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 〔히〕7기Ь는П [라 · 영〕Talm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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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탈무드.
미쉬나(П》)와 그 주석인 게마라(Gemara)로 이루어 진 문헌. [의미의 변천] 히브리어 '탈무드(-1)7)의 의미는 '연구' 또는 '학습' 이지만, 일반적으로는 '가르침' 이라 는 뜻을 지니고 있다. 탈무드는 전통적으로 가르침 중에 서도 주석을 통한 성서 본문의 가르침을 의미하였다. 하 지만 서기 6세기 이후 미쉬나에 대한 방대한 주석 모음 집인 게마라를 지칭하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탈무 드는 내용 면에서 본문에 해당되는 미쉬나와 해설에 해 당되는 게마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법률 본문인 미쉬나와는 별도로 일종의 보충편이 '토세프타' (×昇무(行)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며, 게마라에 자주 인용 되어 있다. 토세프타는 미쉬나의 간결한 법 조항에 대해 그 이유와 배경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따라서 탈무드의 게마라는 미쉬나와 토세프타에 대한 방대한 해설로 볼 수 있다. 미쉬나에는 유대인들의 일반 교육에 있어서 '5세부터 구약성서를, 10세부터 미쉬나를, 그리고 15세부터는 탈 무드를 가르치라' 고 강조되어 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전통에서 가장 중시되는 경전은 토라를 비롯한 구약성서 와 미쉬나, 탈무드 등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이 중에 서도 탈무드가 가장 높은 수준의 고등 교육 교재임을 알 수 있다. 유대 민족을 '책의 민족' 이라 일컬을 때, 이 경 우 책은 탈무드를 의미한다. 탈무드는 오늘날까지 지속 되는 유대교의 기본 체계를 확립한 문헌이다. 구약성서 에서 의미하는 종교의 기본 행위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야훼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였지만,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파괴된 이후 유대인들은 야훼를 향한 새로운 형태의 종교 방식을 찾아야만 하였다. 따라 서 성전은 회당으로 대체되었고, 야훼의 대변자는 성서 시대의 사제가 아니라 랍비가 되었으며, 희생 제사는 기 도와 성서 연구 그리고 선행으로 대체되었다. 구약성서 의 아람어 번역본인 타르굼(ㅁ137)7)과 구약성서의 주석 집인 미드라쉬(ㅃ丁가)가 존재하지만, 예루살렘 탈무드 는 신약 시대 이후 팔레스티나 지역 유대인들의 생활을 재구성하기 위한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바빌로니아 탈 무드의 경우 참고 문헌이나 탈무드 연구 중심지들에 대 한 고고학적 발굴 결과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당시 그 지역 유대인들의 신앙과 사상 체계 및 구약성서의 해석 등을 알기 위한 결정적인 자료이다. 탈무드에서 본문인 미쉬나를 해석하고 해설한 주인공 랍비들을 '아모라임' (Amoraim)이라 부르는데, 이는 본문 미쉬나에 관해 '말 하다' 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아마르' (ㄱㅁ×)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아모라임의 뒤를 이어 '사보라임' (Savoraim) 이 등장하였고, 서기 640년 이슬람의 확산과 함께 나타 난 해설자들은 '게오님' (Geonim)이라 불렸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 또는 말씀을 '토라' (77,13)라는 단어로 대치하고 있다. 본래 '가르치다' 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호라' (77117)에서 유래된 토라는 좁은 의미로는 구약성서의 모세 오경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구약성서 전체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학문 분야의 기본 원리를 지칭하기도 한다. 유대교의 가장 핵심적인 경전은 두 개의 토라로 구 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성문 토라(writen Torah)이고, 다 른 하나는 구전 토라(oral Torah)이다. 성문 토라는 좁은 의미로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야훼로부터 받은 십계명 을 중심으로 하는 구약성서의 오경이며, 넓은 의미로는 구약성서 전체까지도 포함한다. 