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 마틴 루터 (1929~1968)

King, Martin Luther J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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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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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미국의 침례교 목사. 흑인 민권 운동가.
〔생 애〕 킹 목사는 1929년 1월 15일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에서 태어났다. 15세에 모어하우스 대학(Morehouse College)에 입학하였고, 1947년 설교 자격증을 받아 부친이 재직 중인 애틀랜타의 에버네저(Ebenezer) 침례교회의 부목사가 되었으며 1948년 2월 침례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해 6월에 사회학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9월에 펜실베이니아 주 체스터 시의 크로저 신학교(Crozer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그는 현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의 사상을 공부하는 한편, 머스트(A.V. Muste) 박사와 존슨(M.W. Johnson) 박사의 강연을 통해 비폭력 저항과 인종 차별 철폐 및 식민지 해방과 사해 동포론(四海同胞論) 등을 주창한 간디(M.K. Gandhi, 1869~1948)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51년 6월 신학사 학위를 받았고, 이어 보스턴 대학 신학부에 진학하였다. 1954년 10월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의 덱스터 애버뉴(Dexter Avenue) 교회의 목사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6월 보스턴 대학에서 <폴 틸리히와 헨리 넬슨 위먼의 사상에서 나타나는 신의 개념에 대한 비교>(A Comparison of the Conceptions of God in the Thinking of Paul Tillich and Henry Nelson Wieman)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민권 운동가로서의 활동 : 킹 목사가 민권 운동의 지도자로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몽고메리 시의 '버스 안 타기 운동' 이었다. 이 운동은 그가 덱스터 교회에서 재직한 지 2년째인 1955년 12월 1일, 백인 승객에게 자리 양보를 거부한 로사 파크스(Rosa Parks)라는 흑인 여성이 시의 인종 분리법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흑인들은 항의 표시로 로사 파크스가 법정에 서는 12월 5일을 '버스를 타지 않는 날' 로 정하였다. 원래 이 운동은 이날 하루만 실시될 예정이었으나 11개월이나 지속되었고, 흑인 5만 명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킹 목사는 이 운동을 주도하는 지도자로 선정되었다. 결국 1956년 11월 대법원이 지방 버스 노선의 인종 차별을 불법으로 선언함으로써 흑인들이 승리하였다. 몽고메리 시의 버스 보이콧(boycott)은 시민 운동의 중요한 캠페인 중 하나였으며, 킹이 사회 개혁을 위해 자신의 철학과 비폭력 저항의 전술을 발전시켰던 운동이다. 그리고 이후 10여 년간 지속된 킹의 인권 투쟁의 서막이자, 그가 인권 운동의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을 계기로 남부 지방의 각 도시에서 유사한 운동이 일어나고 흑인 평등권 투쟁을 위한 단체들이 생겨났으며, 1957년 이러한 경험을 공유하고 힘을 모으기 위해 미국 남부의 흑인 지도자들은 '남부 그리스도교 지도자 회의' (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SCLC)를 조직하고 킹 목사를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이 단체는 흑인들의 법률 자문과 법적 보호를 위해 설립된 '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 (National ssoci-
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NAACP)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고, 백인 평화주의자들이 설립한 '인종 평등 회의' (Congress of Racial Equality, CORE)와도 함께 일하였다. 남부 그리스도교 지도자 회의는 우선적으로 흑인들의 투표권을 요구하였고, 1957년 5월 킹은 투표권을 요구하는 순례 행진을 조직하였다. 30개 주에서 참가한 3,500여 명의 사람들이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A. Lincoln, 1809~1865)의 기념관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후 3년 동안 킹은 이 운동에 온 힘을 쏟았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투옥되고 위협을 받았으 며, 1958년 9월에는 뉴욕 흑인 지역의 한 백화점에서 자신의 저서인 《자유를 향한 전진》(Stride toward Freedom, 1958)에 서명을 해 주던 중 한 흑인 여성의 칼에 찔려 생명을 잃을 뻔하기도 하였다.
