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터]Titkiye [영]Turkey

글자 크기
11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가 유명한 이스탄불의 코오라 미술관.
1 / 7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가 유명한 이스탄불의 코오라 미술관.


아시아의 남서쪽 끝인 소아시아 반도와 유럽의 남동쪽 끝인 트라키아(Thracia) 반도에 위치하여 아시아와 유럽 의 두 대륙에 걸쳐 있는 유일한 국가. 공식 명칭은 터키 공화국(Republic of Turkey). 유럽 쪽으로는 그리스와 불 가리아, 아시아 쪽으로는 시계 방향으로 그루지야, 아르 메니아, 이란, 이라크, 시리아와 접경을 이루고 있고, 북 쪽으로는 흑해, 서쪽으로는 에게 해, 남쪽으로는 지중해 와 접해 있다. 면적은 780,580k㎡로 한반도의 약 3.5배 이고, 인구는 6,889만 명(2004. 7)이다. 총 81개의 지방 자치주가 있으며, 가장 큰 도시는 이스탄불(Isanbul)이지 만 수도는 앙카라(Ankara)이다. 인종적으로 볼 때 중앙 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투 르크족(Turk)이 약 80%를 차지하고 있 으며, 남동부 지역의 11개 주에 집중적으 로 거주하는 원주민 쿠르드족(Kurd)이 약 20%를 차지한다. 그 밖에도 극소수의 그리스, 아랍, 아르메니아, 유대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국가 공용어는 우랄-알 타이계의 터키어이지만, 각 소수 민족들 은 자신들의 언어를 비공식적으로 사용 하고 있다. [역 사] 터키가 위치한 소아시아 반도 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다양한 민족 의 수많은 국가들이 명멸하며 자신들의 자취를 남겼다. 히타이트, 헬레니즘, 그 리스-로마, 동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으 로 이어지는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투르크족은 원래부터 이 지역에 거주하 던 토착 민족이 아니다. 그들은 중앙 아 시아 스텝 지역에 거주하던 유목 민족이 었으며, 동양사에서는 '돌궐' (突厥)이라 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정치적 · 경제적 이유 때문에 서쪽으로 이주한 후, 7세기에 중동에서 발생한 신흥 종교 이 슬람과 접하게 되어 10세기경부터 본격 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투르크족은 셀주크(Seljuk) 제국(1037~1157)을 건설 하며 중동의 패자로 군림하였다.이어 1071년에 반(Van) 호수 근처 만지케르트(Manziker) 전 투의 승리를 계기로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 가면서 소아시아 반도로 진출하여 1453년 동로마 제국 을 멸망시키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에 걸친 오 스만 제국을 건설하였다. 오늘날의 터키 공화국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직후 멸망한 이 오스만 제국의 후 손이다. 투르크족의 기원 : 투르크족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기 록은 기원전 200년경의 중국 사료에 나타난다. 이 기록 에 따르면 알타이 산맥, 바이칼 호수, 고비 사막의 북쪽 끝에 흩어져 살던 '흉노' (匈奴)라는 부족들이 투르크족 의 선조로 간주된다. 투르크족은 6세기부터 알타이 지역 에서 부족 연맹을 형성하여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였는 데, 8세기경에는 아랄 해에서 힌두쿠시 산맥을 거쳐 트 란속사니아(Transoxiana) 지방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이 루었다. 투르크 제국은 7세기경에 동로마 제국 황제에 의해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국들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8세기경에 분열되어 오구 즈(0ghuz)라고 불리는 부족이 오쿠스 강의 남쪽으로 이 주하였다. 셀주크 제국 : 중앙 아시아 스텝 지역에서 유목 생활 을 하던 투르크족은 기후의 변화, 빈약한 스텝 경제에서 의 인구 증가, 강력한 주변국으로부터의 압력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정치적 · 경제적 이유로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 작하였다. 이들 가운데 오구즈 투르크족은 10세기경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서쪽으로 이주하여, 당시 중동을 지배하고 있던 아바스 왕조(Abbasid dynasty, 750~969)의 용병으로 이슬람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 '가지' (gazi)라 고 알려진 투르크 용병들은 주로 아바스 왕조의 제국 동 부 국경을 방어하는 임부를 부여받았으며, 이 때문에 때 로는 자신들의 동족과 전쟁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055년에 오구즈 투르크족의 족장 토그릴 베그(Toghril Beg, 1037~1063)가 가지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바그 다드를 점령하였다. 