한편 구전 토라는 미쉬 나와 탈무드이다. 모세 오경을 비롯한 성문 토라는 이미 확정되어 기록된 것이기에 더이상 가감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생활 속에서 일어난 재판 소송 결과 를 다른 미쉬나는 시대에 따라 그 적용 방법과 기준이 달 라지면서 끊임없이 수정되고 재해석될 수 있는 유동적이 면서 상황 윤리적인 성격을 가졌다. 따라서 시대에 따라 구전으로 축적된 미쉬나와 이에 대한 해설판인 탈무드는 수많은 랍비들의 끊임없는 해석과 이에 대한 재해석들이 모두 수집된 유대교 아카데미즘의 완결판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유대교 경전의 내용은 성격에 따라 크게 할라 카(П구〉口)와 하가다(П犯犯)로 양분된다. 히브리어 '할라 카 는 '걸어가다' 라는 뜻을 지닌 동사 '할라크' (757)에 서 유래되었고, '하가다' 는 '말하다' 라는 뜻을 지닌 동 사 '하기드' (ㄱ”2П)에서 비롯되었다. 유대교의 랍비들은 주요 경전인 토라와 미크라(구약성서)에 대한 자신들의 해설을 오늘날까지 덧붙여 왔다. 따라서 토라와 미크라 에 대한 할라카와 하가다가 바로 미쉬나이자 탈무드인 셈이다. 할라카는 종교적인 율법이나 규정들에 관한 해 설이며, 하가다는 할라카가 아닌 모든 것을 지칭한다. 즉 할라카는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법 조항이며, 하가다는 그럴 필요가 없는 해설과 이야기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 서 하가다보다는 할라카가 더 중요한 요소로 여겨진다. 〔역사적 배경]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 살(기원전 604~562)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수많은 유대 인들 중 일부는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기원 전 551~529)의 칙령으로 고국에 돌아갔지만, 나머지는 계속 이 지역에 거주하였다. 신약 시대 이후 메소포타미 아의 바빌로니아 지역에서는 유대인 공동체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 학문적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기 313년 그리스도교에 관한 호의 적인 칙령(밀라노 관용령)을 선포한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대제(306~337)는 324년 팔레스티나 지방을 본격적인 그 리스도교 국가로 만들었다. 당시까지 유대교의 전통을 나름대로 지켜 올 수 있었던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후 광 아래 진행되는 조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개종 운동에 거의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 기 위해서 종교적 · 민족적 교육에 더욱 집착하였다. 각 회당에서 미쉬나를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미쉬나의 각 구 절들에 대한 여러 랍비들의 해설이 첨가된 단편들이 팔 레스티나에서 400년경부터 '게마라' 라는 이름으로 편집 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탈무드의 기원으로 볼 수 있으 며, 바빌로니아의 것과 구분하여 '팔레스티나 탈무드' 또는 '예루살렘 탈무드' 라고 부른다. 탈무드가 복잡한 일상 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법적인 소송 과 분쟁에 관련된 사례들을 주제별로 편집한 '미쉬나' 의 상세한 해설인 만큼, 탈무드를 언급하기 전에 먼저 그 뼈 대가 되는 미쉬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쉬나는 대부분 기원전 50년부터 서기 200년까지 약 250년 동안 유대인 공동체의 최고 의결 기관이었던 산 헤드린 법정에서 판결을 내린 재판 판례들과 법 조항들 에 관한 해석 등을 집대성하여 편집한 것으로, 약 150명 의 랍비들의 견해가 포함되어 있다. 미쉬나는 서기 200 년경 당시 산헤드린의 의장이었던 유다 하 나시(Judah ha Nassi, 135?~217?)에 의해 나자렛 근처의 세포리스(Sepphoris)에서 편찬되었다. 미쉬나는 일종의 판례집이고 계속해서 일상 생활의 재판에 적용되기에 새로운 해석과 판례들이 첨가되었으며, 그 결과가 탈무드라는 집대성으 로 나타났다. 미쉬나는 매우 간결한 히브리어로 법 조항 과 적용만을 서술하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 응용하기 위 해서는 법 조항의 이유와 배경 설명이 필요한데, 이를 게 마라라고 부른다. 