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

墮落

〔라〕lapsus · 〔영〕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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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의 시초에 인류를 대표하는 첫 인간 또는 집합 명사로서의 인간에 의해 발생한 죄의 사건이 온 인류 역사에 영향을 미친 것. 인류 가족의 죄스런 상태와 그리스도에 의한 인간의 구속(redemptio) 또는 구원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한 그리스도교 교리의 표준적 용어. 신학적 의미에서 타락은 하느님의 선한 창조 질서를 거스른 인간의 불순종 행위를 가리킬 뿐 아니라, 이로 말미암은 결과의 상태, 즉 온 인류가 처한 죄스런 상황과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겪는 고통스런 결과를 가리킨다.
I. 어원과 의미, 정경적 본문들
〔어원과 의미〕 라틴어와 서양의 현대어에서 '타락' 이라는 명사(Lapsus, Fall, Chute, Sündenfall, Caída, Caduta)는 어원적으로 떨어지다 · 넘어지다 · 무너지다' 라는 동사(labi, fall, chuter, fallen, caer, cadere)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문자적 의미로는 인간 또는 사물이 떨어지거나 빠지거나 넘어지거나 쓰러지거나 무너지는 것을 뜻하며, 비유적 의미로는 인간이 죄에 떨어지고 빠지는 것을 뜻한다. '떨어지다 · 넘어지다 · 무너지다' 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동사는 각각 '나팔' (נָפַל)과 '핍토'
(πίπτω)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들은 그리스도교 교리와 신학에서 말하는 타락, 즉 온 인류 역사의 시초에 발생하여 인류 역사 전체에 영향을 미친 죄의 사건이라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로 쓰인다. 구약성서에서 '떨어지다 · 넘어지다 · 무너지다' 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의 어근은 'נפל' 이다.
구약성서에서 이 단어의 가장 일상적인 용법은, 문자적 의미에서 인간의 떨어짐 · 빠짐 · 넘어짐 · 쓰러짐이나 천막 · 벽· 집 · 산 등 물체의 무너짐과 같은 비고의적 행동이나 움직임을 묘사하기 위해 쓰이는 경우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적용되어 비유적 의미로 쓰이는 경우에는 '죄에 떨어지다 넘어지다 · 빠지다' 를 의미하기보다는, '떨어짐 · 빠짐 · 넘어짐 · 쓰러짐이 곧 죄의 결과임' 을 의미한다. 즉 죄인이나 하느님의 적 내지 이스라엘의 원수는 하느님의 저주 또는 벌에 빠짐으로써 떨어지고 넘어지고 쓰러진다(이사 24, 20 ; 예레 25, 27 ; 시편 5, 11 : 20, 9 ; 잠언 11, 5. 28).
신약성서에서 그리스어 '핍토' 는 '떨어지다 · 빠지다 · 넘어지다 · 쓰러지다 · 무너지다' 를 뜻하는 관용적 의미 외에 비유적 의미로 '죄의 탓이 있게 되다 · 책임이 있게 되다' , '죄를 짓다' 를 뜻한다. 루가 복음서 20장 18절에는 신적 심판에서 이루어지는 파멸이라는 사상이 이 비유적 의미에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1장 11절에서 이스라엘의 떨어짐 · 빠짐 · 넘어짐 · 쓰러짐은 이스라엘이 죄의 탓으로 하느님한테 버림받게 될 가능성, 곧 구원으로부터 배제될 가능성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이처럼 떨어짐 · 빠짐 · 넘어짐 · 쓰러짐이라는 심상은 떨어지거나 넘어지는 일 자체보다는 떨어지거나 넘어진 뒤에 쓰러져 누워 있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떨어짐 · 빠짐 · 넘어짐 · 쓰러짐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1장 11절과 26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배척과 결정적 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고 쓰러진 이스라엘의 구원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함축한다. 한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떨어짐 · 빠짐 · 넘어짐 · 쓰러짐' 은 믿음의 포기를 의미한다(1고린 10, 12 ; 로마 14, 4 ; 히브 4, 11).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타락' 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사용되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단어들의 용법과 의미와는 다른 고유한 용법과 의미를 갖는다. 신학적 용법으로 타락은 인류 역사의 시초에 온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 즉 첫 인간 또는 집합 명사로서의 인간에 의해 일어난 죄의 사건이 온 인류 역사에 영향을 미친 것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그러므로 신학적 의미에서의 타락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거슬러 인류 역사의 시초에 발생한 인간의 불순종 행위를 가리킬 뿐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일어난 결과의 상태 즉 온 인류가 처한 죄스런 상황과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겪는 고통스런 결과를 가리킨다.
