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의 북서 연안에 있는 키르베트 쿰란(Khirbet Qumran, 아랍어로 '쿰란 유적지' 라는 뜻), 라스 페쉬카(Ras Feshkha)와 근처 동굴들에서 고고학적 · 문헌적 증거를 남긴 공동체.
〔발견과 고고학적 발굴〕 1947년 쿰란 부근의 11개 동굴에서 '쿰란 문서' 라고 불리는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들이 발견되었다. 이 발견은 쿰란 유적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1951~1956년까지 예루살렘 성서 및 고고학 연구소(École Biblique et Archéologique Française de Jérusalem)와 요르단 문화재 관리국에 의해 키르베트 쿰란과 남쪽으로 3km 떨어진 라스 페쉬카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졌다.
쿰란에서는 기원전 8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쿰란은 여호수아서(15, 61-62)와 구리 두루마리(3Q15)에서 "스가가" (סְחָכָה)라고 불리는 곳이다. 고고학적 탐사의 책임자인 드보(R.G. de
Vaux, 1903~1971)에 따르면, 기원전 8~6세기경까지 쿰란은 이스라엘의 작은 거주지였다. 이곳에 사람들이 다시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50년경부터이다. 드보는 기원전 150~ 100년경까지를 Ia 시기, 기원전 100~31년까지를 Ib 시기로 구분하였다. 특히 Ib 시기 중에 쿰란의 주거지 형태가 결정되었고, 다양한 구조물들이 건축되었다. 즉 대규모의 모임 장소와 식당, 토기 작업장, 사본의 제작과 필사를 위한 필사실, 물 저장소, 수로 등이 만들어졌다. 이 Ib 시기는 유대교 역사가인 요세푸스(F. Josephus, 37/38?~100?)의 저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기원전 31년의 큰 화재와 지진으로 끝났을 것이다. 기원전 4년경 헤로데 대왕(Herodes Magnus, 기원전 37~4)의 아들 헤로데 아르켈라오(Herod Archelaus, 기원전 22~서기 18?)의 통치 기간에 다시 쿰란에 사람들이 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서기 68년 로마 군대에 의해 쿰란이 파괴될 때까지를 고고학적으로 Ⅱ 시기로 구분한다. 그 후 쿰란은 로마 군대의 주둔지가 되었는데 이는 Ⅲ 시기이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쿰란의 거주지 구조는 여러 사람의 공동 생활에 매우 적합하였음이 입증되었다. 즉 쿰란은 어떤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였고 거주자들은 쿰란 주변의 천막과 동굴에서 생활하였을 것이다. 쿰란에서는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개의 우물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쿰란 거주지에서 동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서 1,100기 정도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이 공동 묘지에서 발굴된 유해는 대부분 남자의 것이고 머리가 남쪽을 향해 매장되어 있었다. 그 부근에서는 어린이와 여자의 유해도 약간 발견되었다. 한편 키르베트 쿰란과 라스 페쉬카에서 발견된 토기와 다른 유적물들은 동일한 시기의 것인데, 이는 동일한 공동체의 사람들이 이 두 지역에 살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리고 쿰란 주변의 동굴에서 발견된 토기와 같은 형태가 쿰란 거주지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쿰란 거주지에서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주된 시기는 사본의 제작 및 필사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데, 이것은 기원전 2세기 중반에서 서기 68년까지 쿰란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쿰란 문서를 남긴 사람들이라는 증거이다. 따라서 쿰란 공동체란 키르베트 쿰란, 라스페쉬카와 근처 동굴들에서 고고학적 · 문헌적 증거를 남긴 공동체를 가리킨다.
〔쿰란 공동체의 정체〕 쿰란 문서의 발견과 쿰란 유적지의 발굴 이후 쿰란 공동체의 정체에 대한 다양한 가설들이 제기되었다.