토그릴은 이슬람의 정신적 지도자였 던 '칼리프' (caliph)의 권위를 인정하는 대신, 스스로 '술 탄 (sultan)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페르시아와 메소포타 미아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들은 제국 건설에 열중하는 한편, 시아파(Sha)에 대항하는 수니파(Sumi) 이슬람의 보호자로 자처하였다. 토그릴의 계승자인 술탄 알프 아 르슬란(Alp Arslan, 1063~1072)이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 던 아나톨리아(Anatolia) 지역으로 관심을 돌리면서, 1071년에 그의 군대가 반 호수 근처의 만지케르트에서 동로마 제국의 군대를 물리치자 투르크족에 의한 아나톨 리아 정복은 가속화되었다. 셀주크 공국과 십자군 :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10년도 채 안 되어 투르크족은 아나톨리아 반도를 거의 장악하 였다. 가지들을 중심으로 한 투르크족이 이처럼 아나톨 리아반도에서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가며 군사적인 승리를 거듭하였지만, 바그다드의 셀주크 제국 은 몽골의 침략에 휩싸여 아나톨리아 지역에 직접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 가지들은 바그다드의 명목적 인 통치를 인정한 채 아나톨리아에 수많은 국가들을 건 설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가장 강한 국가는 남서쪽의 코 니아(Konya, 예전의 Iconium)에 수도를 둔 '룸(Rum) 셀주 크 공국 이었다. 12~13세기에 룸 공국은 주변의 다른 투르크 공국들을 지배하며 큰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러 나 중동 및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이러한 셀주크 투르크 족의 발전은 유럽에서 십자군이라는 형태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십자군의 지원을 받은 동로마 제국 황제는 1097년에 반격을 시작하여 셀주크 투르크족에게 결정 적인 패배를 안겨 주었다. 코니아는 십자군의 수중에 떨 어졌으며,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지 수년 내에 아나톨리 아 서부 3분의 1 지역에서의 동로마 제국 통치가 회복되었다. 1140년대에 투르크족은 세력을 회복하고 십자군에게 빼앗겼던 지역을 재정복하였지만, 동로마 제국의 존속에 더욱 큰 해를 입힌 것은 제4차 십자군 전쟁(1202~1204) 이었다. 1204년 4차 십자군은 플랑드르의 백작을 보두 앵 1세(Baudouin I, 1172~1205)라는 이름으로 이른바 '콘 스탄티노플의 라틴 제국' 의 황제로 옹립하고, 유럽의 봉 건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여 과거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여러 개의 제후국으로 분할한 후 조공을 받았다. 동로마 제국은 니체아(Nicaea, 현 Iznik)와 트레비존드(Trebizond, 현 Trabzon)에 망명 정부를 수립하고 라틴 제국에 대항하 였다. 그리고 아나톨리아에서 라틴 제국에 대항하여 투 르크족과 동맹을 맺었고, 투르크족은 몽골족에 대항하여 망명 정부와 동맹을 맺었다. 1261년 니체아의 미카엘 8 세(Michael VIII Palaeologus, 1261~1282)가 콘스탄티노플 에서 라틴 제국을 몰아내고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켰지 만, 영토는 트라키아 반도 및 아나톨리아 북서 지방에 한정되었다. 십자군과 몽골의 침략으로 아나톨리아 반 도와 중동 전역에 혼란과 무질서가 확대되는 가운데 오 스만 투르크족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출현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기원과 건국 : 오스만 제국에 대한 초기 의 역사 기록은 드물다. 설화적 기록에 따르면, 오구즈 투르크족의 카이(Kayi) 부족장이었던 에르투그룰(Erugrul)이 룸의 셀주크 공국에서 400개의 천막으로 구성된 가지의 우두머리였다고 전해진다. 그를 이어 즉위한 아 들 오스만 1세(0sman I, 1281~1324)가 바로 오스만 제국 의 창건자이다. 오스만 1세는 술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 며 중앙 집권화를 시도하여 가지들을 복종시킴으로써 빠 른 속도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결국 부르사(Bursa)가 그 의 통치 말년에 함락되어 오스만 제국 최초의 수도가 되 었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유럽으로 확장하기 시작한 술탄은 오르한(Orhan, 1324~1360)이었다. 