게마라는 '끝내다' 의 의미를 지닌 히 브리어 동사 '가마르' (722@서 유래되었으며, 미쉬나 를 완성한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명칭이다. 미쉬나가 유 다 하 나시에 의해 최종 편찬된 후, 미쉬나에 관한 연구 는 이스라엘의 티베리아와 이라크의 바빌로니아 지역에 서 진행되어 이곳에서부터 각각 '예루살렘 탈무드' 와 '바빌로니아 탈무드' 가 탄생하였다. 〔종 류] 바빌로니아 탈무드(Babylonian Talmud) : 이 탈무드는 바빌로니아 지역 유대 공동체의 랍비들이 만든 율법 학당(Bet Midrash)을 중심으로 기존의 미쉬나 구절 마다 랍비들의 해설을 첨가하면서 형성되었다. 탈무드의 형성 연대는 랍비 아바 아리카(Abba Aricha) 시대(230) 부터 랍비 라비나(Ravina) 시대(500)까지 약 270년간이 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바빌론 근처의 여섯 도시에 설 립되었던 유대인들의 율법 학당을 중심으로 연구 · 편집 되었다. 대표적인 탈무드 율법 학당은 네하르데아(Nehardea), 수라(Sura), 품베디타(Pumbditia), 막호자(Mahoza) 나레쉬(Naresh), 마타 멕하스야(Mata Mehasya)에 있었다. 간혹 당시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지역 정권의 탄압으로 탈무드 연구의 중심지는 다른 도시로 옮겨다니기도 하였 다. 탈무드 율법 학당의 대표적인 학자들은 네하르데아의 사무엘(Samuel)을 비롯하여 여러 도시에 새로운 율법 학 당을 설립한 랍비들이다. 259년 네하르데아가 파괴된 후 라브(Rav)가 수라에, 320년경 유다(Judah)가 품베디 타에, 340년경 라바(Rava)가 막호자에, 360년경 파파 (Papa)가 나레쉬에, 그리고 400년경에는 아쉬(Ashi)가 마타 멕하스야에 각각 율법 학당을 설립하여 운영하였 다. 율법 학당의 원장직은 랍비들의 사제지간으로 전수 되었기에 율법 학당별로 고유한 미쉬나 해석이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율법 학당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지닌 랍비들의 격렬한 논쟁도 자주 발생하였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본문이 되는 미쉬나의 여섯 부분 (Seder) 중 제5부 '성물' (聖物, ㅁ”Ⅵ┳Р)을 제외한 다섯 부분에는 게마라가 완전하게 첨가되지 않았다. 즉 미쉬 나 전체 63편 중에서 37편만이 완벽하게 게마라가 추가 되었다. 그 이유는 550년경 탈무드의 최종 편집 단계에 서, 당시 바빌로니아 유대인 사회에서 중요하다고 판단 되는 부분들의 게마라만 선별해서 포함시킨 결과로 여겨 진다. 특히 성전 의식을 다룬 '성물' 부분에 자세한 게마 라가 첨가된 이유는 '성전 의식을 연구하는 것이 곧 그 의식을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 라는 랍비들의 유권 해석 때문일 것이다. 비록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오래전에 파 괴되어 더이상 제사를 드릴 수 없지만, 성전 제사에 관한 미쉬나의 '성물' 부분을 연구하는 것이 실천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바빌로니아 학파의 고유한 해석들은 기본적으로는 미쉬나보다 할라카가 더 중요하다는 원칙에 근거한다. 즉 일상 생활에서 율법을 적용하여 실천하는 원리(할라카)가 특정한 시대에 고정된 특정한 율법의 판례집(미쉬나)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또 한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가르침에 있어서 답변(쉬누야)의 가치를 중요시하고 있다. 바람직한 가르침이란 답변을 전제로 하는 질문을 통해서 가능한데, 이때 답변의 성격 에 따라 질문도 달라지고 나아가 가르침의 수준이 결정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주된 논리 전개 방식은 답변 논쟁' (answer game)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서기 11세기의 유대교 대학자 라쉬(Rashi, 1040~1105) 는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5세기 초 랍비 아쉬와 500년경 랍비 라비나에 의해 최종적으로 편집되었다고 주장하였 다. 이 두 랍비는 미쉬나 완성의 두 주역이었던 나탄과 유다에 필적할 만하다. 아쉬와 라비나의 역할은 당시까 지 수집되었던 아모라임의 미쉬나에 대한 해설들을 주제 별로 정리한 것이고, 그들의 결정적인 공헌은 시대별로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미쉬나에 대한 해설 논쟁들을 종 결시켰다는 것이다. 