에세네파 가설 : 쿰란 문서가 발견된 이후 베르메스(G. Vermes), 밀릭(J.T. Milik), 크로스(F.M. Cross) 등은
쿰란 공동체와 쿰란 문서의 주인공을 에세네파(Esseni)와 동일시하였다. 쿰란 문서의 발견 이전에 에세네파에 대한 정보는 필로(Philo Judaeus, Philo of Alexandria, 기원전 15/10~서기 45/50), 요세푸스, 소(小) 플리니우스(Pinius Minor, 61/62~113?) 등의 문헌에서 유래한다. 이 고전적 사료들이 보도하는 에세네파에 관한 내용과 쿰란 문서에 묘사되어 있는 공동체의 조직, 생활, 사상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기에 쿰란 공동체에 대한 에세네파 가설은 쿰란 연구자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가설은 쿰란 공동체의 기원에 관한 슈테게만(H. Stegemann)의 초기 저작들에서 처음 등장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쿰란 공동체는 하시딤(Hasidim) 중에서 정의의 스승을 따르던 에세네파의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슈테게만은 최근 그의 에세네파 가설을 수정하였다. 그는 정의의 스승을 '제2차 성전 시기의 유대인 연합' 의 창시자로 간주하였다. 당시 성전과 대사제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을 결집하려 하였는데, 고전적 저술가들이 이 연합을 에세네파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슈테게만에 따르면, 쿰란 유적지와 그 주변의 동굴들 및 라스 페쉬카 등은 기원전 2세기 말경부터 이 연합에 의해 사본의 생산 · 보관 · 연구를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수정은 처음의 에세네파 가설만큼 많은 지지를 받지는 못한다.
그로닝겐 가설 : 이 가설은 네덜란드의 그로닝겐(Groningen) 대학교 교수로 있던 가르시아 마르티네스(F. Garcia Martinez)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그는 에세네파 운동의 기원과 쿰란 공동체의 기원을 서로 구별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에세네파 운동이 팔레스티나의 묵시 문학 전통에서 생긴 것이라면, 쿰란 공동체는 에세네파 운동 내부에서 갈려 나온 정의의 스승을 따르던 그룹이 쿰란으로 가면서 생겨난 것이다. 정의의 스승은 율법의 참된 해석을 계시받았다는 자의식을 가졌는데, 이것이 에세네파와 그들을 구별짓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반 데르 우데 (A.S. van der Woude)는 가르시아 마르티네스의 가설에 동조하면서, 하바꾹 주해(1QpHab)의 정의의 스승은 특정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대사제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하였다.
사두가이파 가설 : 쿰란 연구 초기에는 쿰란 공동체의 정체를 사두가이파로 주장하는 가설이 제기되었는데, 이 가설이 최근에 다시 등장하였다. 쉬프만(L.H. Schiffman)은 쿰란의 4QMMT에 등장하는 율법에 대한 관점들이 후대의 랍비 문헌에 나오는 사두가이파의 관점과 동일하다는 전제에서 쿰란 공동체를 에세네파가 아닌 사두가이파 와 동일시하였고, 에세네파가 사두가이파의 배경에서 발전하였다고 보았다. 사실 쿰란 문서와 랍비 문헌에는 바리사이파의 반대자로 등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공통점이있다. 그러나 이것이 쿰란 공동체를 사두가이파와 동일시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더욱이 고전적 저술가들과 쿰란 문서가 전하는 에세네파의 종교 사상과 사두가이파의 종교 사상 사이에는 차이점이 상당히 많다.
예루살렘 가설 : 쿰란 유적지와 쿰란 문서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는 가설도 제기되었다. 골브(N. Golb)는 쿰란 거주지에 어떤 종교 공동체가 살았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것은 단지 군사 요새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쿰란 문서는 에세네파의 작품들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기원하였다고 하였다. 즉 서기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직전에 예루살렘 성전의 서고에 있는 문헌들과 개인 소장의 문헌들이 사해 부근의 동굴들에 숨겨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고고학적 · 문헌적인 증거들은 이 가설의 허점을 밝혀냈다. 쿰란 문서들은 분명히 특정 공동체의 생활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 그리스도교 가설 : 쿰란 사본의 배후를 유대 그리스도교와 동일시하려는 다양한 형태의 가설이 등장하여 대중과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아 왔다. 그러나 이 가설은 잘못된 연대 추정에 기초한다. 쿰란 문서를 제작 · 필사하고 쿰란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았던 사람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한 세기 이상의 연대기적 차이가 있다.
