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후고. 한국명은 기후근(奇厚根) . 미국 미네소타 주의 미네아 폴리스(Minneapolis)에서 1899년 8월 11일에 출생하였다. 메리놀 외방전교회 신학교와 워싱턴 가톨릭대학을 졸업한 뒤, 1925년 5월 31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1925년 10월에 5명의 동료 선교사와 함께 한국에 입국하여 메리놀회 모리스(J.E. Morris, 睦怡世) 신부가 4대 주임으로 사목하던 평안남도 영유 본당의 한국어 학교에서 장면(張勉, 요한) 박사에게 한국어를 배웠다. 평양 지목구 설정의 책임을 맡은 번(J.P. Byrne, 方溢恩) 신부와 모리스 신부가 1926년 5월에 은산 본당을 설립하였고, 크레이그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928년 8월에는 은산 본당을 새로이 성장하는 지역인 순천읍으로 이전하였고(순천 본당), 이어 읍내 중심지인 관상리 일대를 매입하여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크레이그 신
부는 1933년까지 사목하며 본당을 크게 성장시켜 20여 개의 공소와 신자 총수 600여 명을 확보하였다.
1933년 휴가차 본국에 귀국하였다가 돌아온 뒤, 1935년 신의주 본당 5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여 야학을 설치, 문맹 퇴치에 힘쓰고 그해 7월에 큰 홍수가 닥치자 수재민 구호와 의료 활동에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아울러 신자들의 영성을 이끌고 교세를 확장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전개한 결과, 1937년에는 성인(成人) 영세자가 485명, 예비자는 400명에 이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40년에 마전동 본당 3대 주임으로 부임해서도 즉시 야학을 개설하여 포교에 힘썼다. 그러나 1941년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수녀 전원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분원 수녀 2명까지 모두 신의주 경찰서에 연행 · 감금되었으며, 1942년 6월 다른 메리놀회 선교사들과 함께 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광복 후 크레이그 신부는 1948년 한국에 다시 입국하여 6월에 서울 혜화동 본당 5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해 8월에 교통 사고를 당해 두어 달 미국에 치료차 머문 뒤, 11월 중순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12월 18일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의 비서로 임명되었다. 1950년 6월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10월에 유엔군과 함께 북진하였다가 평양이 수복되고 이어서 안주 지방도 탈환되자 평양 대목구 안주 본당에서 사목 활동을 폈으며, 1950년 12월 중공군 개입에 따른 유엔군의 후퇴로 남하하여 1953년까지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군종 신부로 활동하였다. 그는 덕원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출판한 《신약성서》를 일본에서 다량 수입하여 포로가 된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도움을 주었으며, 부산과 거제 수용소에 갇혀 있는 많은 포로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러한 사목 활동을 하는 가운데 1950년 6월 번 주교의 권유로 한국에서 '통신 교리' 를 시작하였는데, 이후로 통신 교리는 많은 열매를 맺어 복음화의 중추로 성장하였다.
1954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 사무국장을 거쳐, 1955년 10월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 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대지를 매입하고 성당과 사제관을 건축함으로써 성장의 기초를 닦았으며 1957년 2월까지 봉직하였다. 그리고 옥천 본당 9대 주임 신부 재임기(1957. 3~1960. 2)에는 황간 본당과 청산 본당 등을 분리 · 설립 하였다. 1960년 9월 1일자로 감곡 본당이 운영하던 매괴상업고등학교(현 매괴여자중 · 상업고등학교)의 4대 교장 으로 부임하여 1961년 12월 31일까지 재임하였다. 1963년 9월에 인천교구 용현동 본당에 부임하여 1966년 10월까지는 초대 주임으로, 그 이후 1968년 3월까지는 보좌 신부로 있었다. 당시 용현동 지역은 주거 환경이나 경제 기반이 매우 열악하였기 때문에, 크레이그 신부는 미국에서 모금한 돈과 교구 지원금으로 본당을 운영하였다. 1968년 3월부터 1973년 12월까지는 고잔 본당의 2대 주임을 맡아 1968년에 고잔동 일대 410평의 땅을 매입하여 본당 부지로 삼았고, 이듬해 다시 370평을 매입하여 본당 부지를 확장하였다. 이처럼 크레이그 신부는 메리놀회 관할의 청주 · 인천교구의 각지에서 사목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1973년 12월 8일에 은퇴하였지만, '사제는 은퇴하면 죽는다' 는 소신에 따라 본당 사목 활동을 지원하였다. 1980년 12월 7일 서울 옥수동 본당에서 저녁 미사를 집전하고 사제관으로 돌아오던 길에 실족한 뒤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56년간의 사제의 삶을 마감하고, 1981년 1월 9일 명동 성모병원에서 81세의 나이로 선종하여 인천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 군종교구 ; 메리놀 외방전교회 ; 청주교구 ; 평양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인문>/《경향잡지》/《가톨릭대사전》/《The Field Afar》/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천주교 평양교구사》, 1981/ 이정순 엮음, 《목 요안 신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1994/ 백동 70년사 편찬위원회 편, <백동 70년사》, 천주교 서울대교구 혜화동 교회, 1997/ 군종교구사 편찬위원회, 《천주교 군종교구사(군사목 50년사)》, 천주교 군종교구, 2002. [崔先惠]
크레이그, 휴 (1899 ~ 1981)
Craig, Hugh
글자 크기
11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