미쉬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게마라 가 최종 편집될 때에는 수많은 다양한 해설들과 특히 서 로 상반되는 해설들을 분석 · 선별하고 진위를 구분함으 로써 비로소 권위 있는 탈무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탈무드의 최종 편집에 간여하였던 학자들을 사보라 임으로 부르는데, 이들은 그 이전 세대인 아모라임의 제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탈무드는 구전된 토라로서 기록 이 아닌 구전의 형태로 전수되었지만, 바빌로니아 지역 의 끊임없는 유대인 탄압으로 인해 비로소 기록되기 시 작하였다. 또한 아모라임의 게마라를 토대로 사보라임이 서기 6~7세기에 내용을 추가함으로써 최종적인 바빌로 니아 탈무드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문체는 각 율법 학당을 통해 활발하게 이루어진 토론, 즉 구전의 형태가 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처음 부터 독자를 겨냥한 형식적인 문장보다는 다양한 예화를 곁들인 말의 논쟁이 여과 없이 기록된 것이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5,894쪽에 250만 단어로 구성 되어 있으며, 내용 면에서 3분의 1은 할라카이고 나머지 3분의 2는 하가다이다. 할라카의 경우 법적인 자료와 법 해석 등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으며, 하가다는 이야기, 예화, 전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하가다는 내용상 팔레스티나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구약 성서에 대한 주석을 포함하여 신학과 윤리에 관한 토론, 이야기와 비유, 역사적 사건에 관한 언급 등이 있으며, 바빌로니아 유대인 공동체의 일상 생활에 적용되는 모든 종류의 권고 등이 포함되어 있다. 탈무드에서 게마라는 본문 미쉬나에 대한 단순한 해설의 차원을 넘어 구약성 서에 대한 주석과 함께 윤리적 교훈, 속담과 격언, 기도 문, 비유, 예화, 유대인과 비유대인들의 관습, 전통 및 민속에 관한 자료도 포함하고 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는 당시의 관습, 종교, 신앙, 미신 등 유대인들의 일상 생활에서 야기되는 대부분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따 라서 탈무드는 역사뿐만 아니라 의학, 천문학, 무역, 농 사, 식물학, 동물학 등 여러 분야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에 서 미쉬나 본문과 하가다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게마라는 동부 아람어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서기 7세기 이후 바 빌로니아 지역의 언어가 아랍어로 대체되면서 아람어는 잊혀진 언어가 되어 대부분의 유럽 지역 유대인들에게는 생소해졌다. 따라서 이러한 언어 장벽을 없애기 위해 서 기 10세기부터 유럽 출신의 랍비들이 탈무드에 대한 해 설집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중세 이후 랍비들의 전통적인 탈무드 연구 방법론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 는가? 둘째, 본문의 의미는 무엇인가? 셋째, 연관된 할 라카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완벽하게 보존된 바빌로니 아 탈무드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343년 파리에서 기록 된 '민헨 95 문서이며, 인쇄본은 1520~1523년 봄베 르크(Daniel Bomberg)가 베네치아에서 처음으로 출판하 였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기록된 탈무드는 18세기에 비로소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유럽의 그리스도교계에 구 체적인 내용이 알려졌다. 예루살렘 탈무드(Jerusalem Talmud) : 이 탈무드는 팔 레스티나 탈무드' 라고도 불린다. 기록 장소는 예루살렘 과 전혀 관련이 없지만, 바빌로니아 탈무드와 구분하기 위하여 편의상 부르는 전통적인 명칭이다. 예루살렘 탈 무드가 인용하고 있는 미쉬나 본문은, 바빌로니아 탈무 드가 채택하고 있는 200년경 유다 하 나시가 완성한 미 쉬나보다 이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즉 본문인 미쉬나의 차이점이 곧 두 탈무드의 차이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탈무드의 경우, 해설자들은 본문인 미 쉬나 자체의 내용을 경우에 따라 수정하였기 때문에 그 일관도가 떨어진다. 예루살렘 탈무드의 연구 중심지는 티베리아를 비롯하여 나자렛 근처의 세포리스와 지중해 변의 가이사리아로 밝혀졌다. 따라서 문체나 내용이 일 관적이지 않고 다양하다. 