기타 가설 : 훔베르트(J-B. Humbert)와 같은 학자는 고고학적 증거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였다. 즉 쿰란 거주지는 두 단계를 거쳐 다른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본래 쿰란에는 하스모네 왕가의 별장이 있었는데(기원전100~31) 그 후에 에세네파의 제의적 중심지가 되었고(기원전 31~서기 68) , 에세네파들이 예루살렘 성전 대신 쿰란에서 제사를 거행하였으며, 그 흔적이 쿰란에서 발견된 동물의 뼈와 그릇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설
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었다. 첫째, 대부분의 그릇은 그가 언급한 에세네파의 점령 시기보다 앞선 시기에 제사를 위해 사용되었다. 둘째, 쿰란에서 제사가 거행되었다는 것은 제사에 대해 비판적으로 표현하는 쿰란 문서의 여러 구절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기원과 역사〕 쿰란 유적지와 주위 동굴들에서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았던 사람들을 에세네파나 최소한 에세네파의 한 그룹과 동일시하는 것이 현재 학계의 통설이다. 에세네파의 기원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기원전 2세기 초의 하시딤 운동이다. 하시딤은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기원전 166~160) 시기에 마따디아와 유다 마카베오의 지휘하에 모인 다양한 여러 그룹들 중 하나이다. 그들은 율법의 이름으로 헬레니즘과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기원전 175~164)에 반대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1마카 2, 29). "그때에 한 무리의 하시드인들이 그들과 합류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용맹한 전사들이며 모두 율법에 헌신하는 이들이었다"(1마카 2, 42). "한 무리의 율법 학자들이 알키모스와 바키데스에게 모여 가서 모든 것을 올바르게 처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스라엘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그들과 평화를 모색한 사람들이 바로 이 하시드인들이다" (1마카 7, 12-13). 하시드인들, 즉 하시딤은 마카베오 가문의 저항은 지지하였지만 그들의 정치 행태에는 비판적이었다. 결국 하시딤 운동은 정치적인 이유로 요나단 마카베오(기원전 160~143)의 통치 시기에 바리사이파와 에세네파로 분열되었다.
기원전 152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알렉산더 발라스(기원전 150~145)는 요나단 마카베오를 예루살렘 성전의 대 사제로 임명하였다(1마카 10, 15 이하). 요나단은 정통 대사제 집안인 사독 집안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정통 대사제를 쫓아내고 대사제직을 찬탈하였다.이때 쫓겨난 정통 대사제가 바로 쿰란 공동체의 창시자 인 정의의 스승이다. 요세푸스는 대사제 명단에서 기원전 159~ 152년 사이의 대사제를 언급하지 않았는데(《유대 고대사》 XX, 237), 이 시기의 대사제가 바로 정의의 스승이다. 그리고 그를 쫓아낸 요나단 마카베오는 쿰란 문서에서 정의의 스승의 반대자인 악한 사제로 불린다. 정의의 스승은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함께 유대 광야로 가서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1QS VIII, 12-16 ; Ⅸ, 19-21), 이것이 바로 에세네파의 쿰란 공동체의 시작이다(드보의 Ia 시기).
이 시기는 다마스커스 문헌이 말하는 20년의 방황(CDI, 9-11)과 일치한다. 즉 대사제 오니아스 3세가 죽고 메 넬라우스(Menelaus)가 대사제로 임명되자 하시딤이 하스모네인들에게 합류한 기원전 172년부터, 하시딤 안에 분열이 일어나 쫓겨난 대사제인 정의의 스승이 그를 따르는 그룹과 함께 광야로 간 기원전 152년까지의 20년과 일치한다. 이와 같이 쿰란 공동체는 정의의 스승이라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조직과 생활〕 쿰란 공동체의 조직과 생활에 대한 사료는 쿰란 문서와 고대 저술가들의 저작들이다. 이 두 사료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는 반면 차이점도 있다. 그리고 쿰란 문서들 사이에도 서로 상반된 내용들이 있다. 쿰란 공동체의 조직과 생활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이 두 사료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필수적이다.
