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랑 페리고르, 샤를 모리스 드 Talleyrand-Périgord, Charles Maurice de(1754~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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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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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주교. 정치가. 외교관. 정치와 금전에 대한 집착으로 프랑스 대혁명(1787~1799) 직전부터 나폴레옹 (1799~1814/1815) 시대를 거쳐 왕정 복고, 루이 필리프 (1830~1848)의 통치 시기까지 고위 관직을 역임하며 뛰 어난 정치적 생명력을 보유하였던 인물이다. [생 애] 성직자로서의 활동 : 1754년 2월 2일 파리에 서 샤를 다니엘(Charles Daniel) 백작과 알렉상드린 드 다 마 당티니(Alexandrine de Damas d'Antign)의 두 번째 아 들로 태어났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귀족 가문에서 태어 난 탈레랑은 4세 때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되었고 이로 인 하여 그의 부모는 그에게 가문의 전통인 군인 대신 성직 자가 될 것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그는 본래부터 성직자 로서의 뚜렷한 사명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유년 기에 사망한 자신의 형에 대한 기억을 버리지 못하는 모 친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향 후 금전과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강조되는 탈레랑의 인 격과 활동을 심리학적으로 분석 · 설명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그는 1770년 파리의 생 쉴피스(St. Sulpice) 신학교에 입학하였지만 1775년 퇴학당하였다. 하지만 그해 4월 삭발례를 받았으며, 10월에는 국왕에 의해 랭스(Reims) 의 생 드니 수도원원장이 되었다. 이는 그의 숙부이자 후에 추기경이 된 랭스의 대주교 알렉상드르(Alexandre) 의 후원에 의한 것이었다. 1778년 3월 소르본 대학교에 서 신학 학위를 받은 그는, 삼촌인 대주교에 의해 1779 년 12월 18일 사제 서품을 받았고, 다음날 총대리로 임 명되었다. 탈레랑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주교가 되기를 원하였으 며, 이를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은 5년마다 개최되는 전국 성직자 회의의 총대표가 되는 것이라 판단하였다. 총대 표는 전국의 성직자들을 대표하여 국왕을 상대하는 영향 력 있는 위치로, 정치적 · 재정적인 특권을 동시에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780년 총대표에 임명된 그 는 재직 기간 동안 자유 사상가 및 프리메이슨 단원으로 알려졌으며, 특히 도덕적 방종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88년 11월 루이 16세(1774~1792) 에 의해 오통(Autun)의 주교로 임명되어, 1789년 3월 15일 착좌식을 거행하였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의 활동 : 주교로서의 최초의 임무 는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Versailles)에서 소집되는 삼부회에 성직자 대표로서 참여하는 것이었다. 삼부회가 개최되었을 때 성직자와 귀족 대표들은 이전과 마찬가지 로 신분에 따른 별도의 회합을 주장하였으나 탈레랑은 세 신분을 통합한 회의를 주장하였으며, 그의 요구는 수 용되었다. 결국 그는 삼부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으며, 나아가 십일조의 폐지, 교회 및 성직자 재산의 국유화를 통한 부채 상환 등의 내용을 포함하는 법안의 제정을 요구하였다. 1789년 11월 2일 제헌 의회에서의 격론 끝에 통과된 교회 재산의 국유화 법령에 의해 모든 교회 재산은 국유화되었으며, 성직자들은 미사 집전에 필요한 약간의 경비와 함께 매년 일정액의 연봉을 받게 되었다. 이는 당시까지 교회의 특권을 열성적으로 옹호 하였던 그의 입장과는 정반대의 주장으로서, 프랑스 가 톨릭 교회에 대한 배신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정치적 영 향력을 키우겠다는 야심의 발로라 할 수 있다. 