〔정경적 본문들〕 타락의 신학적 의미를 구성하는 정경적 본문들은 두 가지이다. 첫째 본문은 창세기 2장 4절부터 3장 24절이고, 둘째 본문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 12-21절이다. 야훼 전승 문헌(J)인 첫째 본문은 첫 인간 부부의 죄와 벌 즉 인간의 불순종 행위와 그 결과들을 묘사해 주는 기초 본문이며, 바오로에 의해 쓰여진 둘째 본문은 창세기 3장의 설화를 기초로 하여 '아담-그리스도 예형론' 을 전개하는 본문이다. 이스라엘의 전승은 죄가 이스라엘 사람들과 인류의 삶을 잠식하는 어떤 것이라는 데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창세 6, 5 ; 이사 1, 4-6 ; 시편 51, 1-5 ; 130, 3 ; 143, 2).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아주 늦은 시기까지도 창세기 2-3장의 설화 본문에 직접 연결되지는 않았다. 창세기 3장의 설화를 타락의 관점에서 보거나, 이 설화에 '타락' 의 명칭을 사용한 일은 후대의 해석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이런 관점과 명칭은 유대교의 해석(집회 25, 24 : 지혜 2, 24)과 그리스도교의 해석(로마 5, 12-21 ; 1고린 15, 21-22. 45-49)에서 비롯되었다. 이 명칭은 그 후 오랜 세기 동안,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성찰의 표준이 되었다. 오늘날 학자들은 창세기 3장의 설화에 대해 여전히 '타락 설화' , '타락 사화' 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폰 라트(G. von Rad)는 창세기 주석에서 창세기 3장의 설화에 대해 '타락 사화' 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의 학자들은 창세기 3장의 설화에 대해 '타락 설화' 또는 '타락 사화' 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베스터만(C. Wester-mann)은 창세기 주석에서 창세기 3장의 설화에 대해 인간의 현재 실존 형태를 의미하는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창세기 3장의 타락 설화는 야훼 전승 문헌의 일련의 죄 이야기(Sündgeschichte, 罪 史話)들 전체의 처음에 있다. 따라서 창세기 3장의 타락 설화를 원역사(1-11장)에 나오는 야훼 전승 문헌의 서사시로부터, 즉 야훼 전승 문헌의 일련의 죄 이야기들 전체로부터 고립시켜 해석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창세기 11장까지의 원역사 안에 있는 야훼 전승 문헌의 일련의 죄 이야기들은 인간의 죄스런 행동의 신학적이고 사회 · 인간학적인 요소들을 모범적으로 전개한다. 그 까닭은 인간의 죄는 항상 하느님에 대한 죄이자 인간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동료 인간에 대한 죄이기 때문이다. 야훼 전승 문헌의 신학에 따르면, 죄의 본질은 하느님이 원한 좋은 창조 질서를 인간이 위반한 데에서 성립한다. 따라서 하느님과의 사이에서, 동료 인간과의 사이에서, 그리고 자연 또는 다른 피조물들과의 사이에서 친교의 관계를 깨뜨린 데에서 성립한다. 그리고 이 친교의 깨짐과 하느님과의 계약 파기는 전체 창조계에 고통스런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창세기 2-3장의 설화에 나타난, 하느님의 원초적 구원 계획과 인간적 경험의 고통스런 현실 사이의 균열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잘못의 책임이 있음을 나타낸다.
사도 바오로는 '아담-그리스도 예형론' 을 발전시킨 첫 번째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아담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이 죄를 통해 죽음이 왔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총과 의로움과 부활의 생명이 넘치게 되었다(로마 5, 12-21 ; 1고린 15, 21-23). 그 때문에 바오로는 온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의 범행과 불순종의 관점에서 인간의 죄와 죽음 사이의 숙명적 연관성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운명에 처해 있는 인간을 해방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의 보편성을 조명하였다. 비록 바오로가 '타락'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신학적 의미에서 '타락' 의 상념에 가장 가까운 성서 본문은 아담의 불순종 행위의 보편적 결과들에 대해 말하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 12-21절이다. 바오로의 이 본문이 창세기 2-3장의 설화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다.
Ⅱ. 구약성서에서의 타락
〔문 맥〕 창세기 2-3장의 문학 유형은 '구원사적 원인론' 또는 '지혜 이야기' 등으로 다양하게 범주화될 수 있는 만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창세기 2-3장의 문학 유형은 그런 점에서 독특한 것이다. 창세기 2-3장의 설화에 나오는, 원역사의 시초에 발생한 죄의 사건의 중심에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놓여 있다. 창세기 2-3장에서 '인간' 은 히브리어로 '하아담' (הָאָדָם), 즉 '사람' 을 뜻하는 '아담' (אָדָם)이라는 단어 앞에 '그' 를 뜻하는 정관사 '하'(הָ)가 놓여 이루어진 말로서, 고유 명사인 '아담' 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집합 명사로서의 '사람' 즉 인류를 가리킨다. 따라서 창세기 2-3장의 설화 안에 주제화되어 있는 죄의 사건은 연대기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어떤 개별 인간의 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이 원한 노선에서 벗어남으로써 인간이 보편적으로 처하게 된 인류의 죄스런 추락을 가리킨다. 현재의 문맥에서 볼 때, 이 죄의 사건은 창세기 12장 1-3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부르심 이야기로 전환하는 데 하나의 근거를 제공하는 죄의 역사의 첫 계기가 된다. 이 설화가 지닌 이러한 신학적 의미는 기원전 9세기 또는 10세기의 성서 저자인 야휘스트(J)에게 귀속된다.
그러나 현재의 문맥 안에서 이러한 신학적 의미를 갖게 된 창세기 2-3장의 이야기는 좀 더 이른 시기에는, 가나안의 종교 · 문화적 상황 안에 있는 고대 이스라엘의 시대 상황을 반영해 주는 다른 하나의 문맥 안에 있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현재의 문맥에서 따로 떼어 고대 가나안의 종교 · 문화적 상황 안에 놓고 보면, 이 이야기는 한 쌍의 인간 남녀의 원초적 상태와 죄로 인한 결과의 상
태, 즉 그들이 처해 있던 원초적 창조 상태와 가나안의 종교 문화에 유혹되어 자신들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왜곡시킨 결과의 상태를 보여준다.