그는 다르다넬 스(Dardanelles) 해협을 건너 1354년 겔리볼루(Gelibolu, 영어로는 Gallipol)를 점령하고, 그곳에 유럽 점령을 위한 전초 기지를 건설하였다. 무라드 1세(Murad I, 1360~ 1389)는 트라키아 반도 대부분을 점령함으로써 콘스탄티 노플을 고립시켰으며, 수도도 트라키아 반도에 있는 아 드리아노플(Adnanople, 현 Edirne)로 옮겼다. 메메트 2세 (Mehmet Ⅱ, 1444~1446, 1451~1481)는 1444년에 술탄이 된 후 즉시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착수하여 그해 5월 29 일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오스만 제국의 팽창기 : 셀림 1세(1512~1520)는 시리 아, 팔레스티나, 이집트를 점령하고 오스만 제국의 영토 를 남쪽으로 확장하였다. 그는 이슬람의 두 성지인 메카 와 메디나의 보호자로 인정받았다. 셀림 1세의 아들 쉴 레이만 1세(Suleyman I, 1520~1566)는 통치 기간 중에 이 슬람 법의 성문화를 시행하였는데, 그로 인해 무슬림 사 가들로부터는 '입법자' (kanuni) 유럽인들로부터는 위 대한 쉴레이만' (Sileyman the Magnifcent)이라 불렸다. 그는 1521년에 베오그라드(Beograd)를 함락시켰으며, 1522년에는 로도스(Rodhos) 섬을 정복하고 요한 기사 수도회를 몰아냈다. 1526년 모하치(Mohacs) 전투에서 의 승리는 도나우 강 유역의 부다(Buda) 점령으로 이어 졌다. 1529년의 원정 기간 중에 있었던 빈(Wien)의 포 위 공격은 실패하였지만,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북 아프리카에서 모로코 접경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1534 년에는 페르시아로부터 쿠르디스탄(Kurdisan)과 메소포 타미아를 빼앗았다. 1566년에 쉴레이만 1세가 죽었을 때, 오스만 제국은 세계적인 패권 국가가 되어 있었다.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다마스커스, 카이로, 튀니스, 바그다드 등과 같은 이슬람 세계의 대도시 대부분이 술 탄의 초승달 국기 밑에 놓여 있었으며, 아나톨리아, 도나 우 강 하류의 발칸 지역, 시리아, 팔레스티나, 메소포타 미아를 직접 통치하였다. 이집트, 메카, 북아프리카 지역 은 아라비아 및 카프카스(Kavkaz) 지역과 크림 반도의 타타르족(Tatar) 영토처럼 특별법에 의해 총독이 관할하 였으며, 알라키아(Walachia) , 몰다비아(Moldaia), 트란 실바니아(Transylvaiaia) , 라구사(Ragusa, 현 Dubrovnik)는 술탄의 종속국으로서 토착 지배자가 통치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쇠퇴기 : 1571년 레판토(Lepanto) 해전 에서 투르크 함대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패한 것을 시 작으로, 16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몰 락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특히 이스탄불 궁전에서의 권력 승계 분쟁이 이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교황의 후원 아래 오스트리아, 폴란드, 베네치아로 구성된 소위 '신 성 동맹' (Holy League)은 러시아와 함께 오스만 제국의 군대를 도나우 강 남쪽과 카르파티아(Capathhia) 산맥 동 쪽으로 몰아냈다. 1699년의 카를로비츠(Karlowiz) 조약 으로 오스만 제국은 처음으로 패배를 인정하였으며 헝가 리, 트란실바니아, 크로아티아(Croaia)가 오스트리아에 게 이양되었다. 또한 폴란드는 포돌리아(Podona)를 되찾 았으며, 달마치야(Dalmacija)와 모레아(Morea)는 베네치 아에게 할양되었다. 그 이듬해에 체결된 별도의 조약으 로 러시아는 아조프(Azov) 지역을 차지하였다. 18세기 내내 오스만 제국은 페르시아, 폴란드, 오스트 리아, 러시아와 같은 주변국들과의 전쟁에 시달렸다. 1768~1774년에 걸친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의 전쟁 종 식 이후,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의 제물이 되 었다. 1853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1825~185)는 오스만 제국을 '유럽의 병자' 라고 묘사하였다. 유럽의 간섭을 불러들인 19세기 최초의 사건은 1821~1832년 에 발생한 그리스 독립 전쟁이었다. 1827년에 영국-프 랑스 함대가 나바리노(Navarino) 해전에서 오스만과 이 집트 함대를 격퇴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 군 대가 에디르네(Edime)까지 진격하였다. 