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지방 손에루아르(Saône-et-Loire) 주(州)에 있는 클뤼니(Cluny)에서 910년에 설립되었으며, 10~11세기에 '클뤼니 개혁' (Cluniac reform)으로 불리는 수도 생활 개혁 운동의 중심이 되어 중세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의 교회 개혁에 공헌한 수도회.
〔역 사〕 배경 : 9세기에 이르러 세속 군주에 의한 수도원 세속화, 평신도 수도원장의 수도원 재산 남용, 왕권 약화에 따른 보호자의 상실, 이민족의 침입 등으로 수도회는 쇠퇴 일로를 걷게 되었다. 즉 첫째, 프랑크 카롤링거 왕조의 왕들은 수도원을 설립하여 수도원장을 임명하고 신하들에게 봉토로 수도원을 내주었다. 귀족들도 수도회를 설립하여 스스로 원장이 되거나 원장을 임의로 임명하는 등 설립자의 권리를 행사하였고, 탐욕스러운 귀족들은 수도자의 양식마저 빼앗아 갔다. 주교들은 칼체돈 공의회(451)의 법규(4조)에 의거하여 수도원 원장 임명과 재산 관리 및 수도원 업무에 간섭하면서 수도원 재산을 사유화하였다. 둘째, 평신도 수도원장들은 세상일을 떠나 수도 회칙에 따른 삶을 살지 않았을 뿐더러, 수도원의 재산과 수입을 자신의 가족 부양에 남용하였다. 셋째, 국왕들이 수도원을 설립하여 영토 확장을 위한 선교와 자국민의 계몽을 위한 교육을 수도자들에게 맡기자 수도원은 국왕의 보호 아래 국가 행정 조직의 일부가 되었기에, 왕국의 분열(843)에 따른 왕권의 약화는 수도원의 보호자 상실을 뜻하게 되었다. 넷째, 유럽 대륙은 845년 이후 북으로부터 바이킹(Viking)이라 불리는 노르만족(Noman)의 침략을 받았고, 896년부터는 동쪽의 마자르족(Magyar)의 침략을 받았다. 또 남쪽으로부터는 사라센(Saracen)이 711년에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기 시작하여 827년에 시칠리아를 침략하였다. 이러한 침략은 약탈을 동반하였고, 그 주요 대상이 바로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의 설립 : 이러한 쇠퇴기 속에서도 부르고뉴 지방의 봄(Baume) 수도원과 같이 아니안의 베네딕도(Be- nedictus of Aniane, 756~821)가 새롭게 해석한 베네딕도 규칙을 엄수하는 수도원들이 있었다. 프랑스 고티아(Gothia)의 후작인 오베르뉴(Auvergne)와 부르주(Bourges)의 백작이며 아키텐(Aquitaine)의 공작인 기욤(Guillaume,+918)은 상속자 없이 노년에 이르자, 속죄와 함께 자신과 가족의 구원을 위해 수도원을 설립하기로 결심하였다. 910년 여름에 기욤은 봄 수도원과 지니(Gign) 수도원의 원장을 겸하고 있던 베르노(Berno, 850?~927)에게, 수녀원에 입회한 여동생 아바(Ava)로부터 받은 클뤼니 지역의 수목이 우거진 언덕으로 둘러싸인 넓은 골짜기를 수도원 자리로 내주었다. 그리고 910년 9월 11일에 공작은 부르주에서 가족이 모인 가운데 수도회 설립 회헌(會憲)을 작성하여 서명하였다. 이 회헌에 따르면 기음은 클뤼니 수도원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에게 봉헌하면서 수도자의 《베네딕도 규칙서》(Regula Sancti Benedicti) 엄수를 강조하였고, 설립자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원장에 지명된 베르노에게 수도자 책임 지도와 수도원 재산 관리권을 부여하였다. 또한 수도자들의 선거를 통한 원장 선출 및 속권(俗權)의 간섭과 지배를 배제하는 면책(免責, Immunity)을 보장하면서 수도원을 교황청의 직접 보호 아래에 두고자 하였다.