이야기의 시작에, 하느님에 의해 인간이 만들어지지만 그는 혼자이다. 그래서 그를 위해 다른 생명체들이 만들어지며, 하느님은 그것들을 인간에게로 데려간다. 그러나 어느 것도 인간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자, 야훼 하느님은 그의 갈비뼈에서 그에게 적합한 협력자를 만든다. '남자' 인 그는 '여자' 라고 불리는 이 협력자를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 로서, 즉 자신과 같은 본성을 지닌 존재로 인정한다. 그러므로 이 설화는 여자를 남자에게 종속된 소유물로 보는 고대 근동의 여성관과는 대조적으로, 남녀의 관계를 창조주의 의도에 따른 평등성과 동등한 품위의 관계로서 표현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에 인간 남녀가 서로 소원해질 뿐 아니라, 심지어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비극적 상황을 일으킨 것은 "너희는 엘로힘(אֱלֹהִים, 하느님 또는 신들)처럼 될 것이다" 라는 뱀의 약속에 유혹당한 한 부부의 선택 때문이었다. 가나안의 주변 환경 속에 살던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나안 신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뱀은 가나안의 종교 세계를 시사함이 거의 확실하다. 즉 뱀은 풍요 다산과 지속적 생존을 중심에 둔 채, 여자를 한낱 생식을 위한 기능으로서 본 가나안 종교의 생명관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었을 것이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훼 종교를 거스르는 가나안 종교의 생명관을 따라 풍요 다산과 지속적 생존을 고집할 경우에, 이런 일은 야훼와의 사이에서 생 명의 친교 관계와 계약을 깨뜨리는 일이다. 또한 하느님의 창조 의도를 왜곡하는 일일 뿐 아니라, 여자를 남자에게 종속시키는 일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고대 가나안의 풍요 다산적 제의 종교에 대한 하나의 논박으로 볼 수 있다.
비록 이것이 근원적 문맥에서 본 창세기 2-3장 설화의 기본 취지일지라도, 이 이야기 안에 주제화되어있는 죄의 사건은 현재의 문맥에서는 죄의 역사의 첫 계기로서 아브라함의 부르심(12, 1-3)으로 시작되는 이스라엘 구원사의 서막을 형성한다. 즉 앞뒤 문맥을 고려한 현재의 문맥에서 볼 때, 천지 창조에 대한 사제계 설화(창세 1, 1-2, 4ㄱ)와 함께 인류 가족의 원역사(창세 1-11장)의 시작을 형성하는 창세기 2-3장의 야훼 전승 문헌 설화(2, 4ㄴ─3, 24)는, 야휘스트의 일련의 죄 이야기 전체의 시작으로서 창세기 12장 1-3절의 아브라함의 소명 이야기에 하나의 근거를 제공한다. 그 까닭은 야휘스트의 서사시 안에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오게 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그리고 지상의 모든 종족을 위해서 아브라함을 통해 죄의 파괴적인 효과들을 역전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타락의 본질〕창세기 2-3장의 설화는 창세기 전체에서 가장 상징성이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설화의 저자인 야휘스트는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 행위로서의 죄 또는 타락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상징적 언어를 통해 표현한다. 즉 이 설화는 자신과 동료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 안에 살면서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던 인간이 그 주변 환경에 의해 유혹을 받고, 하느님에 의해 세워진 창조 질서를 깨뜨리는 과정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뱀"의 상징성을 통해 탁월하게 묘사한다(3, 1-7).
이 설화에는 그 밖에도 생명 나무(2, 9)가 인간의 주변 환경에 속하는 피조물로서 나온다. 생명 나무는 이 설화의 끝(3, 22)에 다시 등장하는데, 여기서 생명 나무는 여전히 인간에게 유혹의 요소로 남는다. 그러나 야휘스트는 메소포타미아 종교 문화의 소재인 생명 나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중심으로 독창적으로 전개한다.
야휘스트의 묘사에 따르면, 인간은 창조된 시초에 하느님 곁에서 그분과 자유로운 친교를 나눈다(창세 3, 8). 이처럼 자유로운 관계 속에서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던 인간에게 하느님은 하나의 계명을 부여한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먹으면 안 된다"(창세 2, 16-17). 이로써 명령을 내리는 분과 어떤 구체적인 관 계를 더욱 새롭게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인간에게 열리게 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명령을 자신의 자유로써 따르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묘사와 함께 야휘스트는 또한 인간의 주변 환경과 거기에 속해 있는 온갖 피조물들의 외적인 영향에 의해 대부분 죄가 준비된다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경험하고는, 그것을 이 설화(창세 2-3장) 안에 표현해 놓는다(2, 9 ; 3, 6). 사실 인간은 자신이 보는 것을 가지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제거하거나, 그것을 자신의 지배 아래 두려고 한다. 즉 인간은 자기 앞에 설정되어 있는 이 경계를 가볍게 여긴 채 그것을 아주 쉽게 넘어서려는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도 그를 도와 주는 하나의 동료 인간이 그에게 제의할 때, 그리고 그 동료 인간이 자기 앞에 설정된 경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그를 설득할 때 특히 그러한 경향이 있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대자연이라는 물질적 환경과 동료 인간이라는 사회적 환경이 쉽게 유혹자 또는 유혹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물론 야휘스트는 이 태고의 설화에서 동료 인간을 유혹자로 개입시키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이미 창조되어 있는 주변 세계에 속한 피조물로서 "하느님이 만드신"(창세 3, 1) 뱀과, 먹음직스럽고 사랑스런 모습으로 사람을 꾀는 "탐스런"(3, 6) 나무 즉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유혹자 또는 유혹하는 것으로 개입시킨다.