유럽 열강들은 1832년의 런던 회의에서 오스만 정부에게 그리스의 독 립을 인정하라고 강요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19세기에 두 차례나 더 러시아와 전쟁 을 하였다. 1853~1856년의 크림 전쟁 때 프랑스와 영 국은 오스만 제국과 함께 러시아에 대항하였으며 이 전 쟁을 종식시킨 파리 조약으로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 내 에서 동방 교회를 보호한다는 주장을 철회하였고, 발칸 지역에 대한 간섭도 포기하였다.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간의 전쟁은 1877년에 다시 시작되었다. 불가리아에서 발생한 반란의 진압과 세르비아에 가해진 오스만 군대의 위협으로 러시아 군대가 불가리아를 통과하여 에디르네 까지 진격해 오자, 오스만 정부는 산 스테파노(San Stefano) 조약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조약은 유럽에서의 오스만 영토를 트라키아 동부 지역으로 한정시켰다. 발 칸 지역에서 러시아의 지배적인 위치를 인정하지 않으려 고 하였던 다른 유럽 국가들은 1878년 베를린 회의를 소집하여 러시아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몇 가지 결정을 내렸다. 즉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는 완전한 독립국으로 인정되었으며,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Hareggovina)는 오스트리아의 통치 아래 두기로 결정하였다. 명목상으로 만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키프로스(Kipos)는 영 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수많은 전쟁을 치렀음에도 불구 하고, 러시아는 베사라비아(Bessarabia)와 카프카스 지역 에서 소규모의 영토만을 획득할 수 있었다. 19세기에 프랑스는 알제리와 튀니지를 차지하였으며 , 영국은 1882년부터 이집트 점령을 시작하였다. 그 영토 들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에 속하는 지역들이었다. 1860 년대와 1870년대 초에 유럽 열강들과 동등한 제국을 키 우고 싶었던 서구 성향의 지식인들 사이에 '청년 오스만 운동' 이 출현하였는데, 그들은 강력한 중앙 집권 정부, 선거에 의한 국회, 성문화된 헌법 등 서구 정치 제도를 채택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이 고취하고 있던 '오스만 주의' 는 이슬람보다는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고, 의회 제 도에 비무슬림도 참여시키는 통합적인 왕정 국가를 요구 하였다. 결국 1876년 즉위한 아브될하미드 2세(Abdilhamid Ⅱ, 1876~1909)가 청년 오스만 운동의 요구를 수용 하여 유럽 모델의 법령을 선포하고 선거에 의한 의회를 탄생시켰으며, 종교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그러 나 그의 입헌 정치 수용은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려는 정 치적 책략에 불과하여, 의회는 소집한 지 1년도 되지 않 아 해산되었다. 이로 인해 발칸 지역에서 발생한 반란은 유럽 열강들의 간섭을 불러들였으며, 1894~1896년 아 르메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오스만 정부가 30만 명 을 살해하며 강경 진압함으로써 오스만 통치에 대한 유 럽의 여론은 악화되었다. 이처럼 반세기 동안 유럽에서 더욱 고립되었던 오스만 제국은 결국 독일의 지원을 받 게 되었다. 1902년 독일은 베를린에서 바그다드에 이르 는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99년간의 조차권(租借權)을 획득하였고, 계속해서 오스만 제국 경제에 투자하였으 며, 오스만 군대의 훈련과 작전을 담당하도록 장교들을 파견하였다. 청년 터키당의 등장과 입헌 혁명 : 아브될하미드의 억 압적인 정치는 특히 유럽에서 교육받은 지식인들이나 자 유주의 성향의 고급 관리들 사이에 불만을 고조시켰다. 술탄의 통치에 대항하여 젊은 장교들과 학생들이 비밀 단체들을 조직하였다. 청년 장교였던 케말(Mustafa Kemal, 1881~1938)은 처음에는 다마스커스에서 후에는 현 재 그리스에 위치한 테살로니키(TThesalonai)에서 동료 장교들을 규합하여 비밀 조직을 결성하였다. 그가 후에 터키 국민들에 의해 '아타튀르크' (Atatiir) , 즉 '투르크 족의 아버지' 라고 불린 터키 공화국의 국부(國父)였다. 그의 비밀 조직은 1907년 다른 민족주의 개혁 조직들과 병합하여 '통일 진보위원회' (Committee of Union and Progress, CUP)를 만들었다. '청년 터키당 이라고도 불리 던 이 집단은 1876년의 헌법 복원을 추구하였으며, 의 회 정치하에서 강력한 중앙 집권 정부를 수립하고 제국 내의 다양한 요소들을 아우르는 통합된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1908년 7월 마케도니아에서 일단의 부 대가 반란을 일으켜 입헌 정부로의 회귀를 요구하였고, 이에 굴복한 아브될하미드 2세는 그해 11월의 의회 선 거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청년 터키당 정부는 민족주의 자들과 자유 개혁주의자들 간에 분열이 일어나 허약해졌 으며, 전통 보수주의 무슬림이나 보다 큰 자치를 요구하 는 비투르크족 사회의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아브될 하미드 2세는 강제 퇴위되고, 그의 동생 메메트 5세 (Mehmet V, 1909~1918)가 1909년에 즉위하였다. 