동양학자. 서지학자.
〔생 애〕 쿠랑은 1865년 10월 12일 파리의 프랭클린(Franklin)가 6번지에서 샤를 이시도르 쿠랑(Charles Isi- dore Courant, 1826~1888)과 마리 코스나르(Marie Cosnard, 1835~1907)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며, 그는 1883년 파리 대학교 법대에 입학하여 1886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한편 1885년에 동양어학교(Ecole des Langues Orientales Vivantes, 현재 파리 3대학 소속)의 중국어와 일본어 강의에 등록하여 1888년에 학위를 받은 후, 프랑스 외무성의 통역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학위 수여 직후인 9월에는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관의 통역관 실습생으로 파견되었는데, 그중 마지막 10여 개월 동안 비시에르(A. Vissière)를 대신하여 수석 통역관으로 활동하였다.
쿠랑이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90년 5월 23일 게랭(F. Guérin)의 뒤를 이어 서울 공사관의 통역 서기관으로 전속되면서였다. 당시 그의 상관이자 유일한 외교관 동료인 플랑시(V.C. de Plancy, 1853~1922)를 통해 쿠랑은 조선의 서지 및 한국학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플랑시와 함께 지냈던 13개월 동안 한국의 문화, 특히 고서 및 고기물(古器物)과 접촉하였다. 플랑시는 쿠랑이 조선을 떠난 후에도 《조선서지》(朝鮮書誌, Bibliographie Coréenne) 작성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반면 쿠랑 역시 《조선서지》의 서론에서 드러나듯 서울의 각 상점, 특히 고서점을 찾아다니며 수집에 열중하였다. 중국어를 공부한 그로서는 당시 대부분 한문으로 쓰여진 한국 서적을, 식견을 갖고 고를 수 있었으며, 《청분실서목》(清芬室書目)의 저자 이인영(李仁榮)을 비
롯한 프랑스 공사관에서 일하던 선비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21개월간의 한국 체류를 마치고 1892년 3월 한 국을 떠난 후에도 《조선서지》의 작성이나 한국에 관한 연구 및 발표를 위해 각종 기초 자료를 제공해 준 것은 뒤텔(G-C.-M. Mutel, 閔德孝) 주교였다. 사실 21개월간의 체류였음에도 3,821종의 도서를 해제까지 포함시켜 《조선서지》로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은 플랑시나 뮈텔 주교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쿠랑은 한국 체류 중 《조선서지》 외에도 1891년 <조선직관역대총람)(朝鮮職官歷代總覽, Répertoire historique de 'administration coréenne)을 작성하였으며, 이 책으로 1892년 외교관상을 수상하였다.
1892년 3월 북경으로 떠난 후에도 플랑시나 뮈텔에게 보낸 쿠랑의 편지를 보면, 그의 관심사는 처음에는 오기조차 꺼려했던 한국과 서지에 관한 것 외에는 없었다. 한국 측에서도 1896년 학부 대신(學部大臣) 민종묵(閔種 默, 1835~1916)이 학부의 외국 고문으로 그를 원하였으나, 주한 러시아 대리 공사 베베르(K.I. Weber)에 의해 좌절되었다. 수차에 걸친 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한국행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892년 북경에 머문 몇 개월 동안 《조선서지》의 작성은 부진하였으나 행정, 의례, 불교, 도교 부분은 완성된 상태였다. 그러나 도서 자체의 실사보다는 기존 목록을 활용하려는 사서(史書) 부분과 저자에 대한 개별적 조사로 인해 시간이 지연될 듯한 문집류가 남아 있었다.
1892년 말 파리로 돌아간 쿠랑은 이듬해 1월 동양어 학교 학장의 딸 엘렌(Hélène Schefer)과 결혼하여 반년 정도를 파리에서 보낸 후 도쿄에 부임하였다. 이 무렵 《조선서지》 작업을 진전시키면서, 그는 뮈텔 주교에게 계속 한국에 관한 참고 자료를 요구하였다. 한편 자신은 일본의 우에노(上野) 도서관과 마스가이사(增上寺)에 소장된 한국 전적(典籍)을 실사하였는데, 15세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양질(良質)의 대장경(大藏經)을 다수 접할 수 있었다. 1894년 도쿄의 인쇄소와 《조선서지》에 대한 인쇄약을 맺고, 플랑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간곡히 청하였으나 거절당했던 서문도 그 무렵 완성시켰다.
