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프랭, 프랑수아 (168~1733)

Couperin, Franço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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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프랭.

쿠프랭.

프랑스의 작곡가. 바로크 시대 하프시코드(harpsichord) 연주자. '대(大) 쿠프랭' (Couperin le Grand)으로 알려져 있다.
[배 경] 쿠프랭 가문은 바로크 시대 프랑스의 유명한 음악 가문이다. 이 가문의 초대 음악가는 마튀랭(Maturin
Couperin, 1569~1640)이며, 그의 아들 샤를 1세(Charles Couperin)는 생계를 위해 마을 수도원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였다. 샤를 1세는 루이(Louis Couperin, 1626?~1661)와 프랑수아(1631?-1708/7112), 샤를 2세(1638~1679) 등 3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리고 샤를 2세의 외아들이 큰아버지이자 대부(代父)인 프랑수아의 이름을 따서 역시 프랑수아라고 불렸는데, 이로써 음악사에 프랑수아 쿠프랭이라는 음악가가 두 사람 있게 되었다. 루이가 쿠프랭 가문에서는 최초로 생제르베(Saint Gervais)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면서 대대로 그 직책을 이어받게 되었다. 둘째인 프랑수아 역시 오르간 및 바이올린 연주자였다고 하는데, 외형상으로는 주로 첨발로 연주를 하였고 인정받는 교사였다. 32세에 마들렌(Madeleine Joutteau)과 결혼하였으나 자녀 없이 아내가 죽자, 45세
에 루이즈(Louise Bongard)와 재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 막내인 니콜라(Nicolas Couperin, 1689~?)가 가문의 음악가 전통을 이었다. 셋째인 샤를 2세는 형의 뒤를 이어 생제르베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고, 그 직책을 몇 년의 공백이 있은 뒤에 외아들 프랑수아가 물려 받았다.
〔생 애〕 프랑수아 쿠프랭, 즉 대 쿠프랭은 1668년 11월 10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미 음악적 재질을 인정받았으며, 아버지 샤를 2세와 큰아버지이자 대부인 프랑수아에게 음악 교육을 받았다. 11세에 아버지가 별세하자 가족과 친분이 있던 토믈랭(J. Thomelin)이 그의 교육을 맡았는데, 그는 이미 명망 있는 오르간 연주자였으며 1678년부터는 왕실 지정 오르간 연주자 4명에 속하였다. 1685년 17세의 프랑수아는 생제르베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직을 계승하였다. 처음에는 절반의 급료를 받고 시작했지만 4년 뒤엔 급료 전액과 그 직책에 상응하는 각종 특전을 받았다. 1689년 마리안(Marie-Anne Ansault)과 결혼하여 1690년에 첫딸인 마리 마들렌(Marie-Madaleine), 1705년에는 둘째딸 마르그리트 앙투아네트(Marguerite-Antoinette), 1707년에는 아들 니콜라 루이(Nicolas-Louiis)를 얻었다. 첫째 아이를 얻은 직후인 1690년 11월에 쿠프랭은 작곡가로 등장하였다. 그는 6년간의 인쇄 면허를 받으면서 자신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2개의 오르간 미사곡을 출판하였다. <수도원을 위한 오르간 미사곡>과 <본당을 위한 오르간 미사곡>은 그레고리오 성가와 오르간 독주가 교대로 나오는 곡으로, 오늘날에도 음악 애호가들이나 오르간 연주자들로부터 매우 사랑받는 작품이다. 그리고 티틀루즈(J. Titelouze, 1563~1633)부터 시작되는 바로크 시대 프랑스 오르간 악파의 대표적인 곡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그는 계약서에 아버지의 신분 호칭인 '쿠프랭 드 크루이' (Couperin de Crouilly)라고 썼는데, 자신을 큰아버지인 프랑수아와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인지 혹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인지 불확실하다. 이후 더이상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귀족이 될 가능성을 얻으려는 마음에 1701년 귀족 문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1702년에는 귀족으로서 라트랑 훈장(Chevalier de I'ordre du Latran)을 받았다.