서구 열강들은 이스탄불에서의 정치적 불안을 이용하여 제국의 일부분을 차지하였다. 오스트리아가 1908년 혁명 직후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시켰고, 불가 리아가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이탈리아가 1911 년에 선전 포고를 하고 리비아를 점령하였다. 그 이전에 비밀리에 동맹을 결성한 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가 1912년 10월에 오스만 지배하의 마케도니 아와 트라키아를 침공하였다. 오스만 군대는 패하였으 며, 트라키아 동부 지역을 제외하고 유럽 전 지역의 영토 를 잃었다. 제국에 닥친 재난은 국내 정치의 변화로 이어 졌다. 1912년 7월에 정권을 장악한 입헌 정부는 엔베르 파샤(Enver Pasa, 1881~1922)가 주도한 쿠데타에 의해 1913년 1월 전복되었으며, 통일 진보위원회의 핵심 당 원인 탈라트 파샤(Mehmet Talat Pasa, 1874~1921), 제말 파샤(Ahmet Cemal Pasa, 1872~1922) , 엔베르 파샤 등 3인 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군사 독재적 성격을 띠기 시작하 였다. 제1차 세계대전과 오스만 제국의 멸망 : 1914년 유럽 이 2개의 동맹으로 분열되어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을 때 엔베르가 주장한 친독일 전쟁론이 군부와 관료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어, 오스만은 1914년 8월 2일 독일과 비 밀리에 동맹을 맺었다. 그 다음날 국가 총동원령이 내려 졌으며, 독일을 제외한 서구 열강들에게 허용되었던 조 차권들이 무효임이 선포되었다. 독일의 지원을 받은 오 스만 해군이 러시아 오데사(Odessa) 항구를 포격함으로 써 오스만 제국은 본격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가담하 였다. 러시아는 11월 5일 오스만 제국에 선전 포고를 하 였으며, 그 다음날 영국과 프랑스가 뒤를 이었다. 약 80 만 명에 달하는 오스만의 군대가 4개의 전선에 투입되었 다. 1915년 오스만 군대는 메소포타미아의 바스라에 전 초 기지를 세우고 바그다드로 진격해 온 영국 원정대를 격퇴시켰다. 그러나 1917년 영국은 다시 공격을 감행하 여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오스만 군대를 메소포타미아 지 역에서 몰아냈다.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는 러시아 군대가 연속적인 승리를 거두며 1916년 7월 에르진잔 (Erzincan)까지 진출하였으나, 러시아는 1917년의 볼세 비키 혁명 이후 전쟁을 포기하였다. 새 러시아 정부는 1918년 3월 오스만 정부와 브레스 트 리토프스크(Bret-Linovesk) 조약을 맺었으며, 이 조약 으로 오스만 제국은 동부 지역을 되찾았다. 아라비아 서 부의 헤자즈(Hejaz) 총독이었던 후사인 이븐 알리(Sharif Husayn ibn Ali, 1854?~1931)가 1916년에 아랍 반란을 시 작하자 영국은 전쟁 물자를 제공하고 군사 고문관들을 파견하였는데, 그중 한 사람이 '아라비아의 로렌스 로 잘 알려진 로렌스(T.E. Lawrence, 1888~1935)였다. 1917 년 10월 이집트에 있던 영국군이 팔레스티나를 공격하 여 12월에 예루살렘을 장악하자 오스만의 저항은 고갈 되었고, 그해 10월 초 전쟁을 이끌던 청년 터키당의 3인 조는 독일로 망명하였다. 1918년 7월 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메메트 6세(Mehmet VI, 1918~1922)는 연합군의 명령대로 1918년 10월 30일 무드로스(Mudros)에서 정 전 협상에 서명하였다. 4년의 전쟁 기간 중에 오스만 제 국은 28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였으며, 그중에서 32만 5,000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족과 아르메니아족을 포함하여 2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도 전쟁으로 희생되었다. 케말의 등장과 터키 공화국의 건국 : 1920년의 세브 르(Sevres) 조약에 의해 승전 연합국들은 거대한 제국을 작은 국가로 분할 · 통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전쟁에 패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트 6세는 이 조약에 동의하였지 만, 케말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집단들은 이 조약에 반 대하고 군대를 조직하여 저항을 시작하였다. 