먼저, 죄의 유혹 이야기(창세 3, 1-7)에는 한 쌍의 인간 남녀 곁에 제3자인 뱀이 인간의 유혹자로 등장한다. 야휘스트는 이 유혹자가 하나의 초세계적인 신적 힘이나 사탄 또는 악마(지혜 2, 24 참조)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하나의 피조물 즉 인간 주변 환경으로서의 창조계에 속하는 하나의 피조물이라고 명백히 표현한다(창세 3, 1). 다시 말해 창세기 2-3장의 저자인 야휘스트는 뱀을 피조물의 질서에 속한 현상을 위한 하나의 암호, 즉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 종교가 만들어 놓은 종교적 세계의 암호로 사용한다. 그런데 피조물의 질서에 속한 현상으로서의 이방 종교의 세계는 풍요 다산 및 생명과 지속적 생존을 내세워 인간을 현혹시킨다. 야휘스트는 야훼 종교를 거스르는 이러한 위험스런 이방 종교의 한 상징으로 뱀을 인식하여, 뱀에게 풍요 다산과 불멸하는 생명 을 미끼로 사람들을 죄로 유인하는 유혹자의 역할을 배정한다. 사실 고대 가나안인들은 풍요 다산을 가져오는 불멸의 신들과 뱀을 연관지어 생각하였다. 즉 뱀은 풍요와 다산의 표지이자 생명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의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신들을 상징하는 하나의 형상이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1절에서는 뱀을 탈신화화하여 신적 기운을 지니지 않은 한낱 피조물로 묘사할 뿐 아니라, 심지어 3장 14절에서는 그 피조물을 땅바닥을 기며 먼지를 먹는 파충류로 강등시킨다. 그러므로 야휘스트에게 있어서 뱀은 탈신화화된 존재로서, 인간의 주변 환경에 속하는 하나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설화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의미에 대해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상징적인 해석을 해 왔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선과 악 은 '사람에게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 또는 '행복과 불행' 을 뜻하는 기능적 의미 외에도, '모든 것' 을 뜻하는 포괄적 의미를 갖는다. 즉 '선과 악' 이라는 표현은 서로 대립되는 것들로써 전체를 표현하는, 또는 연속되는 것의 처음에 있는 것과 마지막에 있는 것으로써 전체를 표현하는 '최소한의 구별법' (merism)이라고 불리는 문학적 비유법의 하나이다. 예를 들면 시편에서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139, 2)라고 할 때, '앉고 서다' 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신체적 움직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창세기 2장 17절에 나오는 '선과 악' 이라는 표현은 최소한의 구별을 통해 전체를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 기법에 속한다. 그리고 히브리어에서 '알다' 라는 말은 지성적인 앎뿐 아니라 경험적이고 관계적인 앎도 뜻한다. 결국 선악에 대한 지식은 전체에 대한 포괄적 · 보편적인 지식을 가리키며,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의 행복에 관한 실천적 지식 즉 지혜와 관계된다.
그런데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모든 것에 대한 포괄적 지식에 이르려면, 또는 자신의 행복에 관한 통찰로서의 참된 지혜에 이르려면 그에 앞서 일정한 시험 과정을,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고 조심스레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는, 인간이 인내로이 그 시험 과정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주어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간은 신적 계명인 '신율' (神律)에 충실히 머무는 대신, 하느님처럼 되려는 교만으로 성급히 자신에게 '자율' 을 부여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그 때문에 야휘스트는 인간의 죄 안에서, 자신의 유한성과 한계를 넘어 무한하신 하느님처럼 되려는 또는 이방 종교의 불멸하는 신들처럼 되려는 인간의 마음을 간파한다. 사실 불멸성 즉 "죽지 않는다" (창세 3, 5)라는 것은, 고대 근동의 문맥 안에서 볼 때 인간이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하나의 신(神)이 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왜냐하면 하느님 또는 신들만이 불멸하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야훼 종교를 거스르는 이방 종교를 상징하는 암호인 하나의 피조물로서의 뱀이 인간을 유혹하며 한 말은 이런 문맥에서 이해될 수 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엘로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3, 4-5). 결국 인간은 동료 인간과 함께, 즉 뱀의 유혹에 넘어간 자신의 아내와 함께 신들처럼 눈이 열리는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먹고 난 다음, 참된 지혜에 눈을 뜨게 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부끄러움을 의식하는 데 눈을 떴다고 야휘스트는 반어적(反語的)으로 묘사한다. 이로써 죄의 유혹 이야기(3, 1-7)는 절정(3, 6-7)에 이르며, 이를 통해 야휘스트는 하느님을 배제하면서까지 스스로 행복을 추구하였던 인간의 결말이 얼마나 참담하고 불행한 것인지를 보여 준다.
이렇게 볼 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흙에서 창조된 지상적 피조물인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생명의 주권' 과 '자율' 을 인간이 자의적(恣意的)으로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망각한 채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불순종으로서의 죄 또는 타락의 본질적인 면은, 자신의 유한성을 망각한 오만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을 대신하여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함으로써 하느님에 의해 자신에게 설정된 경계를 자신의 자유로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결국 죄 또는 타락의 본질은 하느님이 원한 '좋은(선한) 창조 질서' 로서의 신적 계명을 인간이 위반함으로써, 창조의 시초에 하느님과 동료 인간 및 자연 또는 인간 이외의 피조물들과 가진 원초적 친교 관계들이 깨진 데에서 성립한다. 이 친교의 깨짐과 하느님과의 계약 파기로, 인간을 포함한 전체 창조계는 고통스런 결과를 짊어지게 된다.
