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에서 시칠리아(Sicilia), 사르데냐(Sardegna)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섬인 키프로스를 영토로 하는 국가. 공식 명칭은 키프로스 공화국(Republic of Cyprus)이다. 면적은 9,250k㎡이며, 이집트에서 북쪽으로 386km, 시리아에서 서쪽으로 97km, 그리고 터키에서 남쪽으로 64km 떨어진 위치에 있다. 1974년 북키프로스를 중심 으로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Turkish Republic of Northern Cyprus)이 건국되었지만, 국제 사회에서 주권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 터키인들이 계속 이주하여, 2001년 자료에 따르면 그리스계 77%, 터키 계 18% 그리고 기타가 5%를 차지하고 있다. 종교는 그리스 정교회 78%, 순니파 무슬림 18%, 그리고 마론파교회(Ecclesia Maronea)와 아르메니아 정교회를 포함한 기타가 4%이다. 전통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며 수도 는 니코시아(Nicosia), 인구는 775,927명(204)이다. 언어는 그리스어, 터키어, 영어가 사용되고 있다.
〔역 사〕 초기 교회 : 키프로스는 전략적 중요성과 동서 교역의 중개지라는 이유 때문에 고대부터 주변의 정치세력과 국가들의 각축장이 된 곳이었다. 신석기 시대 말기인 기원전 6000년 중반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키프로스 섬은 창세기에 노아의 자손이 살았던 지역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제계 전승에 따르면, 노아의 셋째 아들인 야벳의 아들 중 하나인 '엘리사아' (אֱלִישָׁע)가 키프로스를 의미한다. 청동기 시대 말기(기원전 1600~1050)에 키프로스는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미케네인과 아카디아인이 그곳에 정착하였으며, 이들로 인해 그리스 문화와 언어가 도입되었다. 기원전 800년에 페니키아인이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은 도시 치티움(Citium, 현 Larnaca)을 세웠다. 기원전 709~350년까지 이 섬은 당시 강대국인 아시리아, 이집트, 페르시아의 지배를 잇따라 받았다. 기원전 333년에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36~323)을 지지하였던 키프로스는, 기원전 295년 이집트의 지배자가 된 프톨레메우스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후 기원전 58년 10개의 도시 왕국이 있던 키프로스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키프로스는 팔레스티나 지역 밖에서 복음이 전해진 첫 지방 중 하나였다. 사도 바오로를 도운 바르나바가 이 섬 출신이었으며(사도 4, 36-37), 3차 전도 여행을 마친 바오로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 "키프로스 사람이며 고참 제자인 므나손"(사도 21, 16)의 집에서 묵었다. 이 섬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스테파노가 순교한 직후이다. "스테파노에게 닥친 재난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 그리고 안티오키아까지 두루 다니면서 오직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이 몇 있었는데, 그들은 안티오키아로 가서 헬라인들에게도 말씀을 전하고 주 예수에 대한 복음을 전하였다" (사도 11, 19-20). 사도 바오로는 1차 전도 여행의 첫 목적지로 키프로스를 찾아갔으며, 바르나바와 함께 살라미스(Salamis)와 바포(Paphos)
에서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13, 4-12). 그리고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바오로와 말다툼을 한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갔다(사도 15, 39). 이후 키프로스 교회에 대한 언급은 4세기 초까지 등장하지 않았다.
1세기 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난민들이 키프로스로 들어왔지만, 이집트에서 116년에 시작된 반란이 키프로스까지 번지자 이를 진압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117~138)는 유대인들을 섬에서 추방하였다. 395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후 이 섬은 동로마 제국 황제의 지배를 받았다. 키프로스 주교들이 처음 알려진 것은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와 사르디카 교회 회의(343~344),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의 결정문에 서명을 한 후 였다. 이 시기에 키프로스 교회의 대표적 인물은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오(Epiphanius Salaminius, 310/320~402/403)이다.