터키 민족 주의자들은 술탄의 권위를 무시하며 아나톨리아에 진주 한 연합군과 대립하였다. 연합군에 의해 크게 고무된 그 리스인들은 이즈미르(Izmi, 예전의 Smyrna)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터키 민족주의자들과 전쟁을 하기 시작하였다. 1922년 8월에 시작된 터키의 역공은 그해 9월 터키군이 이즈미르에서 그리스인들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끝났 다. 같은 해 11월 1일 앙카라 정부는 술탄이 폐위되었다 고 발표하였지만, 그의 동생 아브될 메지트(Abdil Mecit) 가 칼리프로서 종교적 수장의 지위를 계승하였음을 인정 하였다. 1923년의 로잔(Lausanne) 조약으로 터키 군대 가 유지하고 있던 당시의 국경이 그대로 인정되었고, 이 로써 앙카라 정부는 당시에 비무장화가 진행되고 있던 다르다넬스 해협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에 주권을 행사 할 수 있었다. 1923년 10월에 공식적으로 터키 공화국의 건국이 선 포되고, 케말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에 칼리프 직위는 폐지되었으며, 같은 해에 헌법이 공표되 어 범민족이 참여하는 선거에 의해 국회를 구성하고 투 표율에 따른 내각도 구성하였다. 1934년에는 여성에게 도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14년에 걸친 케말의 통치 시기 동안 터키는 정치 및 경제 구조에서뿐만 아니라 종교, 사 회, 문화 분야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1925년 터키 정부는 세속 정책을 강화하여 종교 단체의 폐지, 일부 다처제의 금지, 전통적인 원뿔형의 모자 페즈 (Fez) 착용의 금지 등을 발표하였고, 1926년에는 서구 의 시민법을 도입하여 전통적인 이슬람 결혼 제도를 민 법에 의한 결혼으로 의무화시켰다. 1928년에는 이슬람 의 국교 조항을 삭제하고, 문자 개혁도 단행하여 국어 표 기를 아랍 문자에서 라틴 문자로 바꾸었다. 케말은 1938년 사망하였지만, 터키는 서구 모델의 국가로 순조 롭게 변신해 가고 있었다. 이후의 터키 : 1938년 케말에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인외뉘(Ismet Inoni, 1884~1973)는 제2차 세계대전(1939~ 1945) 중에 중립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연합군 측의 끈질 긴 요구와 압력으로 전쟁 막바지인 1945년 2월 독일과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전쟁에 참여하였다. 제2차 세 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 질서가 동서 냉전 체제로 자리잡 자, 미국과 소련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의 터키를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였다. 1946년 소련 의 스탈린 정부는 터키 내 두 해협의 공동 관리를 요구하 며 터키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하였다. 미국은 이 에 대응하여 트루먼 독트린(Tuman Doctrine)을 선언하 고, 마셜 플랜(Marshall Plan)에 따라 터키와 그리스에 재 정 지원을 함으로써 두 해협을 미국의 영향력하에 두었 다. 이어 터키는 1950년에 일어난 한국 전쟁에 소련에 대항하여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1951년에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하고 국내의 모든 공산주의 단 체를 불법화함으로써 철저한 반공 국가 대열에 합류하였 다. 터키 국내 정치도 선거를 통해 여러 차례 변화를 맞 이하였지만, 어떤 정당이 집권해도 종교와 정치의 분리 및 서구 지향이라는 케말의 노선이 부정당하는 일은 없 었다. 그러나 국내 정치와 경제 상황은 순조롭게 진행되 지 못하였다. 수많은 정당의 난립과 이념적 분쟁이 터키 정치를 혼란에 빠뜨렸고, 산업화를 추구하기 위해 무리 하게 끌어들인 외채가 터키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국민 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여론이 악화되면, 집권 여당은 무 리한 정책과 탄압을 강행하며 자신들의 집권 연장을 고 집하였다. 결국 국내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케말의 원칙 에 충실한 군부가·쿠데타를 일으켜 국내 정치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어 갔다. 