예루살렘 탈무드는 미쉬나의 여섯 부분 중에서 '씨앗' (ㅁ2꼭), '절기' (7210 ) , '여 자 (ㅁ***), '상해' (傷害, 1\pm72) 등 네 부분의 게마라만 존재하기 때문에 미쉬나의 63편 중 39편만을 다루고 있 다. 이 중에서 '상해' 부분은 350년경 가이사리아에서 편집된 것으로 여겨진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에 비해 예 루살렘 탈무드는 '씨앗' 부분에서 아주 상세한 게마라를 첨가하였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 농사에 관한 규정과 판 례들이 이스라엘 땅에 적합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예루 살렘 탈무드의 아람어는 서부 아람어인 동시에 히브리어 보다는 그리스어 계통의 차용어를 많이 사용하였다. 예 루살렘 탈무드는 미쉬나에 대한 본문 비평, 주석, 본문의 추가, 미쉬나와 토세프타의 조화 등을 시도하며, 미쉬나 자체에 대한 단순한 해석과 확장을 시도하였다. 따라서 양적인 면에서 예루살렘 탈무드의 게마라는 거의 90%가 미쉬나에 대한 직접적인 해설에 해당된다. 따라서 예루살 렘 탈무드가 바빌로니아 탈무드보다는 미쉬나를 좀 더 집 중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루살렘 탈무드의 경우 편집 연대가 확실하게 명시되 어 있지 않다. 12세기 유대교 철학자이자 성서 학자였던 마이모니데스(Mosees Maimonides, 1135~1204)는 300년경 에 서거한 랍비 요하난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주장하였 다. 예루살렘 탈무드의 최종적인 편집은 여러 과정을 거 쳐 확립되었다. 351년 유대인들의 반란으로 로마 장군 우르시치누스(Usicimus)는 탈무드 연구의 중심지였던 티 베리아, 세포리스, 리다(Lydda, 현 Lod) 등을 파괴하였다. 그 결과 이 도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율법 학자들의 공 동체가 붕괴되고 여러 곳으로 흩어지면서 더이상 집중적 인 탈무드 연구의 맥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나아가 421년 티베리아의 산헤드린이 해산되면서 이 도시의 율 법 학당은 문을 닫았다. 따라서 예루살렘 탈무드는 500 년경 최종적으로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640년대 이후 팔레스티나 지역에 이슬람이 들어오면서 예루살렘 탈무 드의 영향력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완벽하게 보존된 예 루살렘 탈무드는 '코데스 스칼리거(Codes Scaliger) 3 으 로 명명된, 아세르 벤 예히엘(Asher ben Jehiel, 1250?~ 1327)이 1289년에 기록한 레이덴 문서(Leiden manuscript)이며, 최초의 인쇄본은 봄베르크에 의해 1523~ 1524년 베네치아에서 출판되었다. 〔두 탈무드의 차이점] 바빌로니아 탈무드와 예루살렘 탈무드는 범위, 사용 언어, 문체와 형식, 그리고 내용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두 탈무드 중에서 바빌 로니아 탈무드가 더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받는데, 이 권 위는 처음부터 공식적으로 선포된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확립된 것이다. 640년 이슬람 이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이전에는 바빌로니아 탈무드와 예루살렘 탈무드가 각각 자기 지역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바그다드에 아바스 왕조(750~1258) 가 설립되면서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더 권위 있는 것으 로 유럽 지역에 널리 알려졌다. 즉 새로운 정권의 수립과 함께 바빌로니아 지역이 당시 중동 지역의 중심지로 떠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그곳의 탈무드도 여러 지역으로 널 리 확산된 것이다. 예루살렘 탈무드가 640년 이후 이슬 람의 영향 아래 거의 방치된 반면,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유럽 쪽으로 무대를 옮겨가면서 계속 연구되었다. 따라 서 스페인, 프로방스,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동로마 제 국의 유대인들이 탈무드를 공부하기 위해 바빌로니아 지 역의 율법 학당으로 몰려들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다루는 주 제들이 좀 더 지적이고 흥미로우며, 논쟁은 좀 더 섬세하 고 예리하며, 문체는 생동감이 있고, 소재는 여러 세대에 걸친 풍부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할라카 면에서는 예루 살렘의 것이 더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록 미쉬나가 이스라엘 지역의 랍비들에 의해 편찬되었지만, 이것의 해설서인 탈무드의 경우 바빌로니아 지역 율법 학자들은 그들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해설의 틀을 정립하기 시작하 였다. 