5~9세기까지 키프로스 교회는 동방 교회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다. 3명의 키프로스 주교들이 칼체돈 공의회(451)에 참여하였으며, 성화상 공경의 합법성을 인정한 제2차 니체아 공의회(787)에도 주교들이 참여하였다. 632년 초에 아랍인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647년 무슬림 침략자들에 의해 잠시 점령되기도 하였지만 이후 동로마 제국과 칼리프의 공동 영토가 되었다. 십자군과 베네치아 시기 : 영국의 리처드 1세(1189~1199)는 십자군으로 나선 1191년에 이 섬을 정복하여 예루살렘 명의의 왕인 기 드 루시냥(Guy de Lusignan)에게 주었다. 그가 1194년에 죽자 동생 아모리(Amaury)가 키프로스의 왕이 되었고, 그에 의해 세워진 왕조가 1489년까지 이 섬을 다스렸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제노바와 베네치아에서 온상인들이 키프로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무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결국 키프로스는 베네치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1489~1571). 베네치아의 새 법이 키프로스에서 시행되면서 서방 교회의 교계 제도가 설립되었고, 그로 인해 그리스 정교회의 15개 주교좌는 3개로 축소되었다. 서방 교회의 수도원들이 이 섬에 세워진 반면, 서방 교회에 의해 동방 교회의 직무 권한이 통제되기도 하였다. 피렌체 공의회(1438~1445) 기간 중에 키프로스에 있는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일치를 위한 노력은 실패하였고, 서로 간의 긴장 역시 완화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 제국의 영토를 이집트까지 확대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2세(1566~1574)는 1571년 당시 유럽의 대표적 해상 세력이었던 베네치아로부터 키프로스를 획득하여 동지중해 지역의 제해권을 확립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키프로스를 점령한 후 점령지 통치 방식인 '밀레트 제도' (Millet System)를 적용시켜 동방 정교회를 인정하였다. 하지만 그리스 정교회와 서방 교회의 주교들 및 수도원장들은 학살당하였고, 성당은 모스크로, 수도원은 마구간으로 훼손되었다. 1572년 예루살렘의 프란치스코회가 키프로스에 진출하여 서방 교회들을 이끌었다. 후에 오스만 제국의 법으로 그리스 정교회가 다시 설립되었으며, 일부 수도원은 존립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오래된 주교좌는 다시 설립되지 않았으며, 4개로 한정된 서방 교회의 성당들만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니코시아는 대주교좌가 되었으며, 니코시아 대주교의 재치권하에서 3명의 주교들이 수도 대주교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이후 그리스 정교회는 키프로스의 그리스인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대주교는 세속적 ·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그리스인들의 주장이 강해지면서, 그리스계 주교들은 민족적 저항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로 인해 그리스 독립 전쟁(1821~1832) 시기에 키프로스에 있던 대주교와 3명의 수도 대주교 그리고 수도원장 대부분이 교수형을 당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정교회 신자들에게 새로운 주교를 선출하도록 요구하였고, 그 결과 키프로스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에서 벗어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의 재치권하에 있게 되었다.
1830년 그리스의 독립과 함께 그리스의 민족주의자들은 실질적인 회복을 통해 '메갈리 이데아' (Megali Idea, Great Idea)의 실현을 위해 탈(脫)오스만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으로 크레타를 포함한 상당수의 섬들이 그 리스에 병합되었지만, 1878년 키프로스의 지배권은 영국에 넘어갔다. 1923년 영국은 터키와 '로잔 조약 (Tre- aty of Lausanne)을 체결하였고, 키프로스는 완전히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현대 : 영국이 키프로스를 지배하던 기간 동안(1878~1958), 키프로스 교회의 주교들은 그리스와 통합하기를 원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후 반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열풍은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에게 그리스와의 통합을 원하는 에노시스(Enosis, 통합)운동을 전개토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1956년 대주교인 마카리오스 3세(Makarios III, 1913~1977)와 키레니아(Kyrenia)의 주교가 영국인에 의해 추방되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열강들은 키프로스의 현상 유지를 원하였고, 국제 연합(UN)에 압력을 가해 통합 요구를 좌절시켰다. 그 결과 그리스계 주민들은 무력으로 통합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의 후원 아래 지하 조직을 구성하여 테러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터키계 주민들도 보복 테러를 자행하였다. 한편 1950년대 후반에 영국의 지중해 전략이 변화되어 군사 기지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키프로스의 주권을 현지 주민에게 이양 시키는 결정을 하였다. 그 결과 그리스와 터키의 외무 장관들이 1958년 12월부터 협상을 시작하여 1959년 2월 11일 그리스와 터키 수상이 공화국 설립을 결정한 '취리히 협정' (Zürich Agreement)이 체결되었고, 2월 19일에 영국 · 그리스 · 터키의 주민 대표들이 런던에서 '취리히 협정' 을 확인하는 '런던 협정' (London Agreement)을 체결하였다. '취리히 협정' 과 '런던 협정' 을 근간으로 공화국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1960년 8월 16일 키프로스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영국의 식민 지배는 끝났지만 헌법 시행을 둘러싼 그리스계와 터키계 간의 대립으로 여러 문제들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초대 대통령이 된 대주교 마카리오스 3세는 1963년 '13개조 계획' 이라는 헌법 수정안을 터키계 공동체와 영국, 그리스, 터키의 보장 국가단(Guarantor Powers)에 제시하였고, 그 결과 양계 주민 간의 내전이 발생하였다. 이에 터키는 보장 조약에 의거하여 키프로스의 현상 유지라는 명목으로 침공 의사를 표명하였으나, 이 침공은 그리스와 터키 간의 전쟁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이에 미국은 터키의 침공을 봉쇄하고 제네바 회담을 개최하여 '애치슨 안' (Achesonplan)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하였지만,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 없이 내전을 종식시키는 데에만 합의하였을 뿐이다.