특히 탈레랑은 <성직자 공민 헌장>(Constitution civile du clergé)의 제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는데, 1790년 7 월 12일 통과된 그 헌장은 이후 선출되는 주교와 본당 신부를 일종의 국가 공무원으로 규정하여 교황에 의한 서임을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다 른 6명의 주교들과 함께 성직자들에게 공민 헌장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는 선서를 요구하였으며, 1791년 1월부터 그 선서는 의무 조항이 되었다. 공민 헌장에 충성 선서를 한 최초의 주교였던 그는 1790년 7월 14일 바스티유 (Bastille) 함락 1주년 기념 미사를 집전하여 진정으로 대 혁명을 옹호하는 주교로 등장하였다. 그는 교황청의 동 의 없이 새로운 절차에 따라 선출된 성직자들을 주교로 임명하면서 입헌 교회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였지만, 이 는 그의 성직자로서의 마지막 활동이었다. 교황청은 그 를 파문하였지만, 이미 주교직 사임을 결심하고 있었던 그에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교회 재산의 국유화로 인해 주교직이 더이상 재정적인 도움이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직책을 수행하는 동안 충분 히 축적한 재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791년 1월 그는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1791년 말 영국에 외교관으로 파견된 그는 프로이센 과 오스트리아의 대(對)프랑스 동맹에서 영국이 중립적 위치를 지키도록 설득하기 위한 임무를 맡았다. 물론 점 차 과격한 양상을 띠는 혁명에서 벗어나 있으려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 였고, 1793년 1월 루이 16세의 처형으로 영국과의 협상 은 결렬되었으며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탈레 랑은 프랑스와 영국 모두에서 혐오 인물이 되었으며, 영 국으로 망명한 프랑스 귀족들 중 일부의 요구로 1794년 1월 영국에서 추방되었다. 그해 3월 미국으로 넘어간 그 는 1796년까지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하였지만, 미국에 체류하는 2년 동안 금융 투기에 뛰어들어 많은 이익을 얻었다. 프랑스 혁명의 주요 인물인 로베스피에르(M.-F.-M.-I. de Robespierre, 1758~1794)의 몰락 이후 탈레랑은 1796 년 9월 프랑스로 귀환하였다. 프랑스 학술원 회원이었던 그는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견해의 논문 을 발표하면서, 정치 활동을 재개하려고 시도하였다. 그 의 친구였던 정치 선전가 스탈(G. de Stael, 1766~1817)은 당시 정부의 5명의 총재들 중 한 사람인 바라스(P.-F.-J.N. Barras, 1755~1829)를 설득하여 1797년 7월 탈레랑을 외무 장관으로 임명하게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정치 작 가인 콩스탕(B. Constant, 1767~1830)이 그의 임명 사실을 듣고는 "우리는 이제 자리를 잡았습니다. 앞으로 엄청난 재산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엄청난 재산을 말입니다" 하 며 광분하였다고 한다. 그의 말처럼 탈레랑은 이후 자신 의 지위를 이용한 파렴치한 거래를 통해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금전에 대한 집착은 외교 정 책의 실패를 초래하여 1799년 7월 장관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나폴레옹과 탈레랑 : 총재 정부(1795~1799)와의 갈등 이 표면화될 때부터 후에 황제(1804-1814/1815)가 된 나 폴레옹을 지지하였던 탈레랑은 1799년 11월 나폴레옹 의 쿠데타를 성공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 였다. 3인의 통령(統領) 중 한 명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모든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탈레랑을 외무 장관에 임명하였고, 그도 나폴레옹을 열성적으로 지원하였다. 거기에는 두 사람 사이의 애증 관계가 있었는데, 나폴레 옹의 경우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 인물로 평가되었지만 코르시카(Corsica) 출신이라는 태생적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정치적 야심과 수완이 뛰어난 탈레랑 에 대해, 나폴레옹은 자신이 중대한 문제들을 결정할 때 보다는 그 문제들을 외교적인 정책으로 전환시키거나 강 압적인 수단들을 세련된 언어로 위장시키는 데 가장 적 합한 인물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또한 탈레랑의 경우 처 음에는 나폴레옹에게서 발견한 천재성에 매료되었을 뿐 만 아니라 심지어 그를 절반은 신에 가까운 모습을 갖춘 인물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그런 모습은 동 시에 탈레랑으로 하여금 그를 증오하고 나아가 배신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나폴레옹을 내세워 프랑스 내부의 평 화 정착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정치적 · 금 전적 이익이었다. 