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신학자.
〔생 애〕 쿤은 1806년 2월 19일 독일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의 배쉔보이렌(Wäschenbeuren)에서 태어났다. 1825~1830년까지 신학적 기본 방향을 잡아 준 튀빙겐 학파의 제1 세대 주역들인 드라이(J.S. von Drey, 1777~1853), 히르셔(J. Hirscher, 1788~1865), 묄러(J.A. Möhler, 1796~1838)의 지도를 받으며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을 배웠고, 1831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신학과 그리스도교 철학 연감》(Jahrbuch fiir Theologie und christlichen Philosophie) 공동 편집자가 되었으며, 동시에 기센(Giessen) 대학교 신학부의 신약 주석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는데, 이곳에서의 그의 교수 생활은 1832~1836년까지 지속되었다. 1837년에 튀빙겐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1839년부터 이 대학 가톨릭 신학부의 교의 신학 수업을 담당하였다.
튀빙겐에서 쿤은 신학자와 교회 행정가로서의 모습을 모두 보여 주었다. 1838년과 1839년에 역사적 예수에 관한 비판적 연구로 유명한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슈트라우스(D.F. Strauss, 1808~1874)와 인간 예수의 역사성에 관한 논쟁(Neologismus)을 벌인 이후, 쿤은 가톨릭 교회의 교도권을 분명하게 대변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교회의 교의를 철학적 · 이성적으로 정의하면서, 당시 교황청과 마찰을 빚고 있던 가톨릭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헤르메스(G. Hermes, 1775~1831)의 노선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쿤은 이 시기에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가톨릭 교리》(Katholische Dogmatik, vol. 4, 1846~1868)를 저술하는 한편, 초자연적 진리나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 대해 인간학적으로 기초하려 하였다. 초자연적 진리에 대한 이성적 근거를 찾고자 했던 가톨릭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컨터(A. Giinther, 1783~1863)와의 논쟁을 통해 쿤은 신스콜라주의자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교황 지상주의(Ultramontanismus)를 따르는 헤펠레(C.J. von Hefele, 1809~1893)와 함께 국가 교회의 지배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1848년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교황 지상주의 계열 정당이 와해되자, 쿤은 왕정을 후원하였고 귀족 칭호까지 받았다. 이후 그는 1848~ 1852년까지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지방 의회의 의원, 1850년부터 검찰청 위원 그리고 1868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역 귀족 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쿤은 또한 신학적으로도 부침을 거듭하였는데, 독일 가톨릭 대학에 관한 논쟁에서 철학과 일반 세속 학문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클레멘스(F.J. Clemens)에 반대하였고 독일 가톨릭 대학 설립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을 거부하였다. 1863년 뮌헨에서 열린 학술 회의에서 쿤은 신학부와 거리를 두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신스콜라주의와소위 독일 신학과의 화해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은총론에 관한 쉐츨러(K. von Schäzler, 1835~1888)와의 격렬하고 총체적인 논쟁에서 그는 자유주의 신학자로서의 모습을 드러냈으며, 이 논쟁 이후인 1869년부터는 신학적인 저술을 중단하였다. 그는 1887년 5월 8일 튀빙겐에서 세상을 떠났다.
〔평 가〕 큰이 정치적 · 신학적으로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긴 하였어도, 그가 고민한 신학적 문제 의식은 의미가 있었다. 그의 신학적 사고의 핵심은 철학과 신학의 내적 관계를 분명하게 설정한 후, 그 둘의 관계를 살피고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칸트(I. Kant, 1724~1804), 헤겔(G.W.F. Hegel, 1770~1831) 그리고 셀링 (F.W.J. von Schelling, 1775~1854)으로 대표되는 독일 관념론과의 논의 틀 속에서 교부학과 스콜라 전통을 계속 발전시키는 것이 그의 우선적인 관심사였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쿤은 신학의 기본 주제들을 전개하였다. 즉 철학과 신학의 내적 특성과 관계 규정을 통해 계시의 역사성과 교의의 역사적 발전, 세계 인식과 인격적 신앙, 역사 안에서의 계시, 그리고 교도권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중재 역할 등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조직 신학의 근간인 신론은 그의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또한 쿤은 비록 존재론적이지만, 보다 인격적으로 정향된 은총론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의 신학적 해석학은 독일 관념론에 바탕을 둔 이론적이며 반성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당대의 사상에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특히 자주 헤겔을 원용하면서, 실정성을 지닌 신앙의 역사적 기초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사색적이면서 동시에 역사 의식에 집중된 쿤의 사상은 19세기 독일 가톨릭 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 독일 관념론)
※ 참고문헌 B.-P. Dupuy, O.P., 《Cath》 4, pp. 1493~1497/ E. Naab, 《BBKL》 4, 1992, pp. 795~7981 J.R. Geiselman, Der Glaube an Jesus Christus Mythos oder Geschichte? Zur Auseinandersetzung J. E. Kuhns mit David Friedrich Strauss, 《ThQ》 129, 1949, pp. 258~277, 418~439/ 一. 《NCE》 8, 2003, p. 2531 F.A. Schlack, 《DThC》 8, pp. 2377~2379/ B. Welte, Beobachtungen zum Systemgedanken in der Tübinger katholischen Schule, 《ThQ》 147, 1967, pp. 40~59/ H. Wolf, 《LThK》 6, 1997, pp. 501~502/ 一, Ketzer oder Kirchenlehrer? Der Tübinger Theologe Johannes von Kuhn, Mainz, 1992/ - 《RGG》 4, 2001, pp. 1917~1918. 〔吳敏煥〕
쿤, 요하네스 에반젤리스트 폰 (1806 ~ 1887)
Kuhn, Johannes Evangelist v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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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