1693년 25세의 프랑수아는 토믈랭이 세상을 떠나 공석이 된 베르사유 궁전의 오르간 연주자 자리를 두고 벌인 경연에서 국왕과 친분이 두텁던 경쟁자를 물리쳤다. 4명이 1년을 넷으로 나누어 한 계절씩 맡아 연주하는 자리였다. 당시 베르사유 궁전은 1689년에 완성되었지만 성당에 오르간이 설치되지 않아 이동식 오르간(Positiv)으로 연주해야 하였다. 1711년 쿠프랭 말년에야 오르간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 기간 동안 오르간 곡을 작곡하지 않았다. 반면 생제르베 성당에는 5단 건반으로 된 거대한 오르간이 있었다. 물론 이 오르간도 쿠프랭 이전에 여러 번 보수되었으나, 1714년 티에리(F. Thierry)에 의해 이루어진 대대적인 보수는 쿠프랭의 감독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지위는 왕궁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곧 왕실의 음악 선생으로서 왕자와 공주들을 가르치며 '프랑스 어린이의 하프시코드 선생' (Maître de clavecin des enfants de France)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695년 이후 그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쿠프랭은 오르간 작품으로 첫 트리오 소나타를 1692년에 발표하였는데, 대개는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진 교회 소나타들이며 '코렐리풍' 으로 작곡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이탈리아식 하프시코드 곡들도 많이 작곡하였다. 한편 왕실 전례에서 사용하기 위해 당시로는 신식 협주곡 형식을 띤 라틴어 성악곡들도 많이 썼다. 라틴어 성악곡들은 칸타타 형식으로 많이 작곡되었는데, 명칭상 전통에 따라 '모테트' (motet)라고 불렸다. 그중 첫 곡이 1697년에 작곡된 <주님의 종들아 찬양하여라>(Laudate pueri Dominum, 시편 112)이다. 1703~1705년 사이에 여러 곡들이 인쇄되었는데, 합창 모테트 중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다. 확실한 날짜가 적힌 마지막 작품은 1714년에 작곡된 <야시경>(夜時經, Leçons de ténèbres)인데, 파스카 목요일에 하는 시간 전례의 세 야시경 중 첫째 야시경에 대해 작곡한 이 곡은 어느 수도원을 위하여 작곡된 듯하다. 아주 작은 편성은 아마도 신(新)이탈리아식의 가벼운 작곡 형식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궁정의 관례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국왕의 거동에 따라 여기저기로 끊임없이 자리를 이동하였고, 그에 따라 악단을 쪼개어 운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교회 음악 작품 가운데 합창단을 위한 미사곡은 단 한 곡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의 초기 세속곡 작품은 1696년 이후 당시 유행하는 형식으로 쓰여진 <엄숙한 노래>(Air serieux)와 <음주가> (a boire) 등만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세속적 성악곡들이 많이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세속 음악 분야에서는 성악곡보다 하프시코드에 심취하였다고 볼 수 있다. 4권으로 된 220여 곡의 《하프시코드 곡집》(Pièces de clavecin, 1713~1730)이나 1716년에 저술한 《하프시코드 주법》(L'Art de toucher du clavecin)은 연주법에 관한 책으로서, 당시의 운지법과 꾸밈음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으며 바흐(J.S. Bach, 1685~1750)도 이 책으로 공부하였다고 한다.
이후 쿠프랭의 삶은 특이한 것이 없다. 사람들은 바흐의 생애와 비슷한 점을 설명하기도 하는데, 그는 국왕과 교회를 위하여 일하고 또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의 연주 여행 이야기나 뛰어난 연주 소식도 전해지지 않는다. 음악적 몸짓이나 발레의 표현에 많은 재능이 있었다고 하는 쿠프랭이 오페라 분야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그는 당시의 풍습처럼 음악 학파를 모으지도 않았고 그다지 사교적이지도 못하였다. 오히려 자기 가족들과 함께 음악 연주를 즐기고 바흐처럼 작은 가족 합주단을 사랑하였다. 쿠프랭은 1733년 9월12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 가톨릭 음악)
※ 참고문헌  W. Mellers, 《GDMM》 2, pp. 484~498/ Die 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Barenreiter Verlag, 1989/ E. Higginbottom, 《NGDMM》 4, pp. 860~871. [白南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