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476~750)의 왕으로, 중세 초기에 대부분의 서유럽 지역을 지배하였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최초의 게르만족 출신 왕인 동시에 최초의 이방인 왕이었던 클로비스 1세의 세례는,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
〔생애와 업적〕 476년 게르만 군대에 의해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475~476)가 폐위되었을 때, 갈리아 대부분의 지역에는 게르만족의 소왕국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강력한 세력은 서고트 왕국과 클로비스의 아버지인 힐데리히 1세(2~481/482)가 투르네(Touma)를 중심으로 건설한 잘리어 프랑크 왕국이었다. 힐데리히는 비록 이교도였지만 자신의 통치 지역 내에 거주하고 있던 로마 제국의 지역 통치자들 및 주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466년경 투르네에서 출생한 클로비스는 481년 또는 482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15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 하였다. 이후 클로비스는 교활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의 탁월한 지략과 야만적이고 잔인한 전쟁을 통해 세력을 확장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투르네에서 남하하여 갈리아 북부 지방을 정복한 그는, 486년 수아송(Soissons)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갈리아의 마지막 로마인 통치자인 시아그리우스(Syagrius)를 격퇴하였다. 그로 인해 솜 강과 센 강 유역을 모두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 지역에 보관된 로마 제국의 막대한 재산을 얻었다. 493년경 가톨릭 신자인 부르군트 왕국의 클로틸드(Clotilde)와 결혼하였으며, 496년 라인 강 중류 지방에 정착한 알라마니족(Alamanni, Alemanni)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하였으나 톨비악(Tolbiac)에서 패배하였다. 506년에는 라인란트(Rhineland)에서 알라마니족 및 튀링겐족(Thüringen)과 전쟁을 하였으며, 507년에는 루아르 강 남쪽의 갈리아 지역에 사는 서고트족과 전쟁을 하였다. 그는 푸아티에(Poitiers) 근처의 부예 전투에서 아리우스주의를 믿는 서고트족으로부터 승리를 거두고 남쪽으로 더 진격하여 보르도(Bordeaux)를 점령함으로써 아키텐(Aquitaine)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클로비스는 이 전쟁을 '아리우스 주의에 대한 성전(聖戰)' 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어 서고트 왕국의 수도인 툴루즈(Toulouse)를 정복하게 하였지만, 셉티마니아(Septimania)에서 고트족을 몰아내거나 갈리아 남부 지역을 자기 백성의 정착지로 만들지는 않았다. 이후 투르(Tours)로 돌아간 그에게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아나스타시우스 1세(491~518)는 로마의 명예 집정관이란 지위를 수여하였다. 클로비스는 로마의 속주였던 갈리아 남부 지역을 방치하고 파리에 정착하였으며, 이곳에 12사도 성당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는 511년 11월 27일 파리에서 약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자신이 지은 12사도 성당에 안장되었다.그가 사망한 이후의 정복 사업은 그의 아들들에게 이어져 6세기 중반에 프랑크 왕국령이 형성되었다.