〔타락의 결과〕야휘스트의 신학에 따르면, 고통과 잘못 안에 있는 현존하는 세계는 원래의 창조된 세계와는 차이가 난다. 현실에서 본 창조계는 고통과 아픔으로 금이 가 있는데, 이처럼 창조에 여러 가지 균열이 생기고 인간의 현 존재에 분열이 생겨난 까닭은 하느님의 창조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잘못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야휘스트가 묘사하는 창세기 2-3장에 따르면, 인간은 하느님의 선한 창조 질서를 손상하는 죄를 짓고 낙원으로부터 추방됨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 뿐 아니라 동료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주변 환경 또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원초적 친교와 평화를 결정적으로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고통스런 현실 안에는, 인간의 탓으로 인한 이런 원초적 친교와 평화의 상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극적(劇的) 사건인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창세 3, 23-24) 또는 "낙원의 상실"이 반영되어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야휘스트는 창세기 2-3장의 설화에서 죄의 벌 또는 타락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여러 가지 한계 상황 안에 있는 인류의 현 실존 형태를 의미하는 '잃어버린 낙원' (paradise lost, 失樂園)의 상징성 안에 표현해 놓는다. 이 설화에서 낙원은 하느님이 머무는 장소 즉 하느님의 거처를 가리키며, 낙원에서 인간의 삶은 인간이 창조 시초에 하느님 가까이에서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고 다른 인간과 더불어 주변 환경과의 친화 안에서 친교와 평화를 누리는 근원적인 관계 속에 있었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낙원으로부터의 인간 추방 또는 낙원의 상실은 인간이 하느님의 거처로부터 분리되고 하느님의 현존으로부터 배제 · 소외된 채, 현실의 고통과 죄책 안에서 하느님을 부재하는 하느님으로서 체험하고 동료 인간들과 불화하며 땅 또는 주변 환경과의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상징한다. 즉 낙원의 상실은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창조의 시초에 누리던 근원적인 관계들을 모두 상실한 것을 가리킨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창조의 시초에 누리던 원초적 친교 관계들을 상실한 일은 먼저 하느님과의 사이에서 발생한다.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사이에서 큰 변화가 생겼음을 자신들의 반응에서 지각하게 된다. 이것은 죄를 지은 인간들이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느낀 사실(3, 7. 10)에서 엿볼 수 있다. "주 야훼께서 동산을 거니신 것"(3, 8)으로 묘사하는 대목이 시사
하듯이, 낙원에서 첫 인간들은 일상적인 삶 안에서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는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나서 그들이 느낀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인간이 하느님과의 사이에서 그리고 다른 인간과의 사이에서 누리던 원초적 친교와 평화가 그들의 존재 심층에서부터 깨졌음을 말해 준다. 여기서 부끄러움은 인간의 가장 낮은 신체적 차원에서부터 인간 전 존재를 지배하는 심각한 분열의 표지로 간주되는데, 이 부끄러움은 항상 가리고 숨을 데를 찾는 성향을 드러내며, 이런 현상은 하느님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진다(3, 10). 그 때문에 죄를 지은 인간들은 그들을 찾는 하느님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고 만다(3, 8). 이 설화는 이와 같이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반응에서 드러나는 인간 전 존재의 분열을 묘사함로써 인간이 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사이에서 누리던 원초적 친교와 평화를 상실하였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볼 때 죄에 대한 벌인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3, 23-24)은, 죄를 짓는 순간에 이미 인간 존재의 심층에서부터 발생한 하느님과의 소원한 관계가 다시 한 번 현실로 확정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의 죄는 항상 하느님에 대한 죄이자 동료 인간에 대한 죄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는 단순히 한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에 속한 인간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에게 불순종함으로써 인간은 하느님과의 사이에서는 물론 동료 인간과의 사이에서도 원초적 친교 관계를 상실하게 된다. 즉 죄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 사 회의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에도 분열을 일으킨다. 이 사실은 부부가 죄를 짓고 나서 서로의 앞에서 자신들의 알몸을 가린 데서 드러난다(3, 7). 특히 자기 변호의 기회를 준 하느님 앞에서 남자가, 하느님이 자신에게 주신 자기 아내를 유혹자라고 비난함으로써 인간 사회 구성원들 간의 연대 책임을 회피한다. 더 나아가 그러한 여자를 만든 하느님에게 궁극적으로 책임을 전가한 데서 드러난다 (3, 12). 이러한 방식으로 야휘스트는 이 설화에서, 죄가 단순히 한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에 속한 인간의 행위로서 공동체 또는 사회 안에서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그리고 인간들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하고 분열시키는지를 보여 준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창조의 시초에 누리던 원초적 친교 관계들을 상실한 일은 더 나아가 인간과 땅, 즉 인간과 주변 환경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하느님의 창조에 의해 인간과 땅 사이에는 본래 생명의 결속과 유대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 생명의 결속과 유대 관계는 창세기 2장 7절에서 "아담" (אָדָם, 사람 · 인간)과 "아다마" (אֲדָמָה, 땅 · 흙)라는 용어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인간과 땅 또는 주변 환경 사이의 원초적 친교 관계에 금이 가고 단절과 소외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생계를 위해 땅을 일구는 노동의 수고 · 주변 환경과의 투쟁 · 신체적 죽음(3, 17-19)과 같은 인류의 고통스런 현실 내지 현 실존 형태는, 하느님의 원초적 구원 계획과 인간의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틈과 상위(相違)를 상징하며, 인간이 하느님의 현존으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된 극적 사건인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3, 23-24) 또는 "낙원의 상실"을 반영해 준다. 그러나 생계를 위한 노동의 수고 · 주변 환경과의 투쟁 · 신체적 죽음 등은 인간의 구체적인 현 실존 형태임을 가리킬 뿐, 실질적이고 고유한 의미에서 죄의 벌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의 사이와 동료 인간과의 사이에서뿐 아니라 "자신이 나온 근원" (3, 23)인 땅과의 사이에서 원초적 평화와
안정을 상실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극적인 사건인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또는 "낙원의 상실"이야말로 첫 인간 남녀의 죄에 상응하는 실질적이고 고유한 의미의 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 부분인 임신에 수반되는 커다란 고통(3, 16), 즉 산고(産苦)도 죄의 벌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산고는 여자가 자기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환경 안에서 누리던 원초적 평화와 안정을 상실하였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한편 인간이 땅 또는 주변 환경 사이에서 누리던 원초적 친교 관계의 단절은 인간과 인간 이외의 다른 모든 피조물 사이의 관계 단절로 표상되기도 한다. 인간과 그 밖의 다른 피조물들 사이의 관계 단절이라는 표상은 뱀이 인간과 함께 벌을 받는다는 상징적 표현 안에서 발견된다(3, 14). 이것은 인간과 그 밖의 모든 창조계의 사물들이
"모든 피조물의 신음" (로마 8, 22)으로 표현되는 하나의 공동 관계 안으로 편입된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근원적이고 고유한 의미에서 죄의 벌 또는 타락의 결과는, 인간이 죄를 짓는 순간에 낙원에서 이미발생한, 그리고 낙원으로부터 추방됨으로써 다시 한 번 현실로 확정된 '원초적 친교 관계들의 총체적 상실' 이다. 즉 하느님과의 원초적 친교와 평화의 상실, 동료 인간과의 원초적 친교와 평화의 상실, 땅 또는 자연 생태계와의 원초적 친교와 평화의 상실, 그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자신과의 원초적 친교와 평화의 상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추방 또는 상실이 "인간의 기원과 잃어버린 낙원"(창세 2-3장) 설화의 마지막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편에서의 하느님과 소원해진 관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여전히 인간을 돌보심으로써 인간과의 친교를 계속 이룩해 나가시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를 뜻하는 "하와" (חַוָּה)의 이름에서 드러나듯이(3, 20),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변경되지 않은 채 인간 공동체인 인류 가족의 탄생을 통해 진행된다. 또 하느님이 인간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신 일에서 드러나듯이(3, 21), 이 일은 인류에 대한 하느님 편에서의 또 하나의 화해 표시이다.