1895년에 부임한 천강(天濂)에서 1894, 1895년 연이어 태어난 두 아들 샤를(Charles)과 루이(Louis)를 콜
레라로 잃는 불행을 겪었으나, <조선서지> 2권은 프랑스로 보내지고 3권의 인쇄도 진전되어 파리, 도쿄, 천강을 오가는 1, 2, 3차의 교정이 이루어졌다.
1896년 프랑스 귀국 후 셋째 아들이 태어나자 쿠랑은 가족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 외교관직을 포기하고 파리에 정착하였다. 그는 교수직을 구하면서 1897년에 파리 국립 도서관에 현저히 늘어나고 있던 극동(極凍), 특히 중국 전적에 대해 필사본으로 되어 있던 레뮈자(Rémusat)와 줄리앙(Stanislas Julien)의 구목록(舊目錄)보다 완전하고 체계적인 도서 목록의 작성을 시작하였다. 이때 나온 것이 (중한일도서목록)(中韓日圖書目錄, Catalogue des livres chinois, coréens et japonais)으로, 완성되지는 못하였으나 1912년 2권으로 묶인 7책으로 인쇄되었다. 1896년 《조선서지》 3권이 출판되었으나, 몇몇 동양학자들의 감탄과 학술원상 수상을 빼고는 한국에 대해 무지했던 당시의 학계에서 별다른 평가를 받거나 이용되지 못하였다. 그 후에 발표된 한국에 관한 수편의 글 역시 그의 학계 진출의 결정적 근거는 되지 못하여 동양어학교에서의 일본어 또는 중국어 교수직은 좌절되었다.
쿠랑이 만일 파리에 계속 머물렀다면 국립 도서관의 극동 자료 정리 및 이용 면에서 한국에 대한 획기적인 연구의 진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1844년 이래극동 교역에 관심을 갖고 있던 상업 도시 리용(Lyon)에 정착하여, 1899년 12월부터 리용의 상공회의소와 리용대학교에서 각각 '중국의 일상 생활' 과 '중국어' 를 가르쳤으며, 1903년에는 이 대학교에서 정식으로 중국학 학위 수여가 인정되는 일에 참여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중국, 일본, 한국에 관한 많은 논문들을 발표하였으며, 특히 1904년에는 <조선과 외국의 세력>(La Corée et les puissances étrangères, Annales des sciences politiques, Paris, 15 mars 1904, pp. 253~267), <조선에서의 일본 거점 : 15세기 이래의 부산>(Un établissement japonais en Corée, Pou San depuis le XV⁰ siècle, Annales coloniales, aoûtoctobre 1904. Aussi en brochure dans Bibliothèque de la France coloniale moderne, Paris, 1904) 등 당시 열강의 세력 속에 있는 한국의 정세를 대변하는 글들을 발표하였다. 1913년 리용 대학교 문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위해 제출한 논문 <중국 음악사론, 부 · 조선 음악>(中國音樂史論, 附 · 朝鮮音樂, Essai historique sur la musique classique des Chinois, avec un appendice relatif à la musique coréenne, fascicule séparé[n⁰ 8], Paris, Ch. Delagrave, 1912)은 발표 당시에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극찬을 받는 저술이다. 이 논문으로 그는 11월에 정식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1911년경에 입은 오른손 부상이 심해졌고 1917년에 얻은 폐렴으로 그의 왕성했던 집필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하였다. 1919년 학교 사절로 일본에 6주간 체류하였던 쿠랑은 조선 전체를 탐방하며 고고학적 · 금석학적 연구를 하려던 염원을 이루지 못한 채 평양, 서울, 대구에 잠시 머무르며 뮈텔 주교와의 재상봉과 서울의 장서각 방문으로만 만족해야 하였다. 프랑스로 돌아온 쿠랑은 아내의 지나친 낭비벽으로 인해 그녀와 별거하였고, 리용 중법 대학의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양측의 배척으로 1927년경 실무에서 물러났다. 이러한 불운과 질병으로 1927년부터 중단되는 그의 마지막 7년간의 강의는 주로 한국에 관한 것들이었다. 쿠랑은 1930년 막내 아들까지 죽은 후 직계 후손 없이 1935년 8월 18일 칼뤼르(Caluire)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 서〕 쿠랑은 1891~1927년까지 동양학 전반에 관한 크고 작은 논저 103편을 남겼다. 