쿰란 공동체는 쿰란 문서에서 자신들을 "공동체", "다수", "회중" , "빛의 자녀들" , "정의의 자녀들", "충실한 자녀들" "경건한 사람들" , "의로운 사람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등으로 표현한다. 공동체는 출애급 이후 광야에서 생활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모델로 하여 조직되었다. '광야' 라는 신학적 주제는 쿰란 공동체의 조직과 생활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즉 공동체는 율법 연구를 통해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광야로 가서 생활하였다. 한편으로 사제들과 레위인들, 또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 사람들로 나누어졌던 역사적 이스라엘을 따라 공동체는 1,000명, 100명, 50명, 10명 단위로 조직되었다.
위계적인 공동체 안에서 사제들이 공동체 생활 전반에 걸쳐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사제들은 쿰란 문서에서 "사독의 아들들" 혹은 "아론의 아들들"이라고 불린다. 쿰란 공동체 규칙서는 재산을 공유하는 독신자들의 공동체를 묘사하는데, 그들은 흰 옷을 입었고 공동 식사를 하였다. 공동 식사는 공동체의 생활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동 식사에 참여하는 것은 마치 성전의 구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쿰란 공동체에서 공동 식사의 중요한 두 구성 요소는 빵과 포도주이다. 따라서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것과 동일한 정결의 수준이 공동체에 요구된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식사에는 높은 수준의 정결을 유지하는 정식 회원만이 참석할 수 있다.
쿰란 공동체는 정기적으로 정결례를 위한 침수 예식을 거행하였다. 공동체는 이 예식을 통해 자신의 정결과 거룩함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것은 문헌적인 증거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인 증거들에서도 입증된다. 즉 쿰란 공동체의 유적지에서는 제의적 정결 예식에 필요한 정교한 수리 시설과 정결 예식을 위한 물 웅덩이 등이 발견되었다. 쿰란의 침수 예식이 당시의 다른 유대 그룹들과 구별되는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쿰란 공동체는 침수 예식이 어떤 이유로 혹은 어떻게 행해졌느냐보다는, 오히려 침수자의 내적 상태를 강조한다. 즉 침수 예식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침수자의 마음과 영혼이 올바르고 겸손한 상태여야 한다. 침수자는 악과 불순종의 길에서 떠나 하느님에게로, 이웃에게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1QS I, 9-10 ; IV, 2-6). 회개와 영혼의 올바른 상태가 침수 예식을 효과적으로 만들고, 공동체의 다른 거룩한 의식들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외적 정결을 제공한다. 둘째, 쿰란의 침수 예식은 공동체 입문과 관련이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쿰란 공동체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지원자가 경험해야 하는 다양한 과정은 쿰란 문서의 공동체 규칙서(1QS Ⅵ)와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Ⅱ, 8)에 서술되어 있다. 지원자는 공동체의 중요한 교리와 올바른 행동을 교육받는 예비 기간을 거친다. 2년간의 교육과 검사 기간을 거친 지원자는 오순절에 거행되는 공동체의 계약 갱신 의식 중에 더 높은 차원의 침수 예식을 통해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진다(1QS Ⅱ, 19-26 ; V, 20-24 ; VI ; 4Q266, 11. 17). 즉 공동체의 정식 회원으로서 공동 식사를 포함한 공동체의 모든 의식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다(1QS VI, 21-23). 이 입문적 침수 예식이 다른 일상적인 침수 예식과 다른 점은 전체 공동체가 그것을 증거하고 인정한다는 점이다.
쿰란 공동체가 매년 거행한 축제들 중에서 오순절은 가장 중요한 축제였다. 이 축제 동안 계약에 따른 입문과 통과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 의식에는 공동체의 회원과 공동체의 참사회가 입회를 허용한 사람들만이 참여하였다. 역대기 하권 15장 10-14절에 언급된 오순절 축제는 매년 셋째 달에 거행되었으며, 계약을 갱신하는 의식이 중심을 이루었다. 쿰란 공동체는 이 계약에 따른 입문과 통과 의식을 통해 공동체의 일치와 유대교의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반대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매년 오순절에 계약 갱신 예식과 함께 거행되었던 입문 성격을 가진 침수 예식의 기능과 신학은 여러 문서(1QS Ⅱ, 25-III, 12 ; V, 7-15 등)에서 발견된다.
한편 쿰란 문서에서는 공동체의 조직과 생활에 대한 다양한 내용들이 발견된다. 공동체 규칙서는 여자나 가족 생활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독신자 공동체를 반영하지만, 다마스커스 문헌과 메시아 규칙서는 여인과 어린이들이 생활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언급한다. 공동체 규칙서는 재산의 공유를 묘사하지만, 다마스커스 문헌은 사유 재산에 대해서도 말한다.
