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치투스,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Tacitus, Gaius Comelius(5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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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죽음을 언급한 《연대기》는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다(빌라도 앞에 선 예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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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죽음을 언급한 《연대기》는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다(빌라도 앞에 선 예수) .


로마의 정치가. 역사가. 그리스도교 밖에서 예수 그리 스도의 역사적 실재를 증언한 인물. 문헌을 통해 그리스 도인에 대한 박해를 증언한 최초의 이교인. [생 애] 타치투스는 주로 그리스도교의 박해 시기 중 에 주요 생애를 보낸 사람이다. 그의 탄생 연도는 명확하 지 않지만 클라우디우스 황제(41~54)의 재위 말기를 전 후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어릴 때부터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 수사학을 공부하였고, 20대 초반에 아그리콜라 (G.J. Agricola, 40~93)의 딸인 율리아(Julia Agricola)와 결 혼하였으며, 베스파시아누스 황제(69~79) 시기부터 공 직 생활을 시작하여 티투스 황제(79~81) 치하에서 25세 의 나이로 호민관(tribune)이 되었다. 타치투스의 가문에 관한 자료는 없지만, 그의 이름과 이른 정치적 출세로 볼 때 갈리아(현 프랑스) 지역의 행정 장관(procurator)이었던 코르넬리우스 타치투스(Comelius Tacitus)의 아들로 추측 된다. 이는 타치투스의 동시대 인물인 플리니우스(G. Plinius, 61/62~113?)의 글에서 증언되고 있다. 서기 81년에 형사 재판관(quaestor)이 된 타치투스는, 이후 법률가와 웅변가로 명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러 나 89~93년까지 중앙의 정치 무대를 떠나 지방에 머물 렀고, 이때 게르만 민족과 접촉을 시도하였던 것으로 보 인다. 93년에 사망한 그의 장인 아그리콜라를 기리는 저 서 《아그리콜라의 생애》(De vita Iulii Agricolae, 97/98)에서 는 93~96년까지 도미티아누스 황제(81~96) 치하에서 로마 시민들이 겪은 고통을 섬세하게 묘사하였다. 타치 투스의 생애 후반에 관한 기록은 플리니우스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97년에 사망한 베르지니우스 루푸 스(L. Verginius Rufus, 15~97)의 뒤를 이어 집정관이 되었 으며, 99년에는 플리니우스와 더불어 정적이었던 프리 스쿠스(Marius Priscus)의 실정에 따른 탄핵에 앞장서 성 공을 거두고 이로 인해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감사를 받 았다. 112년에는 아시아와 서부 아나톨리아를 관리하는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관리직으로는 최고 의 위치였다. 도미티아누스의 후계자인 네르바(96~98)와 트라야누 스(98~117) 시기에 그는 《아그리콜라의 생애》에서 고백 하는 것처럼 '축복받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 황제들 역시 폭군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폭정을 논하는 《역사》 (Historiae, 115/116)에는 로마 제국주의의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어 있다. 타치투스가 115~117년에 걸친 트라야누스 황제의 성공적인 동방 원정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 무 렵까지 생존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3세기 로마의 황제 타치투스(275~276)는 스스로 타치투스의 후손이라 고 밝히고, 그의 저서 10부를 매년 복사해서 공공 도서 관에 보관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그를 기념하는 무덤 을 건설하도록 하였는데, 이 무덤은 교황 비오 5세(1566 ~1572)의 명령으로 파괴되었다. [저 서] 타치투스의 문체는 치체로(M.T. Cicero, 기원 전 106~43)와 비교될 정도로 뛰어나다고 인정받고 있다. 그는 글을 쓸 때 문장 구조 전체를 미리 생각하고, 그것 을 글로 옮길 때에는 웅변적이고 장엄한 문체를 사용하 였다. 그런 가운데 내용을 최대한 압축하여 표현함으로 써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정확히 드러내었다. 《연대기》(Annales, 117?) : 《연대기》와 《역사》는 아우 구스투스 황제(기원전 27~서기 14)의 서거 때부터 도미 티아누스 황제의 서거 때까지 1세기 동안 로마 제국의 연대기적 역사에 관한 책인데, 그중 《연대기》는 타치투 스의 마지막 작품으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서거 때부터 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총 16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7~10권 전체와 5, 6, 11, 16권의 일부는 전 해지지 않는다. 6권에는 티베리우스 황제(14~37)가 서거 할 때까지의 기록이 나와 있고, 7~12권은 칼리굴라 황 제(37~41)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재임 기간의 일들을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16권의 후반부도 없는데, 소실된 것인지 아니면 저술을 완성하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나머지들은 모두 68년 6월에 사망한 것으로 추 정되는 네로 황제(54~68) 시기의 역사를 담고 있다. 