탈레랑은 이미 엄청난 재산을 보유한 데다 고액의 연봉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유화 된 교회 토지 분배를 감독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상당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더욱이 그는 대혁명 기간 동안 분열되었던 프랑스에 통일과 평화를 부여하려는 나폴레 옹의 정책을 지지하면서 앙시앵 레짐(Ancient Régime)과 의 화해를 구현하였다. 그에 따라 망명 귀족들의 귀환을 장려하고 대혁명 지도 세력들을 사면하였을 뿐만 아니 라, 가톨릭 교회와의 평화 구축을 위해 1801년 7월 나 폴레옹과 교황 비오 7세(1800~1823) 사이의 정교 협약 체결을 실현시켰다. 이 협약을 통해 가톨릭은 '대다수 프랑스인들의 종교 로 인정되었고 성직자들은 복권되었 다. 이러한 종교적 화해에도 불구하고 탈레랑은 교황의 관면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관리 와 이혼한 자신의 정부 카트린 그랑(Catherine Grand)과 1803년 민법적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마지막으로 탈레랑은 나폴레옹의 영웅적 군사 활동의 그늘에서 충분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는 대외 정책에서 직접적인 주도권을 거의 행사하지 않았으며, 나폴레옹의 승전으로 비롯된 질서들에 의존하였다. 또한 외무 장관으로서 교전국들과의 협상을 시작하여 오스트 리아 및 영국과의 협상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6년 만에 유럽의 평화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분쟁의 불씨 가 남아 있었으며, 그것이 나폴레옹 정부의 전복과 같은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음을 간파한 그는 확실치 않 은 미래를 안정적으로 대비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폴레옹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드는 것이 모든 면에서 확실한 이익을 가져올 것이라 판단한 탈레랑은 1802년 나폴레옹이 스스로 종신 통령이 되는 것을 도왔으며, 부 르봉 왕조와의 타협은 절대적으로 불가하다고 밝혔다. 특히 1804년 3월 나폴레옹 암살 음모 사건과 관련된 부 르봉 왕조 출신의 공작을 중립국에서 납치하여 파리에서 즉결 처형하는 데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1804년 12월 교황 비오 7세가 참석한 가운데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 은 탈레랑을 대시종장(grand-chamberlain)에 임명하였으 며, 1806년 6월에는 그에게 '베네벤토의 왕자' (Prince de Bénévent)라는 지위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탈레랑은 프랑스의 팽창을 위한 정복 전쟁에서 드러나는 나폴레옹 의 그칠 줄 모르는 야심에 위협을 느낀 반면, 나폴레옹은 신중함을 역설하는 탈레랑의 조언에 대해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더 멀어졌으며, 탈레랑은 결국 1807년 8월 장관직을 사임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나폴레옹의 정책에 반역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 1808년 5월 스페인의 마드리드(Madrid) 시민들이 프 랑스 군대에 항거하는 봉기를 일으키자 탈레랑은 나폴레 옹에게 무력적으로 개입할 것을 권고하였는데, 이 과정 에서 프랑스 군대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소 모적인 전투로 일관하였다. 같은 해 9월 그는 나폴레옹 과 함께 프로이센의 에르푸르트(Erfurt)에서 개최된 유럽 군주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그곳에서 당시 프랑스의 경 찰 총감이었던 푸세(J. Fouché, 1758?~1820)의 묵인하에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1801~1825)와 비밀 회담 을 갖고 나폴레옹과의 동맹 관계 파기를 종용하였다. 1809년 1월 나폴레옹은 탈레랑이 자신을 반대하는 모종 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지독한 욕 설을 퍼부었다. 