개혁과 수도회의 설립 : 브장송(Besangon)의 대주교로부터 원장으로 축성된 베르노는 봄 수도원과 지니 수도원에서 뽑은 12명의 수도자들과 함께 클뤼니 수도원에서 아니안의 베네딕도 규칙 엄수를 개인 성화의 수단으로 삼아, 봉쇄와 침묵 속에서 시편 기도로 하루를 봉헌하는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베르노는 세 수도원의 원장직을 겸직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후에 베네딕도 수도원이 자율적 독립 단체에서 수도원 연합체로 전환되는 발판이 되었다. 클뤼니 수도원은 오도(0do, 927~942), , 에이마르도(Aymard, 942~954) , 마욜로(Majolus, 954~994) , 오딜로(Odilo, 994~1049), , 후고(Hugo, 1049~1109) 등의 경건하고 유능한 역대 원장들이 장기 재직하면서 개혁의 성공과 함께 발전하였다. 오도는 베네딕도 규칙 안에서 완덕의 길을 발견하고 부르고뉴 지방 및 이탈리아 로마와 파비아(Pavia)의 수도원들에 베네딕도 규칙을 확립함으로써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는 931년에 교황 요한 11세(931~935)로부터 수도 회칙 엄수 생활을 원하는 수도자들을 클뤼니 수도 공동체에 받아들일 수 있는 권리를 받음으로써 수도원을 점차로 발전시켰다. 에이마르도 시대에 클뤼니 수도원은 개혁과 함께 신자들
이 기증한 농토와 성당을 소유하면서 부동산이 계속 증가하여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기 시작하였다. 마을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수도원 개혁 업무를 수행하면서 수도 생활의 기본 덕행 중 하나로 자선을 강조하였고, 이는 클뤼니 수도원의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오딜로 시대에 클뤼니 개혁을 받아들이는 수도원들이 증가하자 클뤼니 수도원을 모원(母院)으로 하는 중앙 집권적 수도원 연합 형태의 '클뤼니 수도회' (Ordo cluniacensis)가 설립되었다. 이로써 클뤼니 수도원의 종속 체제가 이루어져 종속 수도원장의 지위가 원장(Prior)으로 격하되었고, 클뤼니 수도원의 아빠스(Abbas)는 수도자들의 수도 선서를 받고 정기 방문을 하며 원장들을 임명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후고는 새 수도원을 설립하였으며 수도회를 영국과 스페인에 진출시킴으로써 클뤼니 수도회의 명성을 드높였다. 그리고 1056년에는 마르시니(Marcigy)에서 동생 조프루아(Geoffroi)에게, 누이동생인 에르망가르드(Ermengrde)를 원장으로 하는 성모 수녀원(Notre Dame Abbase) 설립을 위해 조언하기도 하였다.
도전과 쇠퇴 : 존자(尊者)라고 불린 베드로(Petrus Venerabilis, 1122~1157)는 수도원 안의 분열 해결과 수도원 밖의 도전에 대한 대응으로 아빠스 직무를 시작하였다. 그가 처하였던 첫 번째 문제는 스스로 봉건 영주로 처신하여 수도자들의 배척을 받고 사임하였던 풍(Pons, 1109~1122)이 1125년에 무력으로 아빠스직의 복귀를 시도한 것이었다. 교황 호노리오 2세(1124~1130)가 퐁과 그 추종자들을 파문함으로써 내분이 해결되자, 베드로는 풍 시대에 해이해졌던 수도 생활을 쇄신하기 위하여 엄격한 수도 회칙을 새로 작성하였으며, 1136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2세(1130~1143)의 승인을 받았다. 두 번째 문제는 새로운 개혁 세력으로 등장한 시토회(Cistercienses)가 퐁 재임기에 해이해진 수도 생활과 클뤼니 수도 회칙의 완화를 들어 《베네딕도 규칙서》를 준수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한 것이다. 베드로는 클뤼니 수도 회칙이 내용이나 정신에 있어서 《베네딕도 규칙서》를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육체 노동의 소홀함 및 탈회한 수도자의 재입회와 다른 수도회의 수도자 입회 허용 등 완화된 사항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베드로의 사망 이후에도 계속된 시토회의 적대감, 영국과 스페인의 진출 및 발전과 함께 국제성을 상실한 프랑스 지역 수도회로의 격하, 교황청 대분규(1378~1415)에 따른 보호자 상실, 1457년부터 시작된 역대 아빠스들의 임지 부재, 선거권의 상실과 아빠스 임명제 도입(1518), 수도 회칙 준수 논쟁에 따른 엄수파(congrégation de l'étroite observance)와 전통파(congrégation de I'ancienne observance)의 양분(1623)과 같은 사건들로 인해 수도회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프랑스 대혁명 기간(1787~1799) 중인 1791년 10월 25일에 41명의 수도자들이 클뤼니 수도원에서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해산함으로써 클뤼니 수도회의 역사는 끝났다.