1959년 2월 인도의 수상인 네루(J. Nehru, 1889~1964)의 초대로 아내와 함께 인도에 다녀왔는데, 이 여행을 통해 간디의 비폭력 사상을 더 공부하게 되었다. 농성과 평화 행진에 참여한 킹 목사는 여러 차례 체포당하고 법정에 섰다. 흑인 지도자에 대한 구속과 시위 금지령 같은 탄압이 계속되었고, 곳곳에서 물리적인 충돌이 빚어졌다. 그로 인해 킹의 비폭력 노선에 대한 비판이 나타났다. 실질적인 결실이 보이지 않자 조바심이 난 흑인들은 점점 호전적으로 변해 갔고, 1963년에는 10주 동안 186개 지역에서 750회 이상의 시위가 일어났다. 링컨 기념일인 8월 28일,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앞에 모인 25만 명의 군중 앞에서 연단에 선 킹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하여 인종을 초월하여 모두가 한 형제가 될 것이라는 신념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강하게 드러냈다. 이 연설이 있은후 분위기는 고조되었고, 민권 운동의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다. 드디어 1964년 공공 장소와 공공 소유 시설물에서의 불법적인 인종 차별 폐지 등을 골자로 하는 민권법이 통과되었고, 비폭력주의에 입각하여 흑인에게도 백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인정하고자 한 '공민권 운동' 의 공로가 인정되어 킹은 1964년 역대 최연소인 35세의 나이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개혁가에서 혁명가로 : 킹 목사는 1965년 이후 가난한 사람들과 경제적 불평등, 특히 북부 지역의 빈곤에 관 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0년 동안 인종 차별 철폐를 위하여 싸웠던 그는 흑인의 고통이 단순히 피부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더 큰 문제는 가난이었고, 그는 흑인들만의 차별 철폐를 위한 운동은 다른 가난한 사람들의 적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킹 목사의 저항 운동은 점차 흑인의 경계를 넘어섰다. 흑인 인구의 반이 극빈 계층에 속하지만 그 수는 전체 빈곤층의 5분의 1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그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적 혜택을 위해 노동 조합들과 손을 잡고 투쟁을 시작하였다. 1966년 초부터 '시카고 자유 운동' 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1월 26일 거처를 시카고 흑인 지역의 아파트로 옮겨 주택 확보와 학교에서의 참다운 인종 통합을 요구하고, 실생활에서의 차별과 빈곤 타파를 위해 활동하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 참전을 결정하였는데, 1967년 2월 25일 킹 목사는 로스앤젤레스 힐튼 호텔에서 베트남전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소규모에 머물던 반전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4월 4일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에서 킹 목사는 자신이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것은 북베트남이나 남베트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비극적 전쟁을 끝낼 책임이 있는 '나의 사랑하는 조국에 대한 호소' 라면서 인종 차별과 빈곤, 전쟁의 상호 관련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킹의 선언은 흑인 민권 운동의 주류가 지닌 미국 국내적 시각을 벗어나 인식의 세계주의적 확산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미국 내 반전 평화 사상을 진일보시키는 것이었다.
이후 킹 목사는 반전주의자로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쟁에 반대하고 나섰다. 킹이 이렇게 미국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해 가자, 곳곳에서 그를 향한 비난의 화살이 빗발쳤다. <뉴욕 타임스>는 그가 민권 운동과 베트남 전쟁을 혼동하고 있다고 비판하였으며, 미국의 기득권층은 킹을 경계하기 시작하였고, 비폭력 흑인 민권 운동에 지지를 보내던 세력들도 킹을 '배신자' 로 규정하기 시작하였다. 킹은 여러 차례 생명의 위협을 느꼈는데, 끝내 1968년 4월 4일 테네시 주 멤피스의 한 모텔에서 제임스 얼 레이(James Earl Ray, 1928~1998)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의 암살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의 흑인 거주 지역에서는 분노의 물결이 일어났고, 많은 도시에서 폭동이 발생하였다. 4월 8일 애틀랜타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15만 명이 참석하였는데, 그곳에는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들도 적지 않았다.
〔평 가〕 킹을 단순히 비폭력 저항의 민권 운동가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말년에 그는 혁명적인 성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며 미국의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민권 운동가 킹' 은 용인하였으나, 그 이상의 킹은 더이상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백인 사회가 근본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미국의 진정한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를 수행한 한 기자는 그의 생각이 점차 백인들과의 타협이 아니라 싸움을 통해서만 흑인들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였던 맬컴 엑스(Malcom X, 1925~1965)의 생각과 닮아가고 있다고 썼다. 확실히 말년의 킹은 맬컴 엑스가 '백인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20세기의 샘 아저씨' 라고 비난하였던 시절의 그와는 전혀 달랐다고 할 수 있다. 1986년 미국 의회는 킹을 기리기 위해 그의 생일에 맞추어 매년 1월 세 번째 월요일을 연방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이날은 단지한 위대한 인물의 기념일이 아니라, 킹이 꿈꾸었던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자긍심을 지니고' 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염원을 반영한 날일 것이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사랑의 힘》(Strength to Love, 1963), 《우리 흑인은 왜 기다릴 수 없는가》(Why We Can't Wait, 1964) ,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Go From Here?, 1967) 등이 있다. (→ 간디 ; 비폭력 저항)
※ 참고문헌  Allan A. Boesak, 김민수 역, 《우리는 더이상 순진하지 않다 흑인 신학과 흑인의 힘에 관한 사회 윤리적 연구》, 한국신학연구소, 1987/ 황필호 편역, 《비폭력이란 무엇인가》, 종로서적, 1990/ 손규태 편저, 《혁명적 신앙인들》, 한국신학연구소, 1987/ 이삼성,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한길사, 1998/ 서인재, 〈킹 박사의 항거 사상>, 《미국학 논집》 1, 한국 아메리카 학회, 1969/ 하워드 진, 조선혜 역, 《미국 민중 저항사》 Ⅱ, 일월서각, 1986/ 《ODCC》, pp. 928~929/ D.L. Watson, Assessing the role of the NAACP in the civil right movement, The Historian 55, pp. 453~468/ R. Lischer, The word the moves : the preaching of Martin Luther King, Jr., Theology Today 46, pp. 169~182/ M.E. Dyson, Martin's death, and ours', Theology Today 45, pp. 68~70/ John M. Murphy, A time of shame and sorrow Robert F. Kennedy and the American Jeremiad, The Quarterly Journal ofSpeech 76, pp. 401~414. 〔金志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