〔종교 사상〕 쿰란 공동체는 유대 전통에 충실하고 율법에 철저하고자 하였던 유대인들의 공동체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참된 이스라엘, 남은 자, 새로운 계약의 공동체,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로 이해하였다. 그들의 출발점은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이었는데, 이에 대한 정의의 스승의 해석은 특별한 권위를 가졌다. 쿰란 공동체는 자신들에게 하느님의 비밀이 특별히 계시되었다고 여겼고, 사제들의 성서 해석을 충실히 따랐다. 율법의 엄격한 준수는 특히 정결례에 대한 공동체의 특별한 관심에서 잘 드러난다.
쿰란 공동체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예정론을 따랐다. 하느님은 역사와 인간의 운명과 미래를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관상학과 점성술에 대한 문서들이 쿰란에서 발견된 것에서도 입증된다. 예정론적 사고는 이원론과도 관련이 있다. 쿰란 문서의 여러 사본들에서 선과 악, 빛과 어둠, 진리과 거짓, 정의와 불의 등의 이원론이 발견된다. 특히 선한 영과 악한 영에 대한 가르침이 대표적이다(1QS Ⅲ, 13-IV, 26). 쿰란 공동체는 자신을 빛의 자녀들로 여겼고, 악한 영이 지배하는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곤경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종말에 마지막 승리를 거둔다고 여겼다.
쿰란 공동체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성전의 제사도 거부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공동체의 기원 및 초기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들은 정통성 없는 대사제로 말미암아 성전이 더럽혀졌고, 그로 인해 성전의 제사도 무효해졌다고 간주하였다. 그리고 전통적인 태양력을 버리고 이방인의 달력을 따르는 것도 비판하였다. 쿰란 공동체는 자신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대신한 것으로 여기고, 기도와 거룩한 생활로 성전의 제사를 대신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이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희생 제사라고 이해하였다. 그리고 공동체의 공동 식사가 성전에서의 제의적 식사를 대신하였다. 이렇게 쿰란의 공동체는 종말에 새로운 성전이 세워질 때까지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한다.
기도는 공동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기도와 찬양은 하느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사였다. 공동체는 하루에 두 번씩 정해진 시간에 공동 기도를 바쳤는데, 그들은 공동체의 전례를 통해 천상 천사들의 전례에 참여한다고 이해하였다.
쿰란 공동체는 자신들이 마지막 때를 살고 있다고 믿었으며, 하느님의 심판과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였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묵시 사상은 그들의 메시아 사상에서 잘 드러난다. 그들이 기다린 종말론적 인물은 예언자, 정치적인 왕인 이스라엘의 메시아, 대사제인 아론의 메시아였다. 이처럼 쿰란 메시아 사상의 특징은 두 메시아 사상이다. 쿰란 공동체는 구약성서의 '다윗의 아들' 전승에 따라 왕으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그는 "메시아" 즉 "이스라엘의 메시아", "다윗의 후손" , 그리고 "공동체의 우두머리" 등으로 지칭되며, 마지막 날에 적들로 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아이다. 쿰란 공동체의 에세네파는 이스라엘의 해방과 이상적인 하느님 백성의 승리라는 예언과 약속이 실현되기를 기다렸다. 이처럼 쿰란의 메시아 사상에서 '다윗의 아들' 과 관련된 구약의 전승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동시에 쿰란 공동체는 대사제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렸다. 그는 종교적인 대사제로서 "아론의 메시아" , "율법의 해석자" 등으로 불린다. 종교적 메시아는 정치적 메시아보다 우선권을 가진다. 그리고 "정의를 가르칠 자" (CD VI, 11)는 대사제로서의 메시아인 동시에 마지막 날에 정의를 가르치고 율법을 올바르게 해석할 참된 예언자이다.