〔특 징〕 교황청의 제휴 : 클뤼니 수도회는 교황청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하였다. 928년에 교황 요한 10세(914~ 928)는 프랑스 국왕과 봉신들에게 교황청이 클뤼니 수도원과 수도자를 보호한다고 재확인하였다. 931년에 교황요한 11세는 수도원의 창립 회헌에 언급되었던 면속권을 부여하면서 처음으로 클뤼니의 자유를 '속권으로부터의 자유' (ab omni saeculari dominatu liberum)로 확인하였으며, 936년 교황 레오 7세(936~939) , 그리고 948년 교황 아가피토 2세(946~955) 또한 교황 요한 11세의 특권 부여를 재확인하였다. 998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5세(996~999)는 구체적 사항의 면책 특전을 부여하였으며, 어느 주교나 신부도 원장의 초청 없이는 클뤼니 수도원에서 미사를 봉헌하거나 사제 서품을 거행할 수 없고, 수도자들은 교구 주교의 원장 선거 명령을 받고 선출된 원장을 축성할 주교를 결정할 수 있다는 법령을 선포하였다. 교황 요한 19세(1024~1032)는 1024년에 클뤼니 수도원의 특전을 모든 종속 클뤼니 수도원들에 확대하였고, 1027년에는 처음으로 클뤼니 수도회를 교황권에 예속시키면서 교구장 주교를 포함한 모든 주교들의 관할권으로부터의 자유와 면속(免屬, Exemptio) 특권을 부여하였다. 클뤼니 수도원의 수도자였던 교황 우르바노 2세(1088~109)는 1088년에 전임 교황들이 부여한 특권을 확인하면서, 클뤼니 수도회의 축일에 거행되는 전례의 성대한 행렬 중에 아빠스가 주교 전례복을 입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교황 파스칼 2세(1099~1118) 역시 클뤼니 수도회 출신으로 두 차례(1100, 1107)에 걸쳐 클뤼니 수도회의 면책 특권을 확인하였다.
이처럼 창립 이후 역대 교황들의 보호와 지원으로 발전한 클뤼니 수도회는 교황청을 위한 봉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 첫째가 수도원의 개혁 활동이었다. 936년에 오도 원장은 교황 요한 11세의 요청으로 바오로 대성전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원을 포함하여, 로마와 그 주변의 수도원들에 《베네딕도 규칙서》의 준수를 확립시켰다. 둘째는 외교적 사명의 수행이었다. 1051년에 후고 아빠스는 교황 레오 9세(1049~1054)의 사절(1051)과 교황 알렉산데르 2세(1061~1073)의 사절로 헝가리에 파견되었다. 셋째는 대립 정치 세력의 화해를 위한 중재 역할이었다. 클뤼니의 아빠스들은 '하느님의 평화' (Pax Dei)와 '신의 휴전' (Treuga Dei) 수행으로 교황들에게 봉사하였다. 936년과 939년에 오도는 교황 레오 7세의 요청으로, 또한 941년에는 교황 스테파노 8세의 요청으로 로마의 통치자인 알베리쿠스(AIbericus)와 이탈리아의 왕 후고(Hu-80, 926~947)의 화해 협상에 중재자로 나섰다. 넷째는 십자군 원정의 협조였다. 클뤼니 수도회의 원장들은 귀족들에게 그들의 힘을 경건한 목적에 사용하도록 격려함으로써 첫 십자군 원정을 도왔다. 다섯째는 교권과 속권의 대립 해결이었다. 1077년에 후고는 카노사(Canosa) 사건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1084~106) 사이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여 교황에게 유리한 해결을 이끌어냈다. 여섯째는 이교도 선교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후고에게 스페인의 무슬림인 무어족(Moor)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수도자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레고리오 개혁에 대한 공헌이었다. 클뤼니 수도회는 교황 우르바노 2세와 교황 파스칼 2세와 같은 개혁 교황들을 배출하였고, 성직자와 평신도들에게 개혁을 독려하였다. 