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토마스. 한국명은 구인란(具仁蘭). 제2대 춘천교구장. 주교. 1896년 9월 13일 아일랜드의 티퍼레리(Tipperary) 주에서 출생한 그는 성 요셉 신학교와 성 패트릭 신학교를 거쳐 1918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본부가 있는 달간 파크(Dalgan Park)로 가서 선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2월 2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서품된 직후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14년 동안 중국 전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당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던 골롬반회는 새로운 선교지로의 진출을 모색하였고, 1933년 6월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의 요청을 받아들여 마침내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이에 같은 해 10월 29일 맥폴린(O. McPolin, 林) 신부 등 10명이 입국하여 주로 전라도와 제주도 서쪽의 선교 를 담당하였고, 퀸란 신부도 1934년 6월 한국에 입국하여 6년간 전라도 일대에서 사목 활동을 펴며 이 지역의 교세를 크게 신장시켰다. 사거리 준본당의 초대 주임(1934~1937)을 맡은 그는 여러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협조를 얻어 부지를 매입하고 기금을 마련한 후, 1935년 6월에 목조로 된 40여 평의 성당을 신축하여 맥폴린 광주 지목구장의 주례로 봉헌식을 가졌다. 또한 관내의 8개 공소를 분주하게 돌며 성무를 집행하는 등 본당 설정을 위한 기초를 탄탄히 닦아 나가고, 장성 등 다른 지역에도 본당을 설립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후 광주의 첫 본당인 광주(현 북동) 본당의 보좌 신부와 4대 주임(1937. 4~10)으로 있으면서 1937년 10월 2일 벽돌조의 현 성당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다음해 6월에 완공한 후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38년 교황청은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강원도 지역 사목을 위임하였고, 이에 골롬반회는 퀸란 신부와 브렌난(P. Brennan, 安) 신부를 사목자로 선정하여 보고하였다. 1939년 4월 25일에 강원도는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되어 춘천 지목구가 되었고, 1940년 12월 퀸란 신부는 춘천 지목구장이 되어 9,000명의 신자와 11개 본당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퀸란 신부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지목구장직을 사임한 후 춘천 감옥에 갇혔다. 1942년 아일랜드의 중립적 위치가 인정됨에 따라 각자 자기 본당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사목 활동은 금지된 채 가택 연금되었다. 광복 후 다시 지목구장에 부임하였으나, 38선을 경계로 국토가 양분됨에 따라 춘천 지목구의 3분의 1이 북한으로 편입되어 신자가 3,000명에 달할 정도로 번창하던 세 본당을 모두 잃게 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 지 1주일 만인 7월 2일에 미사를 드리던 퀸란 신부는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춘천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 후 7월 16일 밤 기차에 태워져 서울로 후송되었고, 다음날 저녁에 다시 기차를 통해 사흘 만인 21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9월 5일까지 구금되었다가 그 뒤로 만포, 고산을 지나 중강진까지 모두 250리의 산길을 걷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 을 하였는데, 영하의 날씨에 길에서 숙식을 하며 행군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제와 포로들이 사망하였다. 1953년 4월에 중강진 수용소에서 석방된 그는 시베리아와 모스크바를 거쳐 기적적으로 아일랜드에 생환하였다.
1953년 10월 주한 교황 사절 서리 겸 춘천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4월 22일 한국에 돌아온 퀸란 신부는, 1955년 9월 20일 춘천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자 10월 3일자로 춘천 대목구장직을 맡게 되었으며, 성 골롬바노 축일인 그해 11월 23일 명동 성당에서 주교로 축성되었다. 1957년 12월 람베르티니(E.R. Lambertini) 대주교가 3대 한국 교황 사절로 임명되자, 퀸란 주교는 교황 사절로서의 임무를 마치게 되어 10월에 춘천 대목구 주교관으로 돌아온 후 대목구 활성화에 전력을 기울였다. 1960년 1월 3일 주교령으로 춘천의 27개 지역이 준본당으로 설정되었고, 이어 1962년 3월 10일 교황청 포교성성령에 의해 한국에 정식 교계 제도가 확립되자 춘천도 정식 교구가 되어 7월 26일 퀸란 주교의 교구장착좌식이 주교좌 본당인 죽림동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퀸란 주교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톨릭대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학교를 운영할 수도회를 물색하였고, 마침내 춘천에 여자대학을 설립하겠다는 성심 수녀회의 동의를 얻었다. 이에 부천시 원미구 역곡2동 산 43-1에 학교 부지를 마련하고, 포교성성의 도움과 춘천 교구의 막대한 재정 지원을 받아 1964년 3월 춘천에 성심여자대학교(현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를 설립하였다. 이처럼 전란으로 폐허가 된 춘천교구를 12년 동안 맡아 헌신적으로 재건한 결과 8,000명의 신자가 50,000명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1957년 철원 · 학성동 · 정선, 1958년 간성 · 북평 · 문막 · 울진, 1959년 김화, 1960년 원주단구동, 1961년 장성, 1962년 양덕원, 1965년 화천과 평창 등에 본당을 개설하는 등 30여 개의 본당을 세우고 약 150개의 공소를 설립하였으며, 춘천에 이어 삼척과 강릉 등지에도 병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965년 2월 22일에는 원주교구를 분할 · 독립시키는 성장을 이루기도 하였다.
1966년 2월 11일 퀸란 주교는 70세의 노령으로 은퇴하여 자신이 지은 성모회 수련원에서 기거하다가, 1968년 삼척의 성내리(현 성내동) 본당 내에 자신이 세우고 골롬반 외방선교 수녀회가 운영하는 성 요셉 의원으로 이사하였다. 여기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사목 활동을 하면서 말년을 보내던 중 극도의 심장 허약 증세 끝에 1970년 12월 31일 선종하였다. 유해는 1971년 1월 4일 성내리 본당 뒤뜰에 안장되었다가, 1972년 4월 춘천 죽림동 주교좌 본당 구내의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었다. (→ 가톨릭대학교 ; 골롬반 외방선교회 ; 광주대교구 ; 춘천교구 ; 한국 전쟁)
※ 참고문헌 <가톨릭신문>/ 《경향잡지》 《가톨릭 사전》 최형락편, 《장성 천주교 五十年史》, 천주교 장성 교회, 1987/ 춘천교구 50년사 편찬위원회, 《춘천교구 50년사》, 천주교 춘천교구, 1989/ 《광주대교구 50년사, 1937~1987》, 천주교 광주대교구, 1990/ 죽림동 본당 70년사 편집위원회, 《죽림동 본당 70년사》, 천주교 죽림동 교회, 1990/ 원주교구 30년사 편찬위원회, 《原州教區 三十年史》, 천주교 원주교구, 1996/ 《월산동 성당 35년사, 1964~1999》, 천주교 월산동 성당, 1999/ Missionary Society of Saint Columban, Those who journeyed with us(Deceased Columbans 1918~1999), Missionary Society of St. Columban, 2000/ Jeremiah F. Kelly, The Splendid Cause 1933~1983 -Fifty Years of Columban Outreach to the Korean People, Columban Fathers, 1984. 〔崔先惠〕
퀸란, 토마스 (1896~1970)
Quinlan, Tho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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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란 제2대 춘천교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