Ⅲ. 신약성서에서의 타락
〔두 가지 명제〕 예수는 하늘로부터 사탄의 떨어짐 즉 사탄의 추락에 대해서 언급하지만(루가 10, 18), 인간의 떨어짐 즉 인류의 타락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창세기 2장 24절에 의거하여 "창조의 시초부터" 혼인이 불가해소적임을 천명하기 위해 혼인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창조의 신비에 호소하는 예수의 말씀(마르 10, 1-11 ; 마태 19, 1-9)은, 그 배경에 타락과 구원의 신비가 놓여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보여 준다. 신약성서는 여러 곳에서 명시적으로, 특히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명백히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죄로부터의 구속(redemptio, 속량)을 필요로 한다" 라는 명제를 언급하였다. 이 명제를 더 정확히 표현하면, 모든 인간은 죄인인데 그 까닭은 모든 인간은 유일한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이 첫 번째 명제와는 달리, 두 번째 명제 즉 "모든 인간이 첫 번째 인간인 아담의 죄와의 연대성 안에 있다" 라는 정형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으며, 오직 두 번만 명확히 이것을 정형화하고 있다. 이 정형은 오직 바오로에 의해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 12절과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장 21-22절에서 언급되는데, 그곳에서도 부수적으로만 언급된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와의 연대성으로 인한 인류의 타락을 가리키는 두 번째 명제가 신약성서 안에서 첫 번째 명제와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첫 번째 진술은 전체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대를 이룬다. 만일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더이상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받아야 할"(사도 4, 12) 유일한 존재가 아닐 것이다. 이에 반해 두 번째 진술은, 그것 없이는 첫 번째 진술이 성립할 수 없는 한에서만, 그리스도교 교의(敎義)의 토대를 이룬다. 따라서 이 두 번째 진술은 오직 상대적으로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의 신비의 예증인 아담의 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인간의 타락을 표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인 구절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 12-21절이다. 여기에서 바오로는 "아담은 장차 오셔야 할 분의 예형"(14절)이라고 말하면서, 아담의 죄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원 의미를 제시하였다. 즉 한 사람을 통해 죄와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왔지만(12절 ; 참조 : 15-18절),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을 통해(15절, 17-18절) 그리고 그분의 순종을 통해(19절)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잘못의 탓에 결부된 인간의 보편적 상황이 첫 인간인 아담의 죄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신약성서에서 오직 바오로에 의해서만 두 구절(1고린 15, 21-22 ; 로마 5, 12)에서 명백히 언급되며, 다른 구절들에서는 암시만 되어 있다(로마 7, 7-9 ; 에페 2, 3). 특히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 12-14절에서 아담과 그의 죄가 가장 분명히 언급된다.
두 구절(1고린 15, 21-22 ; 로마 5, 12-14)의 본문에서바오로의 고유한 의도는 그리스도에 의해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장은 모든 인간의 부활의 표지인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말하며,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은 모든 이를 의화(義化)하는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아담의 역할은 항상 종속절 안에서 언급되며, 따라서 아담의 위치는 그리스도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아담의 존재는 오직 그리스도의 중요성을 일정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더 잘 이해시키고, 정당화하기 위한 문맥 안에 위치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는 데 있어서 아담이라는 첫 번째 구성원(membrum, 지체)은 항상 그리스도라는 두 번째 구성원을 이해시키고 예증하는 과제를 갖는다. 그 때문에 바오로는 덜 알려져 있는 존재를 조명하기 위해 더 잘 알려져 있는 존재에서 출발한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 12-21절에서 아담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구원 기능보다 더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 하지만 바오로는 아담에 대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리스도는 아담이라는 인물보다 훨씬 더 분명히, 바오로의 선포의 내용이자 목표이다. 따라서 바오로는 아담에 대한 진술들에서 지금까지 결코 듣지 못하였던 하나의 새로운 진리를 선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가 아담의 실존이나 죄를 증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바오로에게 있어서 온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의 탓, 죄의 보편성, 모든 인간의 연대성은 이미 알려져 있던 구약성서로부터 증명된 사실들이었다. 이 사실들은 그가 증명하려는 목표가 아니라, 그 전제이자 수단이다. 결국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을 밝히고 명확히 하기위해 이 사실들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며, 그가 활용하였던 이 사실들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와의 연대성 안에 있다"는 타락에 대한 가르침의 기본 요소들이 된다.