따라서 개혁 교황들은 클뤼니 수도회의 교황과 개혁에 대한 봉사를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전례 : 클뤼니 수도회는 《베네딕도 규칙서》 엄수에 따른 전례 생활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먼저 전례 생활의 핵심인 시간 전례, 미사, 행렬 예식이다. 수도 생활의 하루는 수도원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규칙적인 시간 전례로 짜여져 있었다. 수도자들은 《베네딕도 규칙서》에 따라 공동으로 시간 전례의 아침 기도를 노래로 바치는 것으로 시작하여 정해진 간격에 따라 일시경, 삼시경, 육시경, 구시경을 이어 바친 후 저녁 기도와 밤 기도로 끝냈다. 이로써 1주일 동안 시편 전체를 읊고, 1년 동안 수도회 전례력에 따라 성서 전체를 낭송하였다. 새벽부터 두 차례에 걸쳐 계속 봉헌되는 미사 중 첫 번째 미사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 다음에 봉헌되었고, 두 번째 미사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 다음에 봉헌되었다. 이러한 장시간의 기도와 같은 '하느님의 일' (Opus Dei)로, 클뤼니 수도원에서는 《베네딕도 규칙서》에 따른 기도와 노동의 균형이 깨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 육체 노동(손 노동)인 농사일을 가사(家事)나 필사(筆寫)와 같은, 수도원에 필요한 작업으로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 성탄, 예수 부활, 예수 승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성모 승천 등 다섯 대축일에는 수도자들이 십자가, 촛대, 복음 성서, 성인 유해를 앞세우고 수도원을 도는 성대한 행렬 의식이 거행되었다.
둘째로 클뤼니 수도 회칙은 침묵과 재계(齋戒)의 엄수를 강조하였다. 대화는 평일 아침 1시간 반 동안 그리고 육시경 후에 잠시 동안만 허용되었고 주일, 대축일, 성주간에는 하루 종일 침묵이 준수되어야 하였다. 예외적으로 설거지나 세탁 등을 할 때에는 대화가 허용되었다. 그외에 필요할 때에는 수도원에서 규정한 대로 손가락으로 표현하는 상징적 언어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클뤼니 수도 회칙은 병자를 제외한 수도자의 금육재(禁肉齋) 준수를 명하였고, 식사는 하루에 두 끼(점심과 저녁)를 허용하였다.
문학과 예술 : 문학(필사본 문학)과 예술에 대한 공헌은 클뤼니 수도회의 특징이다. 클뤼니 문학과 예술은 공동체 생활의 필요에 의해 생성되었다. 문학 부문에 있어서 수도자들은 신심, 신학, 전례에 관한 주제나 사본을 필사하였고, 이러한 필사본들과 아울러 다양하게 수집된 필사본들이 도서관에 구비됨으로써 그들은 신심과 신학에 관한 심도 깊은 논문을 쓸 수 있었다. 아울러 교리와 성인에 관한 시작(詩作)에서 세련미를 보여 준 베드로 아빠스 시대에는 성시 시작(聖詩詩作)의 클뤼니 전통이 열렸다. 이로써 클뤼니 문학은 후고 시대에 시작되어 베드로 시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루었다.
예술 부문에 있어서 수도자들은 사본의 필사 및 채식(彩飾)과 음악에서 뛰어났다. 베드로 아빠스는 필사 작업을 수도자의 주요 업무로 규정하였고, 필사자들은 사본실에서 시간 전례의 의무를 관면받고 수도원의 전례와 성서 낭송(Lectio divina)을 위해 아름다운 문체로 필사본을 제작하였다. 대표적인 필사본 문학 작품으로는 1100년경에 제작된 대축일을 표현하는 세밀화(細密畵)를 삽입한 《전례 독서집》이 있다. 또한 이러한 필사 문학에서 클뤼니 음악이 창출되었다. 신학자인 라바노(Maurus Hrabanus-Rabanus, 780?~856)의 작품을 바탕으로 노래말이 지어진 클뤼니 수도원의 그레고리오 성가 창법은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말년에 클뤼니 수도원에 입회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벨라르(Piere Abélard, 1079~1142)도 수도원을 위한 노래말을 짓고 작곡하였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12세기에 작곡된, 오도 아빠스를 기리는 축가가 있다.