즉 1960년과 1980년 각각 귀르 셀(Cemal Giirsel) 장군과 에브렌(Kenan Evren) 장군이 이 끈 쿠데타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터키 공화국은 국내외에 산적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국내 문제로는 소수 민족인 쿠르드족 문제인데, 터 키 전체 국민의 약 20%를 차지하는 쿠르드족의 일부가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분리 독립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 들은 1990년대부터 쿠르드 노동당(PKK)을 결성하고 무 장 게릴라를 조직하여 터키 정부에 조직적인 저항을 계 속하였다. 이 때문에 쿠르드 게릴라와 터키 정부군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약 3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9년 쿠르드 노동당의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Abdullah Ozalan)이 체포된 이후 쿠르드 게릴라들의 활동은 주춤한 상태이지만, 이라크 전쟁 이후 이라크 내의 쿠르드 문제와 관련하여 언제 쿠 르드족 문제가 재개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국제 문제로 는 키프로스 문제에서 비롯된 그리스와의 관계 악화를 들 수 있다. 그리스계 민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터키계 민 족이 소수를 차지하고 있는 키프로스에서 1974년 중반 그리스 주도의 쿠데타가 발생하자, 터키 정부는 즉각 군 대를 보내어 섬의 35%를 장악하였다. 게다가 1970년대 초반에 그리스 섬 주변의 대륙봉에서 원유가 발견되자, 터키와 그리스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미국, 영 국, 유엔의 외교적 중재로 전쟁은 피할 수 있었지만, 양 국의 관계는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다. 이 외에도 고율의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을 동반한 고질적 인 경제 불황이나, 정부의 서구화 · 세속화 정책에 불만 을 품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준동이 터키의 미래에 암울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그리스도교 역사] 교회에 대한 정책 : 오스만 제국은 투르크족 기원과 이슬람의 기초에서 시작되었지만, 출발 부터 다양한 민족과 종교의 이질적 혼합체였다. 민족성 은 오직 종교로만 결정되었다. 그리스, 아르메니아, 유대 민족을 비롯한 비무슬림들은 '밀레트' (millet)라고 불리 는 공동체로 분류되어 종교적 자치가 허용되었다. 그들 스스로 종교 지도자를 선출하고, 자신들의 관습법에 근 거한 학교, 종교 시설 및 법정을 운영하는 것이 허용되었 지만 소수 종교로서의 여러 가지 제한과 차별을 감수해 야만 하였다. 그들은 공직 등용에 제한을 받았고, 과중한 세금에 시달렸다. 1535년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 (Francois I, 1515~1547)와 술탄 쉴레이만 1세 사이에 최 초의 조약이 조인되어 오스만 제국 내의 모든 그리스도 교인들에 대한 보호권이 프랑스에 주어졌다. 이와 같은 조약은 1604, 1672, 1740, 1802년에 갱신되었다. 한 편 카이나르자 조약으로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 내 동방 교회에 대한 보호권을 부여받았다. 프랑스에 주어졌던 가 톨릭에 대한 보호권은 1886년의 교황 레오 13세(1878~ 1903)의 칙령 이후 교황청으로 넘어갔으나, 베를린 조약 에 의해 다시 프랑스에 주어졌고, 이후 교황청과 프랑스 사이의 외교적 마찰에도 불구하고 이 권한은 계속 유지 되었다. 청년 터키당 시대에 오스만 제국 내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획기적인 개혁 법안이 마련되었다. 1908년 메메트 5세의 승인을 받은 새 헌법은 세금, 군 복무, 정치적 권 한 등에서 제국 내 모든 민족의 평등을 규정하였다. 그리 스도인들은 처음으로 군 입대와 국회 진출이 허용되었 다. 터키 공화국과 교황청의 외교 관계는 1959년 교황 요한 23세(1958~1963)에 의해 맺어졌다. 또한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터키 동방 교회와의 관계를 개 선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을 격려한 바 있는데, 이 자리 에서 교황은 터키 공동체의 생활 속에 그리스도 교회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발표하였다. 터키 정부는 1923년 로 잔 조약에 명시된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유 대교의 세 종교만을 소수 종교로 인정하고 있다. '인정 받지 못한 소수 종교 인 가톨릭의 교회는 '외교적 재산 으로 분류되어 제한받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 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과격 행동이 산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데, 1996년 이스탄불의 동방 교회 총대주교청에 대 한 폭탄 투척 및 1998년의 동방 교회 폭발 사건이 대표 적인 사례이다. 