IV. 신학에서의 타락
〔역사적 흐름〕 타락에 대한 가르침의 요소들이 성서에서 발견될지라도, 타락 교리의 최종 형태는 성서의 본문들에 대한 정밀한 독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타락' 이라는 명칭 자체에서 드러나듯이 후대의 발전된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타락에 대한 표준적 이해를 제공한 구절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 12-21절이다. 이 대목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원 의미를 "장차 오셔야 할 분의 예형인 아담" (5, 14)의 죄에 대한 반립 명제적 의미로서 제시하였다. 즉 한 사람을 통해 죄와 죽음이 들어왔지만(5, 12 ; 참조 : 5, 15-18), 한 분 그리스도를 통해(5, 15. 17-18) 그리고 그분의 순
종을 통해(5, 19) 하느님의 은총이 넘쳐 흐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부들은 이 본문을 창세기 3장에 대한 해석과 함께 '원죄' 라는 더 큰 시나리오 안에서 성찰하였으며,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 시대에 와서 타락에 대한 고전적 견해의 큰 윤곽이 형성되었다.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교부들의 성찰에 따르면, 전 인류 가족에게 전달되는 원죄는 죽은 후 부활한 그리스도의 순종적 수난과 죽음을 통해 제거되며, 그리스도의 이 구속 사업은 세례를 받고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하여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에게서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죄의 신비에 대해 충만히 발전된 이런 설명에 따르면, 뱀은 악마와 동일하고 아담의 죄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온 인류에게 전달되며 원죄의 파국은 우주적이다.
교회는 아우구스티노가 펠라지우스주의를 거슬러 은총을 설명한 이래 명시적으로 죄와 그 결과들에 대한 진리들을 신앙의 진리들로 부각시켰고(418년 카르타고 교회 회의의 가르침, DS 222 ; 539년 오랑주 교회 회의의 가르침, DS 371),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원죄에 관한 교령, DS 1510-1516)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만일 누가 다음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즉 첫 인간 아담이 낙원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범함으로써 자신이 입은 거룩함과 의로움을 즉시 잃어버렸고, 자신의 죄로 하느님을 모욕함으로써 하느님의 노여움과 불쾌함을 사 그 결과로 하느님이 예고하신 죽음을 자초하였으며, 죽음과 함께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히브 2, 14)인 악마의 권세에 매여 갇히는 신세가 되었고, 자신이 끼친 죄의 모욕으로 몸과 영혼이 전인적으로 더욱 나쁜 차원으로 변화되었음(DS 371 참조)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단죄될 것이다" (DS1511).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의 이 진술은 창세기3장의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바오로의 신학에 의거하고있다. 이 고전적 견해에 따르면, 타락의 결과들은 '낙원의 상실' , '죽음' , '몸과 영혼이 전인적으로 더욱 나쁜 차원으로 변화됨' 으로 요약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타락의 결과는 하느님의 현존으로부터 소외와 분리를 뜻하는 은총의 상실로서의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하느님의 현존으로부터의 소외와 분리의 가장 깊은 작용인 '죽음' , 그리고 세계의 전체 상황 안에서 '인간의 몸과 영혼이 더욱 나쁜 차원으로 변화됨' 이다.
오늘날 교의 신학에서 타락의 가르침은 창조론 내지 시원론, 또는 죄론 내지 인간론에서 다루어진다. 죄론 연구의 대표적인 교의 신학자로 꼽히는 슈오넨베르크(P.Schoonenberg, 1911~1999)에 따르면, 타락의 결과는 세상의 죄와 죄 안에서 인간의 연대성으로 규정될 수 있다. 즉 타락의 결과는 세상의 죄에 의해 인간이 처해 있는 죄스런 상황(sündige Situiertheit)으로 요약되며, 이런 죄스런 '상황 안에 놓임' (Situiertsein)이 인간의 실존을 '사랑에 대한 무능력' , '악의 경향' , '고독과 불안' 으로 규정한다.
한편 현대에 들어와서 창세기 1장의 창조 설화뿐 아니라 원역사(창세 1-11장)를 생태학적 관점에서 보려는 성서 신학적 동향이 눈에 띈다. 구약성서 학자 앤더슨(B. W. Anderson)에 따르면, 원역사는 환경 윤리 또는 생태신학을 논의하는 데 결정적인 성서적 토대가 된다. 환경 윤리 또는 생태 신학에 대한 논의는 창조주가 인간에게 자연에 대한 지배를 허락하였다는 주장이 함축하는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 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루어지거나, 인간과 인간 외의 피조물 사이의 관계에 대한 더욱 균형있는 신학적 이해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B.W. Anderson, Creation and Ecology). 이 관점에서 창세기 2-3장을 해석해 보면, 타락 설화에는 인간의 죄스런 행동의 신학적이고 사회 · 인간학적인 요소뿐 아니라 생태학적 요소도 발견된다. 사실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관계 존재' 로서 하느님과의 사이에서, 동료 인간과의 사이에서, 그리고 주변 환경 또는 생태계와의 사이에서 원초적 친교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인류 역사의 시초에 발생한 죄의 사건 영향으로 하느님과의 사이에서, 동료 인간과의 사이에서, 땅 또는 생태계와의 사이에서, 그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의 사이에서 원초적 평화와 안정을 상실함으로써 죄스런 상황에 놓이게 되고, 인간 본성에 상처를 입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타락의 결과는 원초적 친교 관계들의 총체적 상실로 규정된다.
〔신학적 진술로서의 집단 인격〕 타락 설화에 대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제기할 수 있는 물음은 "어떻게 첫 인간의 불순종 행위가 전 인류의 타락을 의미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물음은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주인공이 일반적인 인간 즉 인간 전체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고유 명사인 아담이라 불리는 한 개인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옛 번역들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하아담' (그 사람, 그 인간)을 고유 명사인 '아담' 으로 옮겼지만, 현대 번역들은 집합 명사인 '인간' 으로 옮긴다. 왜냐하면 여기서 '하아담' 의 '아담' 은 집합 명사로서의 '사람' 또는 '인간' 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람 일반, 곧 인간 전체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 그는 온 인류를 대표한다. 하지만 사람 일반을 나타내고 온 인류를 대표하는 그 주인공은 동시에, 그 이전에는 "흙을 일굴 사람도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창세 2, 5)라는 점에서 인류의 첫 조상인 한 개인을 의미한다.