건축에 대한 공헌 : 수도자들이 크게 늘어 927년에 완공된 첫 번째 성당의 수용 공간이 부족해지자 955~1000년에 제2의 성당(Cluny Ⅱ)이 세워졌고, 1088년 9월 30일에 착공한 제3의 성당(Cluny Ⅲ)이 1130년 10월 25일에 완공되었다. 1,000명 이상이 전례에 참석할 수 있는 제3의 성당은 로마에 베드로 대성전이 재건되기 전까지 유럽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 대표적인 조각은 클뤼니 수도자이며 저술가인 글라베르(Radulfus Glaber, 985?~1047?)가 《역사》(Historiae)에서 내세운 사위 일체(四位一體) 세계관에서 영감을 받아 성서 내용과 사추덕(四樞德)을 비유하는 네 개의 강, 네 개의 나무, 네 여인과 같은 상징물을 기둥 머리에 표현한 고린토식 주두(柱頭, Capital Sculpture)와 네 복음사가의 상징물이 윗부분에 묘사되어 있는 문(Portal Sculpture)이다. 이 제3의 성 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다. 제2의 성당과 제3의 성당 모두 다른 클뤼니 수도원 성당의 신축과 재건축의 모형이 되었다. 클뤼니 수도회는 로마네스크 건축과 조각 같은 클뤼니 예술을 창출, 발달시켰다. 그러나 1791년 여름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 성당 종은 용해되어 대포로 만들어졌고, 11월 28일에 혁명 폭도들이 성당에 난입하여 유리창을 깨트렸으며, 이튿날에는 성화상들과 서적들을 소각하였다. 1798년 4월 21일에 수도원은 경매를 통해 한 건설업자에게 넘어가 채석장으로 사용되다가 1823년에 소유주에 의하여 폭파되었다. 오늘날에는 성당 건물의 일부분만 남아 있고, 15세기의 아빠스 저택은 수도원의 모형과 8개의 주두 그리고 대부분 수도원의 장서였던 책들을 수집해 놓은 박물관으로 탈바꿈하였다. (⇦ 클뤼니 개혁 ; → 그레고리오 개혁 ; 베네딕도회 ; 시토회 ; 신의 휴전 ; 아벨라르, 피에르 ; 오도 ; 오딜로 ; 우르바노 2세)
※ 참고문헌 Joans Evans, Monastic Life at Cluny 910~1157, London, Oxford Univ. Press, 1931/ C.H. Lawrence, Medieval Monasticism. Forms of Religious Life in Western Europe in the Middle Ages, London · New York, Longman Group Limited, 1984/ H.E.J. Cowdrey, The Cluniacs and Gregorian Refom, Oxford, Clarendon Press, 1970/ Norman P. Tanner ed., Decrees of the Ecumenical Councils, vol. 1, London, Sheed & Ward : Washington, Georgetown Univ. Press, 1990/ Richard P. McBrien, Lives of Popes, HarperSanFrancisco, 1997/ Friedrich Kempf . Hans-Georg Beck . Eugen Ewig . Josef Andreas Jungmann, The Church in the Age of Fedualism, Anselm Biggs trans. by, Handbuch der Kirchengeschicte, Hubert Jedin ed., vol. Ⅲ, Die Mittelalterliche Kirch, Part 1 : Vom
Kirchlichen Fruhmittelalter zur gregorianischen Refom, London, Burns & Oates, 1980/ David Knowles · Dimitri Obolensky, The Middle Ages, 2nd Imp., London, Darton, Longman & Todd : New York, McGraw-Hill Book Company, 1972/ Peter and Linda Murray ed., The Oxford Companion to Christian Art and Architecture, Oxford .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96/ Thomas Renna, Dictionary of the Middle Ages, vol. 3, Joseph R. Strater ed., New York, Charles Scribner'sSons, 1989, pp. 468~471/ Dominique Iogna-Prat, Encyclopedia of the Middle Ages, vol. I, Andre Vaichez, Cambridge ed., James Clarke & Co., 2000, pp. 324~325/ William M. Johston ed., Encycliopedia of Monasticism, vol. I, Cambridge · London, Fitzroy Dearborn Publishers, 2000, pp. 128~133. 〔金聖泰〕
클뤼니 수도회
- 修道會
[라]Ordo Cluniacensis · [영]Order of Clu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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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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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뤼니 수도원의 원장 오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