그중 한국에 관한 것이 21종으로 전체의 원고 분량으로 따진다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발표 연대순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 사용된 다종의 화폐 소사>(Note historique sur les diverses espèces de monnaie qui été usitées en Corée, Journal asiatique, 9-II, 1893, pp. 270~289), , <한국사의 주요 시기>(Principales périodes I'histoire de la Corée, Revue française du Japon, 1895, pp. 1~9, 127~146, 179~186 ; 1896, pp. 131~142, 179~185), <한국에서 사용된 각종 문자 체계>(Note sur les différents systèmes d'écritures employés en Corée, Transactions of the Asiatic Society of Japan, XXIII, décembre 1895, pp. 5~23), <한국의 잡가와 무용>(La complainte mimée et le ballet en Corée, Journal asiatique, 9-X, 1897, pp. 74~76), <9세기까지의 한국과 일본 관계 및 일본 문화 기원에 끼친 영향>(La Corée jusqu'au IX˚ siècle, ses rapports avec le Japon et son influence sur les origines de la civilisation japonaise, T'oung Pao, 1898, pp. 1~27) , <고구려 왕조의 중국 석비>(Stèle chinoise du royaume de Ko Kourye, Journal asiatique, 0-XI, 1898, pp. 210~238) , <한국학 및 일본학 소고>(Note sur les études coréennes et japonaises, Actes du onzième congrès international des orientalistes, Paris, 1897, 2˚ section, Paris, Imprimerie nationale, 1899, pp. 67~94), <한국의 종교 의식 약사>(Sommaire et historique des cultes coréens, conférence faite au Musée Guimet le 17 décembre 1899, T'oung Pao, 1900, pp. 295~326) <상 드 마르스에 있는 한국관>(Le pavillon coréen au Champ de Mars, Souvenir de Séoul, Exposition universelle, 1900, pp. III-VIII , <한국의 기념물들>(Quelques onuments coréens, conférence faite au Musée Guimet le 23 décembre 1900, inédite) , 《극동 사정, 조선 조정》(Choses d'Extreme-Orient. La Cour de Corée) . <한국>(La Corée, dans Claudius Mardrolle, La Chine de Nord, Paris, Comité de I'Asie frangaise, 1903, XII-14-36-144-68 p. Rééd ; La Nord-Est de la Chine, Paris, Hachettem, 1913), <동맹에서 통치까지 보호령의 숙영지> (De I'alliance à la domination. Etapes d'un protectorat, Annuales coloniales, Paris, 11 novembre 1909), <한국 문자> (L'écriture coréenne, Notices sur les caractères étrangers, anciens et moderne, Paris, Imprimerie nationale, 1927, pp. 307~309) .
〔평 가〕 쿠랑의 저술은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닌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로 이어지고 있다. 그중에는 개설서 혹은 소개서에 그치는 것도 있지만, 한국학은 물론 한국에 대해 전혀 무지하던 당시 상황을 감안할 때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저술 대부분이 오늘날 국내 연구 자료로 도움이 될 만큼 현대적 방법론과 깊은 연구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특히 오늘날까지 유럽 학계에서 한국학 연구의 1차 사료처럼 여겨지는 <조선서지> 및 한국에 관한 저술들은 개인의 것으로는 전무후무한 업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 모리스 쿠랑 ; → 《조선서지》)
※ 참고문헌 D. 부셰, 전수련 역, <한국학의 선구자 모리스 쿠랑>, 《동방학지》 52, 1986/ 이희재, <모리스 쿠랑과 韓國書誌에 관한 고찰>, 《論文集》 28, 숙명여자대학교, 1988. 〔李載載〕
쿠랑, 모리스 (1865~1935)
Courant, Maurice
글자 크기
11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