이로 인해 탈레랑은 나폴레옹에게 완전 히 등을 돌렸으며, 곧바로 오스트리아 대사 관저에 기거 하면서 대사의 조언자 및 스파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 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러시아의 궁정에서도 마찬가 지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는 동안 프랑스 군대의 교황청 침입과 그에 따른 나폴레옹 파문, 교황 비오 7세의 납치 및 퐁텐블로(Fontainebleau) 유배, 나폴레옹의 이혼에 대한 교황의 불인정 등 일련의 사건들은 나폴레옹에 대한 전 유럽적인 반발 을 초래하고 있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는 그를 급격하게 몰락시켰다. 나폴레옹은 동맹국들 과의 협상을 위해 탈레랑을 외무 장관으로 임명하려 하 였으나, 그는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이미 부르봉 왕조의 복귀를 계획하고 있던 탈레랑은, 단지 조용히 은거하면 서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올 자신의 때를 기다렸다. 1814년 3월 31일 동맹군이 파리에 입성하자, 탈레랑 은 러시아 황제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부르봉 왕 조의 복귀만이 유럽의 평화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설득하였다. 파리 함락 이후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5인으 로 구성된 임시 정부를 구성하였으며, 나폴레옹의 폐위를 선언하였다. 새롭게 프랑스 국왕이 된 루이 18세(1814~ 1824)는 1814년 5월 13일 탈레랑을 외무 장관으로 임명 하였다. 왕정 복고 이후의 시기 : 1814~1815년 빈 회의(Wiener Kongress)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한 탈레랑은, 많은 역 사서가 주장하는 것처럼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를 맞이하 였다. 그는 패전으로 인해 극도로 쇠약해진 프랑스를 승 전국들로부터 존중받는 국가로 부각시켰다. 하지만 이것 이 진정 프랑스에 이익이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탈레랑 은 다른 강대국들의 영토는 축소시킨 반면, 프랑스의 국 경선은 1792년 수준으로 유지시켰다. 새로운 절대주의 체제의 신봉자가 된 그는 왕가의 위세를 드높이는 것은 확실히 성공하였지만, 강대국들을 활용하여 반혁명적이 고 반프랑스적인 동맹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에 는 실패하였다. 워털루(Waterloo) 전투 이후 1815년 7월 루이 18세가 다시 파리로 돌아왔을 때, 탈레랑은 푸세와 함께 임시 정 부를 지휘하고 있었다. 1815년 8월 선거에서 승리한 과 격 왕당파는 탈레랑과 푸세의 해임을 요구하였고, 어쩔 수 없이 사임한 탈레랑은 회고록을 쓰면서 새로운 기회 를 엿보게 되었다. 그는 1827년 선거에서 승리한 자유 주의자들과 연합하여 국왕 샤를 10세(1824~1830)를 제 거하는 계획에 가담하였으며, 1830년 오를레앙 공작 (duc d'Orléans) 가의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추대한 7월 왕정의 수립을 도왔다. 하지만 루이 필리프는 탈레랑을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하는 대신 영국 대사로 파견하였 다. 이미 고령이었기에 은퇴 요구가 강해졌지만, 그는 그 요구를 거부하면서 1830~1834년까지 벨기에 왕국을 탄생시키는 등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탈레랑의 은퇴는 1838년 5월 17일 그의 사망으로 이 루어졌다. 사망하기 몇 시간 전 그는 일생의 멍에로 작용 하였던 교회와의 화해를 선언하는 문서에 서명하였다. 물론 겸손한 자세로 행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탈레랑 은 마지막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었으며, 다시 성직자로 복위되었다. 부인과는 1815년에 이혼하였고 적자(嫡子) 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많은 정부들과의 사이에서 서자 들을 두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인 들라 크루아(E. Delacroix, 1798~1863)도 그의 서자라는 설이 있다. 1 성직자 공민 헌장 ; 프랑스 ; 프랑스 대혁명) ※ 참고문헌  Daniel Rivière, 최갑수 역, 《프랑스의 역사》, 까치, 1995/ Jean Carpentier 외, 주명철 역, ,《프랑스인의 역사》, 소나무, 1991/G. de Bertier de Sauvigny, INCE) 13, 2003, pp. 740~742. [邊琪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