결 국 칼리굴라 황제 재위 기간 전체, 클라우디우스 황제 재 위 초기 6년, 네로 황제 재위 마지막 3년에 대한 내용은 사라져 전체적으로 54년 동안의 역사 중 40년의 기록만 남아 있다. 이후의 역사는 《역사》에 이어져 있다. 《역사》 : 이 책은 69년 갈바 황제(68~69)의 사망부터 96년 9월 18일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사망할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본래 12권으로 저술된 《역사》에 서 네 번째 권까지와 5권 일부만이 남아 있는데, 그 안에 는 갈바, 오토(69), 비텔리우스(69) 재임기의 역사가 매 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5권에는 유대인에 관한 내용 도 있다. 변방의 식민지 민족인 유대인의 특성, 풍습, 종 교 등을 당시 로마의 관점에서 논하고 있는데, 매우 깊은 편견을 가진 시각에서 논술되어 있다. 《게르마니아)(Gemanania, 98/99) : 이 책의 원제목은 《게 르만의 기원과 지리에 관하여》(De origine et situ Germanorum이며,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게르만족에 관한 자 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런데 게르마니아 지역의 지리 에 관한 정보는 매우 부정확한데, 이는 타치투스가 이 지 역을 실제로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이 저서에서 게르만족을 이른바 '품위 있는 야만인' (noble savage)으로 묘사하였는데, 이는 타락해 가는 로마인에 비해 게르만족이 도덕적으로 더 나아 보였기 때문인 것 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내용 덕분에 이 책은 16세기 이 후 독일에서, 특히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타치투스는 게르만족의 강인하고 호전적 인 특성을 적시하고 장차 로마 제국에 위협이 될 수 있다 고 하였다. 이 책에는 게르만족 외에 로마 제국과 관계를 맺는 많은 부족명이 언급되나, 상당한 내용이 사실과 다 르다는 것이 학자들의 연구로 밝혀졌다. 예를 들면 바타 비(Batavii) 부족은 게르만족이기보다는 켈트족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토이토부르거(Teutoburger) 전투' 로 명명된 사건도 실제로는 토이토부르거 계곡(saltus Teutoburgiensis)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아그리콜라의 생애》 : 이 책은 당시 로마의 유명한 장 군이며 타치투스 본인의 장인인 아그리콜라의 생애를 담 은 책이다. 타치투스는 이 책에서 당시 위대한 정치가였 던 아그리콜라의 삶을 매우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 한 브리타니아(현 영국) 지역의 당시 지리와 인종에 관한 이야기도 잠깐 언급하면서, 게르만족과 마찬가지로 브리 타니아 지역 주민의 자유와 로마 제국의 타락과 독재를 대비하여 서술하였다. 이 책은 현재도 탁월한 전기로 평 가받고 있다. 《대화》(Dialogus de Oratoribus, 76/77) : 로마 법정에서 들은 저명 인사의 말을 옮겨 적은 형식의 이 책은, 로마 제국의 웅변술의 퇴보에 관해 논하고 있다. 특히 로마 제 국의 교육 제도가 열악해지고 있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이 저서의 문체는 치체로를 닮았는데, 이는 퀸틸리아누 스(M.F. Quintilianus, 35?~95)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여겨 진다. [사 상] 타치투스는 역사적 사건을 연속적으로 연결하 여 가감 없이 서술하고, 사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도덕 적 교훈을 제시하며, 구체적 사건을 매우 극적으로 묘사 하였다. 또한 그의 글에는 인간 본성의 작용과 권력의 속 성에 관한 비관주의적인 통찰력이 담겨 있는데, 주로 로 마 원로원과 황제 간의 권력 다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로마 지배층의 부패와 폭정에 관한 내용으로 가 득 차 있는데, 이들이 전통적인 언론의 자유에 대한 존중 과 스스로에 대한 존경심을 잃고 황제에게 아부하는 계 층으로 전락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타치투스는 황제에게 집중된 권력과 그에 따른 부패를 혐오하였고, 모든 황제들을 부패한 인물로 묘사하였지만 내란과 무정 부 상태는 더욱 싫어하였다. 그는 여러 로마 황제 중 특 히 티베리우스 황제를, 원로원의 정적을 몰아내고 고문 과 사형을 가하였다는 이유로 극도로 사악한 인물로 묘 사하였다. 그러나 타치투스가 기록한 역사가 어느 정도 사실인지 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어 왔다. 특히 《연대기》의 일부는 출처가 불분명한 자료를 근거로 저술되었고, 도미티아누 스 황제의 폭정에 시달린 경험을 바탕으로 로마 황제를 비난하는 형태로 기술되고 있다. 그의 《역사》는 자신이 모은 1차 자료와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의 경험을 바탕 으로 저술된 것으로 《연대기》보다는 좀 더 사실에 가까 운 묘사를 하였다고 여겨지지만, 이 역시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대한 개인적 증오가 반영되었다. 타치투스의 기 록 대부분은 황제의 개인적인 서류나 기록 또는 당시의 소문에 의존한 것이어서 얼마나 객관적이고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고위 공직자로 활 동하면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고급 정보를 접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의 기록에는 네로 황제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Agrippina, 15~59) 및 트라세아 패투스(P.C. Thrasea Paetus, ?~66), 헬비디우스 (Helvidius) 등과 같은 당시 유명 인사들의 전기나 플리 니우스의 편지 등도 인용되고 있다. 또한 그는 당시 원로 원 속기록인 '원로원 일지' (acta senatus), 그리고 일종의 잡지인 '대중 일지' (acta populi)와 '일간지' (acta diurna) 등도 인용하였다. 