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레토, 치루스의 (393?~460?)
Thedodoretus Cyren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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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안티오키아의 신학자. 주교. 삼장서 논쟁(三章書論爭 controversia de tribus capitulis)과 관련된 논쟁가. 〔생 애〕 테오도레토는 393년경 안티오키아에서 부유 한 신자 집안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안티오키 아 근방에 사는 은수자들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이러한 가정의 영적 분위기가 그의 신앙심을 일찍부터 일깨워 주었다. 그는 16세에 안티오키아의 독서자(Lector)가 되 었는데, 이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성서에 숙달하였음을 알려 준다. 그가 어떤 세속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 지 않지만,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토착 시 리아인에게는 문화어이자 교양어가 된 그리스어에 정통 하였다는 사실은 그가 세속 교육을 받았음을 추론케 한 다. 부모가 죽은 뒤(416) 테오도레토는 공주(共住) 수도 원에 관심을 갖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후 아파메아(Apamea) 근방에 있는 니케르타이 수도 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423년에 치루스(Cyus)의 주교로 임명될 때까지 그곳에서 6년 동안 수도 생활을 하였다. 주교가 된 후 그는 자신이 맡은 교구의 수많은 이교도 들과 이단자들을 교회로 다시 이끌기 위해 온 힘을 기울 였다.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1~451) 논쟁이 일어났을 때,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인 요한 1세(428~441/442)는 테오도레토에게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치릴로 (Cyrillus Alexandrinus, 380~444)가 네스토리우스에게 보 낸 파문문에 반론할 것을 요청하였다. 테오도레토는 431년에 개최된 에페소 공의회에서 안티오키아 측의 대 변인 역할을 하였으며,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파문을 거 부하였다. 그리고 그는 433년 안티오키아의 요한 1세와 치릴로가 합의한 '일치 정식' 의 초안을 작성한 듯하지 만, 합의서에서 네스토리우스의 단죄를 승인할 것을 요 구하였기 때문에 이 일치 정식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또한 네스토리우스와의 우정 때문에 치릴로와 화해하지 않았으나, 결국 안티오키아의 요한 1세와 동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권유와 압박 때문에 436년 이 정식에 동의하였다. 이후 10년간 평화는 유지되었지만 긴장감이 감돌았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그리스도론 논쟁을 다시 불붙인 사건은 콘스탄티노플 근교의 수도원 원장인 에우티케스(Euthyches)에 관한 논쟁이었다. 테오 도레토는 치릴로가 죽은 뒤 그의 후계자가 된 디오스코 루스(Dioscorus, 444~451)가 주도한 에페소 강도 공의회(Latrocinium Ephesinum, 449)에서 해임되어, 주교좌를 떠 나 아파메아의 수도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정통 신앙을 확언하면서 교황 레오 1세(440~461)에게 호 소하였다(<편지> 113). 451년의 칼체돈 공의회에서 테오 도레토는 복권되었지만, 자신의 전통 신앙을 입증하기 위해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해야 하였다. 그 뒤 그는 자신 의 교구로 돌아가 사목 및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으며, 아 마도 460년경에 사망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저 서〕 테오도레토는 주교직을 맡기 이전부터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저술을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치릴 로를 제외하면 5세기에 그처럼 거의 모든 유형의 글을 쓴 다작의 저술가는 매우 드물다. 그는 450년에 쓴 <편 지> 145에서 서른다섯 편의 저작을 하였다고 기록하였 다. 이 편지는 작품의 연도를 확인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이다. 이에 따르면 그의 저술 활동 기간은 에페소 강 도 공의회 이전, 에페소 강도 공의회와 칼체돈 공의회 사 이, 칼체돈 공의회 이후 시기로 구분되지만 이 세 시기 이외에 쓰여진 작품들을 시기적으로 정확히 밝히는 데에 는 종종 어려움이 뒤따른다. 