현황 : 1965년 이후 종교별, 민족별 인구 조사가 이루 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터키 내 그리스도교의 신자 수는 추산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터키의 그리스도교는 아르메니아 정교회, 그리스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등의 동방 교회와 아르메니아와 시리아 가톨릭, 그 밖에 수많 은 교파의 프로테스탄트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그리 스도인의 수는 14만 명에 불과하다. 2000년경 터키의 가톨릭 공동체는 52개의 본당에 15명의 주교와 49명의 신부가 있으며, 12명의 수사와 115명의 수녀가 살고 있 는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약 2,000명으로 추산되는 시 리아 가톨릭 신자들도 있는데, 이들의 선조들이 중세에 시리아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오늘날까지 터 키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시리아 가톨릭 교회 의 관습에는 시리아 정교회의 요소들이 뚜렷이 남아 있 지만, 이들은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고 있다. 아르메니 아 가톨릭 공동체는 이스탄불에 10개의 본당과 6개의 초 · 중등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그 밖에 가톨릭에 속하 는 소규모의 공동체들이 있고, 멜키트파(Melchines)와 마 론파(Maronite) 신자들이 터키 남동부의 하타이(Hatay) 지역에서 아랍인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 디야르바키르 (Diyarbakir) 지방에는 칼데아 전례의 그리고 대도시인 이스탄불과 이즈미르에는 불가리아, 그리스, 라틴 전례 의 가톨릭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 약 5만 명으로 추산되는 시리아 야곱파(Jacobite) 교회 는 터키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형 성하고 있다. 그들은 아랍어를 구사하지만 미사에서는 고대 아람어를 사용하며, 주로 터키 남동 지역의 마르딘 (Mardin)과 미드야트(Midyat)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 다. 약 35,000명으로 추산되는 아르메니아 정교회는 터 키에서 두 번째로 큰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총대주교는 이스탄불에 거주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정교회는 30개 이상의 본당을 갖고 있고, 75개의 초 · 중등학교와 2개 의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다. 1960년까지만 해도 터키에 서 가장 큰 규모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형성하였던 그 리스 정교회는 현재 약 2만 명으로 줄었다. 그리스 정교 회 총대주교좌는 이스탄불에 있는데, 이곳은 전세계 그 리스 정교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지만 터키와 그리스 간 의 외교 관계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2004년 현재 터키의 가톨릭 신자수는 전체 인구의 약 0.05%인 32,000명이며, 대교구 3, 대목구 2, 동방 대 목구 1, 본당 51개에, 대주교 4, 주교 2, 신부 63(교구 소속 15, 수도회 소속 48), 종신 부제 3, 수사 13, 수녀 115명이 있다. (⇦ 오스만 제국 ; → 동로마 제국 ; 십자 군 ; 키프로스) ※ 참고문헌  Stanford J. Shaw, History ofthe Ottoman Empire and Modern Turkey, vol I-II,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97/ Bernard Lewis, Modern Tiirkyenin Dogusu, trans. by Metin Kirath, Ankara, Tiirk Tarihi Kurumu, 2000/ Benjamin Braude · Bernard Lewis, Christians and Jews in the Ottoman Empire : The Functioning ofa Plural Society, vol I-II, New York, Holmes and Meier, 1982/ Roderic H. Davison, Turkey : A Short History, 2nd ed., Huntingdon, Eothen Press, 1988/ 2004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 325. 〔申亮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