이러한 타치투스의 기록은 1세기 로마의 삶을 생생하 게 전달하는 매우 귀중한 정보이다. 당시 부패한 황제들 에 대한 로마 문학의 이른바 '은시대' (silver age)의 특징 을 반영하는 웅변적 서술이 현재 시각으로는 과장된 것 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가 말한 것처럼 "역사의 가장 중 요한 기능은 (역사의) 공과를 망각으로부터 구해 내고, 후세의 평가를 위한 기초가 되는 언행을 보존하는 것이 다. 그는 비록 고결한 도덕이 어느 정도 완화제 역할을 한다고 해도 어느 시대든 부패하기 마련이라고 확신하였 으며, 이러한 부패가 제국의 황제권과 연관이 있다고 생 각하였다. 그의 주 관심사는 정치보다는 도덕이었다. 그 러나 그는 제도로서의 제국의 필요성은 인정하여, 스토 아 학파처럼 황제 중심의 정치 제도보다는 황제 개인의 행적을 더 문제로 삼았다. 그래서 개인의 성격을 정의하 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는 역사 기술을 하면서 등장 인물들의 내적 동기와 심리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인간 내면의 묘사가 얼마나 정확한지 에 대한 논의가 있을 수 있으나, 인간의 위선을 드러내는 데는 탁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타치투스의 문체에 영향을 준 사람은 살루스티우스(G. Sallustius, 기 원전 86?~35/34)였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언급] 타치투스의 종교에 대한 입 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점성술이나 일종의 신 비한 능력을 통한 예시 등에 관심을 갖고, 인간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고 믿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특정한 신앙을 갖지는 않았지만, 에피쿠로스 학파와는 반대로 세계를 지배하는 신성한 섭리자의 존재를 믿었다. 타치투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20여 년 후 에 태어나 복음서와 바오로 서간이 완성되거나 작성 중 이던 서기 1세기를 전후한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였기 때 문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찾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그가 그리스도교와 깊은 연관을 맺 게 된 것은 《연대기》에 나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 한 내용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행적에 대한 내용은 성서 외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나므로, 요세푸 스(F. Josephus, 37/38?~100?)의 작품과 타치투스의 《연대 기》는 매우 중요한 교회사적 가치를 지닌 자료이다. 타 치투스는 이방인인 로마의 고위 정치가이자 세속적 역사 가의 관점에서 그리스도교를 기술하였기 때문에 학문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부드러운 영향력 행사와 황제의 넉넉한 인심 그리고 신에게 호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소문은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건 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말까지 돌았다. 그래 서 그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네로 황제는 일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매우 잔인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리스도교라는 명칭의 기원인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 황제 제위 기간에 폰티우 스 필라투스(본시오 빌라도) 총독에 의해 사형을 당하였 다. 그러나 잠시 동안 그 세력이 줄어드나 싶더니 곧 이 종교는 유대인이 살던 지역뿐 아니라 로마에서까지 폭발 적으로 늘게 되었다"(《연대기》 15권 44절 2~3항) . 타치투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염세적인 세계관을 가진 이유로 그러한 벌을 받을 만하 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한 네로가 그리스도인들에 게 가한 고문 사례를 직접 묘사하였다. 그런데타치투스 는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보는 오류를 범하 였고, 그의 《역사》(5권 3절 4항)에 나오는 대로 유대인에 관한 지식은 이들에 대한 중상모략적인 편견에 기초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특 히 로마의 그리스도교에 관한 기록을 남김으로써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 할 수 없다. 초기 로마 그리스도인들의 순교에 관한 전승 의 근거가 그의 기록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중요한 것이다. [영 향] 타치투스의 저서들이 본격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그의 사후 1,500여 년이 지난 근세 초기 무렵이다. 특히 마키아벨리(N. Machiaveli, 1469~1527)가 타치투스 의 저서를 탐독하였는데, 그의공화정에대한 우호적인 서술은 프랑스 혁명가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최근에는 미국의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공격을 옹호하는 집단이 타치투스의 《아그리콜라의 생애》에 나오는 '제국의 악에 대한 논박' 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 참고문헌  Ronald Syme, Tacitus, vol. 1~2, Oxford, Oxford Univ. Press, 1985/ W.R.F. Tongue, (NCE) 13, 2003, PP. 729~730. [李種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