1967년 키프로스에 제2차 위기가 발생하였다. 그리스계 국민군(Greek Cypriot National Guard)이 테오드호로(Theodhoros), 코피노우(Kophinou) 지역의 터키계 정착촌을 공격함으로써 내전이 재개된 것이다. 터키계 주민이 위험해지자 터키는 그리스에 4개항에 걸친 최후 통첩을 발표하고, 수락하지 않을 경우 키프로스 침공을 감행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또다시 미국은 중재에 나섰고, 그리스가 터키의 요구를 수락함으로써 침공은 철회되었다. 그 결과 터키계는 자신들의 정착촌에서 자치 행정을 시작하였고, 문제 해결을 위한 양 공동체 간의 직접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직접 협상은 1974년 제3차 위기가 발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제2차 위기 이후 마카리오스 3세 대통령은 그리스와 통합될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하고, 비동맹주의를 표방하면서 제3 세계 국가들과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등 그리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 노선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1973년 쿠데타로 집권한 그리스의 군사 정권은 마카리오스의 탈그리스 정책 추진에 대한 불만과 집권 이후 국내 정치의 불안에 대한 해결책으로 키프로스 문제를 당면 과제로 삼았다. 그 결과 키프로스에 주둔해 있던 그리스군과 에오카(EOKA, 키프로스 민족 투쟁 조직)를 사주하여 쿠데타를 감행하였다. 1974년 7월 15일 발생한 쿠데타로 마카리오스는 축출되었고, 그리스 정부의 후원 아래 과격 에노시스주의자인 샘슨(N. Sampson)이 대통령이 되었다. 이에 터키는 보장 국가단의 일원인 영국에 키프로스를 침공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영국이 반대하자 7월 20일 3개 여단의 병력으로 키레니아의 서쪽 지점으로 무력 침공을 감행하였고, 터키의 침공으로 그리스와 키프로스의 정권이 바뀌었다. 터키와 전쟁을 할 수 없었던 그리스의 군사 정권은 물러났고, 카라만리스(K. Karamanlis, 1907~1998)의 민간 정권이 출범하였다. 키프로스에서는 샘슨이 물러나고 마카리오스가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한편 터키는 같은 해 8월 16일 제2차 침공을 감행하여 코키나 만(Kokkina Bay)에서 파마구스타(Famagusta)까지 연결하는 키프로스의 북부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였으며, 점령 지역은 총면적의 35.08%에 달하였다. 이로 인해 약 20만 명에 달하는 그리스계 난민이 발생하였고, 터키는 이 침공으로 오늘날까지 국제 사회에서 지탄을 받고 있다.
이후 국제 사회의 노력으로 양 공동체는 직접 협상을 시작하였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981년 그리스계가 그동안의 직접 협상을 무시하고 키프로스 문제를 독자적으로 UN에 상정하자, 터기계는 1983년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the Turkish Republic of Northern Cyprus)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UN 안전 보장 이사회는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을 불법으로 인정하는 결의안 541호를 채택하였으며, 이후 양 공동체 간의 직접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오늘날 UN을 비롯한 국제 사회는 그리스계 정부를 키프로스의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있으며, 터키계에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다. 터키계는 연방제(Federation)가 아닌 연합제(Confederation)를 주장하면서 이상적인 국가형태로 '스위스 모델' 과 최근 들어서는 '벨기에 모델' 을 주장하고 있다. 연방제와 연합제의 근본적인 차이는 통일 정부의 부재에 있다. 터키계가 주장하는 연합제는 '두 민족, 두 정부' 의 국가 형태이며, 그리스계가 주장하는 연방제는 '두 민족, 한 정부' 의 국가 형태를 의미한다.
2002년 11월 11일 UN 사무 총장 코피 아난(Kofi Atta Annan)은 스위스 모델의 연방제안을 제시하였고, 그리 스계의 EU 가입이 결정되는 12월 12일의 EU 정상 회담까지 관계 당사국들의 입장 표명을 촉구하였다. 그가 제시한 조정안은 가장 건설적인 조정안이었지만, 2003년 3월 10일과 11일에 개최된 헤이그 회담이 결렬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그 결과 그리스계만 독자적으로 EU에 가입하였고, 이로 인해 키프로스 문제는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앞으로 난항을 거듭할 것이라고 예견된다.
키프로스의 가톨릭 신자들은 니코시아에 있으며, 마론파 전례를 따르는 치프로 대교구의 관할하에 있다. 2003년 현재 신자수는 17,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2.2% 정도이다. 대교구 1, 본당 13개에, 대주교 1, 신부 23(교구 소속 12, 수도회 소속 11), 수사 7, 수녀 43명이 있다. (→ 그리스 ; 마론파 교회 ; 에피파니오, 살라미스의 ; 파포스)
※ 참고문헌 2004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 299/ Annuario Pontificio 1998, Città del Vaticano, 1998/ M.R.P. McGuire, 《NCE》 4, 2003, pp. 460~464/ Stephen Xyis G, Cyprus : Reluctant Republic, Hague, Mouton, 1973/ Nancy Crawshaw, The Cyprus Revolt,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78/ 우덕찬, 《중앙 아시아 연구》 8, 2003, pp. 71~86. [禹惠燦]
키프로스
[영]Cyp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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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의 세례 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