현대인들이 한 개인과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별개의 개념으로 엄격히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공동체적 연대성' 안에서 한 개인과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단일하게 이해하였다. 구약성서에서는 한 집단 또는 부족 공동체와 한 개인 사이의 관계를 '집단 인격' (corporate personality으로 표상하는 문학 형태가 발견되며,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주인공
도 이런 '집단 인격' 의 표상으로 이해된다. 집단 인격이란 말의 뜻은 이중적이다. "첫째로 한 개인이 참으로 집단적이라는 것, 즉 한 개인이 그 기능에 있어서 한 단체와 동일하다는 것이고, 둘째로 이러한 집단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그 개인은 적어도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 규정되는 하나의 개별 인격이라는 것이다" (J. de Fraine). 이런 집단 인격의 사상에 따르면, 한 단체 또는 부족의 운명은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간에 그 조상 또는 우두머리에 의해 결정된다. 사실 창세기 11장까지의 원역사에서, 인류의 첫 조상의 죄는 기름에 물방울이 퍼지듯이 급속히 인류에게로 확산됨으로써 인류의 역사는 첫 조상의 첫 번째 불순종 행위에 의해 각인된다(6, 5). 이런 의미에서 온 인류를 대표하는 첫 조상의 불순종 행위는 타락의 모형으로서, 온 인류 역사에 영향을 미치며 전체 인간의 타 락을 결정한다.
그런데 한 집단 또는 공동체와 한 개인 사이의 관계를 '집단 인격' 의 표상 또는 '집합 인격' (collective personality)의 상념 안에서 표현하는 방식은 사도 바오로의 '아담-그리스도 예형론' 이 전개되는 신약성서의 본문(로마 5, 12-21)에서도 발견된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죄인이 된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 다" (5, 19). 이 본문(5, 12-21)에서 바오로는 첫 조상인 아담의 타락에 의한 인류의 죄와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인류의 구원과 뚜렷이 대비시킨다. 이로써 창조와 타락이 더 큰 신적 계획 안에, 곧 구원사라는 웅장한 드라마를 펼치는 하느님의 더 큰 구원 계획 안에 포섭되어 있다는 사실이 계시된다. 그러면서 바오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수한다. 그 사실이란 죄의 연대성 안에 있 는 인류는 첫 아담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온 인류는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의 연대성을 향하도록 하느님에 의해 계획되어 있다는 것이다(로마 5, 14-15 ; 1고린 15, 22. 45). 아담의 타락에 대해 말하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 12절 이하 본문의 결정적인 동기는, 의심할 여지없이 조상에게서 후손들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 본문에서 집단 인격의 상념을 떠올리는 것은 유용하다. 그러나 이 표상은 여기에서 보조적인 역할만을 할 뿐이고, 적어도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집단 인격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할 경우 바오로의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인 통치자의 특성, 즉 부활하여 우주의 통치자로 임명된 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특성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박탈한 채, 그분을 우리 조상의 하나 또는 우두머리의 하나로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적 전망〕 타락은 온 인류 가족의 죄스런 상태와 그리스도에 의한 모든 인간의 구속 또는 구원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표준 용어이다. 신학적 관점과 사회 · 인간학적 관점뿐 아니라 생태학적 관점을 고려하는 현대 신학의 흐름 안에서 타락의 의미를 규정해 볼 때, 타락은 인간이 하느님에게 불순종하여 하느님의 선한 창조 질서를 위반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사이에서, 동료 인간과의 사이에서, 그리고 자연 또는 생태계와의 사이에서 누리던 원초적 친교 관계들을 총체적으로 상실한 것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이런 원초적 친교 관계들의 총체적 깨어짐과 상실로서의 타락은 또한 하느님 · 동료 인간 · 자연 또는 주변 환경에 대한 인간 사랑의 무능력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선 또는 아무런 한계도 없는 무한한 사랑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긍정하는 것일 뿐, 부분적인 선 또는 제한된 사랑에 대한 인간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 동료 인간 · 자연 또는 주변 환경에 대한 사랑의 무능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가족애, 조국애, 자기 지역의 자연 환경 또는 생태 환경에 대한 배려, 좁은 의미의 성실성, 원수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지 않는 좁은 의미의 이웃 사랑과 같은 부분적인 선 또는 제한된 사랑에 대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 · 동료 인간 · 자연 또는 주변 환경에 대한 사랑의 무능력은 인간 본성이 죄로 말미암아 상처입게 되었음을 뜻할 뿐, 인간 본성이 완전히 부패하였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류' , '타락한 인간성' 이라는 표현보다는 '죄로 말미암아 상처입은 인류' , '상처입은 인간성' 이라는 표현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죄와 그 탓으로 고통스런 결과에 연루되어 있는 세상을 가리켜 '타락한 세상' 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바오로는 인간을 위해 창조된 물질 세계가 인간의 죄 때문에 저주받았다는 창세기 3장 17-19절을 상기시키면서, 모든 피조물이 인간과 함께 부패의 종살이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한다(로마 8, 20-22). 인간은 관계 존재이다. 즉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리고 동료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갈 뿐 아니라, 자연 또는 생태계와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런데 인간이 온 인류 역사의 시초에 죄를 지음으로써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 및 인간과 동료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는 물론이고, 인간과 자연 또는 생태계 사이의 관계에서도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이처럼 인간과 자연 또는 생태계 사이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게 된 이유는, 땅 또는 생태계 안의 모든 피조물은 같은 피조물로서 인간과 더불어 생명의 결속 관계 속에서 하나의 공동 운명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창조계 안의 다른 모든 피조물도 또한 죄로 상처입은 인간의 운명에 연루되어 함께 상처를 입은 채 부패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타락한 세상' 이라는 표현보다는 '상처입은 창조계' 또는 '부패에 종속된 피조물들' 이라는 표현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 구원 ; 낙원 ; 생명 나무 ; 아담 ; 원죄 ; 죄 ; 창세기 ; 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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