클로비스는 이른바 군사 군주제를 확립하여 직업 군인이 아닌, 군주의 요청에 따라 전쟁에 참여하는 자유민에게 승전 후 전리품을 분배하였다. 프랑크족은 법의 속인주의 원칙을 인정하였으며, 사법 제도는 자신이 행한 과실에 대해 배상금을 지불하는 속전(贖錢)의 개념을 기초로 하고있었다. 이러한 법령은 511년에 그가 반포한 《살리카 법전》(Lex Salica)으로 성문화되었다. 이 법전은 옛 살리카-프랑크족의 민족법을 기록한 것인데, 법률 문서라기보다는 정치적 선언문이다. 클로비스는 갈리아-로마 귀족들 특히 성직자들을 중용하였고, 로마의 행정 조직을 도입함으로써 프랑크 왕국 발전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개종과 그 의미〕 클로비스의 개종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투르의 그레고리오(Gregorius Turonensis, 538~594)가 기록한 《프랑크족의 역사》(Historia Francorum, 591)가 거의 유일하다. 물론 그 자료는 클로비스가 사망한 지 80년 후에 완성되었기 때문에, 프랑크 왕국의 주교들이 클로비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열심한 가톨릭 신자였던 두 번째 부인 클로틸드는 물론 프랑크 왕국 내의 성직자들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클로비스는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오랫동안 망설였다고 한다. 이는 아직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지 않았고 동쪽의 알라마니족, 남쪽의 서고트 왕국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프랑크 왕국 내부의 귀족 세력의 지원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클로비스는 496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랭스의 주교 레미지오(Remigius de Reims, 437?~533?)로 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의 세례 이유는 알라마니족과의 전투 중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기적적으로 승리하였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레고리오의 기록에는 클로비스가 세례를 통해 이전부터 앓고있던 나병을 치료받았다고 한다. 사실상 그의 개종은 우월한 로마 문화에 대한 동경심과 실리주의적 상황 판단 에서 기인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소수의 전사들을 이끌고 패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클로비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호의적인 정책을 통해 프랑크 왕국의 통치 구조를확립함과 동시에, 종교적 동질성을 통해 과거 로마 제국 주민들과의 정치적 · 사회적 유대 관계를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한편 당시 가톨릭 교회는 아리우스주의가 프랑크 왕국으로 전파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은 물론 프랑크 왕국과의 정치적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지녔던 레미지오 주교는 갈리아 교회의 보호와 게르만족에 대한 지속적인 선교를 위해 프랑크족을 야만인 집단이 아닌 협상의 대상으로 인식한 것이다. 결국 클로비스의 개종은 결코 우연적이거나 신비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클로비스는 개종 이후 3,000명의 프랑크 전사들은 물론 프랑크 왕국 백성 전체의 개종을 유도하였으며, 이를 통해 아키텐 지역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의 백성들은 개종 이후에도 여전히 이교도적인 풍습과 관념에서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는데, 이는 세례 전후의 준비 부족과 집단 세례가 내적인 회심을 이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교회 역시 프랑크족의 토착 신앙과 문화의 포기를 요구하는 강압적인 선교 정책보다는 그들의 문화적 전통을 인정하는 유화 정책이 중심을 이루었다. 하지만 프랑크족의 문화는 점차 그리스도교 문화와 융합됨으로써 새로운 그리스도교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프랑크족은 개종을 통해 가톨릭 신앙을 강력한 왕국의 근원으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의 승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결과로 인식하였다. 가톨릭 신앙은 모든 게르만 왕국들을 통일하고 강력한 프랑크 왕국에 내적인 견고함과 외적인 명성을 동시에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 로마 제국 영토 내에 아리우스주의를 기초로 게르만 대왕국을 건설하려던 동고트 왕국의 의도를 좌절시키는 '최대한으로 중요한 정치가적인 행위' 였다. 이로써 게르만의 정신과 고대 로마 제국의 문화가 그리스도교와 융합되는 것이 가능해졌고, 그리스도교적인 유럽의 탄생을 위한 전제가 형성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투르의 그레고리오는 클로비스를 '제2의 콘스탄틴 대제' 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의 세례가 지닌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당시 서유럽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대부분의 게르만족들이 아리우스주의를 따르거나 토착 신앙을 고수하던 상황에서, 최초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게르만족 왕인 클로비스를 통해 프랑크족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의 개종은 향후 교황권은 물론 동로마 황제와 그의 후계자들의 관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크 왕국이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 라는 위치를 확립하게 되는 출발점이었다. (→ 그레고리오, 투르의 ; 레미지오, 랭스의 ; 프랑스 ; 프랑크 왕국)
※ 참고문헌 Daniel Rivière, 최갑수 역, 《프랑스의 역사》, 까치, 1995/ Jean Carpentier 외, 주명철 역, 《프랑스 인의 역사》, 소나무, 1991/ August Franzen,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차용구, <클로비스의 개종을 통해서 본 그리스도교 신앙과 게르만 문화의 만남>, 《사목》 282호(2002. 7),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R.E. Sullivan, (NCE》3, pp. 809~811. [邊琪燦]
클로비스 1세 (466?~511)
- 一世
Clovis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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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랭스의 주교 레미지오로부터 세례를 받는 클로비스 1세(496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