종말에는 의인에 대한 보상과 악인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진다. 40년에 걸친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 사이의 종말론적 전쟁을 통해 악인들이 심판을 받은 이후 구원과 평화의 시대가 오며 죽은 이들이 부활한다. 특히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명시적인 표현(4Q521)이 쿰란 문서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이 쿰란 공동체의 중요한 종교 사상인 새로운 계약 공동체, 예정론과 이원론, 성전 비판과 성전으로서의 공동체 이해, 제사를 대신하는 기도와 공동 식사, 메시아 사상과 종말론 등은 고대 유대교뿐만 아니라 초대 그리스도교 연구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 쿰란 문서와 신약성서의 관계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두 문헌의 역사적 · 문학적인 연관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왔고, 두 문헌의 생성 배경인 쿰란 공동체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와의 관계에도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리고 이 두 공동체 사이의 다양한 유사점뿐만 아니라 분명한 차이점들도 강조되었다. 특히 신약성서의 인물들, 즉 세례자 요한, 예수, 야고보 등이 쿰란 공동체와 어떤 관계가 있었는가에 대한 가설들이 제기되곤 하였지만 이 인물들이 쿰란 공동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입증할 만한 그 어떤 증거도 없다. (⇦ 에세네파 ; 쿰란 ; → 고고학, 성서의 ;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 ; 사두가이파 ; 사해 ; 유대교 ; 이스라엘 ; 쿰란 문서 ; 하시딤)
※ 참고문헌 J.T. Milik, Ten Years ofDiscovery in the Wildemesss of Judaea, London, SCM Press, 1959/ A. Dupont-Sommer, Les écrits esséniens découverts près de la mer Morte, Paris, Payot, 1959/ R. de Vaux, Archaeology and the Dead Sea Scrolls, London, Oxford Univ. Press, 1973/ E.-M. Laperrousaz et al.,《DBS》 9, pp. 737~1014/ D. Dimant, Qumran Sectarian Literature, M.E. Stone ed., Jewish Writings of the Second Temple Period : Apocrypha, Pseudepigrapha, Qumran Sectarian Writings, Philo, Josephus, Assen, Van Gorcum, 1984, pp. 483~550/ G. Vermes · M.D. Goodman eds., The Essenes According to the Classical Sources,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89/ J.A. Fitzmyer, Responses 10 101 Questions on the Dead Sea Scrolls, New York, Paulist, 1992/ J.J. Collins, Dead Sea Scrolls,《ABD》 2, pp. 85~101/ ──, Essenes, 《ABD》 2, pp. 619~626/ J. Murphy-O'Conor, Qumran,《ABD》 5, pp. 590~594/ H. Stegemann, Die Essener, Qummran, Johannes der Taufer und Jesus, Freiburg, Herder, 1993/ ──, The Library of Qumran : On the Essenes, Qumran, John the Baptist, and Jesus, Grand Rapids, Eerdmans, 1998/ J.C. VanderKam, The Dead Sea Scrolls Today, Grand Rapids, Eerdmans, 1994/ F.M. Cross, The Ancient Library of Qumran, Minneapolis, Fortress, 19953/ L.H. Schiffman, Reclaiming the Dead Sea Scrolls, New York, Doubleday, 1995/ A. Lange · H. Lichtenberger, Qumran, 《TRE》 28, pp. 45~79/ H.-J. Fabry, Qumran, 《LThK》 8, 1999, pp. 778~785/ G. Vermes, An Introduction to the Complete Dead Sea Scrolls, Minneapolis, Fortress, 1999/ E. Ulrich, The Dead Sea Scrolls and the Origins of the Bible, Grand Rapids, Eerdmans, 1999/ T.S. Beal, L.H. Schiffman · J.C. VanderKam eds., Essenes, Encyclopedia of the Dead Sea Scrolls, vol. 1, Oxford, Oxford Univ. Press, 2000, pp. 262~269/ D. Dimant, Qumran : Written Material, Encyclopedia ofthe Dead Sea Scrolls, vol. 2, pp. 739~746/ Ch. Hempel, Qumran Community, Encyclopedia of the Dead Sea Scrolls, vol. 2, pp. 746~751/ F. Mébarki · E. Puech, Les manuscrits de la mer Morte, Rodez, Rouergue, 2002/ A. Lange, Qumran,《RGG》6, 2003, PP. 1873~1896. 〔宋昌炫〕
쿰란 공동체
─ 共同體
〔영〕Qumran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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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란 문서가 발견된 동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