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도회 성 오틸리엔 연합회 소속 한국 선교사. 수도명은 루페르트. 세례명은 요셉(Josef). 한국명은 길세 동(吉世東) .
1890년 1월 5일 독일 뮌헨(München)에서 태어난 클링사이즈는, 1904년부터 마인(Ma-in) 강변에 위치한 성 루트비히(St. Ludwig) 소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성 오틸리엔의 김나지움으로 옮겨 최고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910년 가을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한 그는 1년간 법정 수련을 받고 1911년 10월 8일 유기 서약을 하였다. 그 후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15년 7월 16일 딜링겐(Dillingen) 신학교에서 링크(Maximilian von Lingg) 주교의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1918년에는 뮌헨 대학교에서 베움커(Bäumker) 교수의 지도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운영하던 철학 대학에 학생들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신학교에서 강의를 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1922~ 1930년까지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철학 대학에서 학장으로 철학 강의를 하였으며, 5년간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부원장으로 봉사하였다.
1930년 덕원 신학교의 철학 교수로 있던 슈미트(C. Schmid, 金時練, 1883~1962) 신부가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보좌 총아빠스로 선출되어 독일의 모원으로 돌아오자, 클링사이즈 신부는 그를 대신하여 1930년 11월 9일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이후 15년 동안 덕원 신학교에서 철학, 라틴어, 교회사 등을 가르치며 신학생 양성에 매진하고 피정 지도도 활발히 하였다. 1940년에는 국민 계몽 총서 제1권으로 《인간의 영혼은 물질인가 정신인가》를 펴내기도 하였다. 소련군의 진주와 북한 공산당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신학교는 계속 운영되었고, 그 역시 강의를 계속 하였다. 그러나 1949년 5월 9일 이른 새벽, 수도원을 포위한 북한 공산당원들에 의해 사우어(B.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 로트(L. Roth, 洪泰華, 1890~1950) 원장 신부, 슐라이허(A. Schleicher, 安世明, 1906~1952) 부원장 신부와 함께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되었다. 국제 신앙 기구(Agentia Internationale
Fides)에 따르면, 그는 1950년 4월 6일 평양 인민 교화소에서 영양 실조로 선종하였고, 평양 교외의 묘지에 사우어 주교와 함께 안장되었다. (→ 덕원 면속구 ; 덕원 신학교)
※ 참고문헌 A. Kasper · P. Berger, HWAN GAB(還甲), Miinster-schwarzach, 1973/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이정순 엮음, 《원산 수녀원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1988/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91/ D. Drexl OSB, Necrologium congregationis Ottiliensis 1888~2000, St. Ottilien/ Erzabtei St. Ottilien, Schematismus 1924~1946, St. Ottilien/ Todesanzeige von Abtei St. Ottilien, 1975. 〔宣智勳〕
클링사이즈, 루페르트 (1890~1950)
Klingseis, Rup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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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