탈무드의 내용 면에서 볼 때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하가다가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지만, 예루살렘 탈무 드의 경우 6분의 1만 하가다에 할애하고 있다. 그 이유 는 팔레스티나의 경우 이미 하가다가 '미드라쉬' 의 형태 로 별도의 책으로 편집된 반면, 바빌로니아에는 별도의 하가다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탈무드에 첨가된 것 으로 추정된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게마라는 장황하고 산만한 반면, 예루살렘 탈무드의 게마라는 짧고 간결하 며 요약적이지만 그 의미는 분명치 않다. 아마도 그 이유 는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예루살렘 것에 비해 비교적 오 랜 기간에 걸쳐 해석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여러 가지 비교들을 통해 주제의 요점을 깊이 파고드는 반면, 예루살렘 탈무드의 경우 대 부분 논리적 논쟁에 근거해 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미쉬나에 대해 장황하게 그 정당성을 변호하는 반면, 예 루살렘 탈무드는 미쉬나를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별로 노력하지 않는다. 또한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악마론, 천 사론, 퇴마술, 마술, 점성술 등 민간 신앙에 관한 주제들 을 많이 다루는 반면, 예루살렘 탈무드는 이러한 주제를 별로 다루지 않는다. 언어 면에서는 바빌로니아 탈무드 가 페르시아 차용 어휘가 많이 포함된 동부 아람어를 주 로 사용하는 반면, 예루살렘 탈무드의 경우 그리스 계통 의 차용 어휘가 많이 포함된 서부 아람어를 주로 사용하 고 있다. [평 가] 오늘날 탈무드를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탈무 드 편집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 다. 탈무드 연구를 통해 유대인 공동체에는 매우 논리적 인 신학적 · 사상적 논쟁과 함께 추상적인 추론 및 변증 법적 방법론 등이 자리잡았다. 이런 의미에서 탈무드는 '신성한 지성주의' (sacred intellectualism)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 랍비 문학 ; 미드라쉬 ; 미쉬나 ; 산헤드 린 ; 유다 하 나시 ; 유대교 ; 율법 학자 ; 타르굼 ; 탄나 임 문학 ; 토세프타 ; 하가다 ; 할라카) ※ 참고문헌 E. Berkovits, Babylonian Talmud, 《EJ》 15, PP. 755~768/ I. Epstein, The Babylonian Talmud, London, 1935~1952/ L. Goldschmidt, Der Babylonische Talmud, Berlin, 1897~1935/ D.W. Halivni, Midrash, Mishnah and Gemara,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1986/ J. Neusner, A History of the Jews in Babylonia, Leiden, 1965~1970/ 一, The Formation of the Babylonian Talmud, Leiden, 1970/ E. Kedourie ed., The Jewish World : Revelation, Prophecy and History, London, Thames and Hudson, 1979, Pp. 108~119/ The Talmud of Babylonia : An American Translation, Chicago, 1984~1985/ G.G. Porton, (ABD) 6, PP. 310~315/ S. Safrai ed., The Literature of the Sages, Assen and Maastricht, 1987/ M. Schwab, Le Talmud de Jerusalem, Paris, 1871~1889/ A. Steinsaltz, The Essential Talmud, New York, 1976/ A. Wunsche, Der Jerusalemische Talmud in seinen haggadischen Bestandtheilen iiberragen, Ziirich, 1880. 〔金 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