논쟁서와 교의서 : 그가 확실히 주교직을 맡은 초기에 쓴 논쟁서 중에는 한 작품도 남아 있지 않다. 최근에 테오 도레토의 작품으로 밝혀진 두 작품, 곧 유스티노(Justinus, 100/110?~165)의 이름으로 전해진 《올바른 신앙에 관한 설명》(Expositio rectae fidei)은 431년 이전에 쓰여졌다. 또한 치릴로의 이름으로 전해진 《거룩한 삼위 일체론》 (De sancta trinitate)과 《주님의 육화》 역시 431년 이전에 쓰여졌는데, 본래의 제목은 《거룩한 삼위 일체의 신성에 관한 신학, 육화된 말씀의 인성과 구원 활동》(De theologia sanctae trinitatis et de oeconomia)이었다. 431년 초에는 치 릴로가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12조항 파문문에 대한 논박서인 《치릴로의 12조항 파문문 논박》(Impugnatio XII anathematismorum Cyrill)을 저술하였는데, 그 논박서의 내용은 치릴로의 답변서인 《테오도레토를 논박하는 12 조항 파문문의 변론》(Apologia XII anathematismorum contra Theodoretum, 75, 1147~1190)에 거의 완전하 게 남아 있다. 이와 달리 에페소 강도 공의회 직후 치릴 로의 그리스도론을 논박하는 작품인 《치릴로와 에페소 공의회를 논박하는 다섯 권의 책》(Pentalogus contra Cyrillum et concilium Ephesinum)을 저술하였으나, 현재는 그 리스어와 라틴어 단편만 남아 있다. 438년 치릴로가 이 미 죽은 다르소의 디오도로(Diodorus Tarsens, ?~394?)와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Theodorus Mopsuestenus, 350?~ 428)를 공격하자, 이들을 변론하기 위해 저술한 《디오도 로와 테오도로 변론》(Pro Diodoro et Theodoro)은 거의 대 부분 소실되었다. 그의 논쟁서 가운데 에우티케스의 단성 설을 폭로하고 논박하기 위해 447년 저술된 《걸식 수도 자 혹은 천(千)의 얼굴을 한 자》(Eranistes seu Polymorphos)만이 완전하게 남아 있다. 테오도레토의 그리스도 론이 이론적으로 원숙해진 이 책에서는, 논증을 위해 88 권의 교부들 작품에서 298개 이상의 발췌문을 수록하였 다. 여기서 그는 에우티케스의 단성설이 전에 있던 여러 형태의 이단(그노시스주의, 아리우스주의, 아폴리나리우스주 의)에서 구걸하여 모은 유설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저서 는 치릴로의 모음집에 대응하는 안티오키아 그리스도론의 선집을 제시하려고 하였다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호교서 : 고대 후기의 마지막이자 가장 뛰어난 반이교 적 호교론인 《이교인의 질병 치유》(Graecorum affectionium curatio) 또는 《그리스 철학에서 입증된 복음의 진리》 (Evangelicae Veritatis ex Gentilium Philosophia Cognitio)는 437년 이전에 쓰여진 테오도레토의 초기 작품이다. 또한 이 유형에 속하는 《섭리에 관한 강연》(Orations on Divine Providence)은 435~437년에 쓰여졌으며, 테오도레토의 수사학적 능숙함을 보여 주는 유일한 작품이다. 성서 주석서 : 안티오키아 학파의 마지막 대표자인 테 오도레토는 성서 전체를 주석하였다. 이에 속한 주석서 로 아가, 다니엘, 에제키엘, 열두 소예언서, 시편, 이사 야, 예레미야, 바오로의 열네 편지 등 본래적인 의미의 주석서가 있으며,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쓰여진 주석서 (Erotapokriseis)로는는 구약 팔경과 사무엘, 열왕기가 있다. 역사서 : 《종교사》(Hiatoria religiosa) 또는 《수도자 역 사》에서 테오도레토는 시리아 수도자들의 생애를 기술하 였다. 그는 니케르타이 수도원으로 물러난 뒤, 에우세비 오(Eusebius Caesariensis, 260/265?~339)의 《교회사》를 이 어받아 324년부터 네스토리우스 논쟁이 일어나기 직전 인 428년까지의 사건들을 담고 있는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orum)를 저술하였다. 또한 칼체돈 공의회 이후 에는 자신의 그리스도론 사상에 관한 폭넓은 연구 자료 를 제시한 《이단적 허구의 개요》(Haereticarum fabularum compendium)를 저술하였다. 이 저서는 네스토리우스와 에우티케스의 가르침까지 모든 이단을 평가하고 올바른 신앙을 설명하였다. 서한 : 테오도레토의 많은 편지 중에서 232통이 세 개 의 모음집으로 분류되어 남아 있다. 이 편지들은 역사적 관심사와 사회적 · 문화적 생활에 관한 증언이란 가치를 넘어, 431년부터 칼체돈 공의회 이후까지 자신의 그리 스도론과 네스토리우스 논쟁의 발전을 알려 주는 중요한 기록 문서이며 그의 인격과 활동에 관한 가치 있는 정보 도 담고 있다. 〔평 가〕 테오도레토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스승인 다르 소의 디오도로와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작품과 네스토리우스 논쟁 과정에서 나 타나듯이, 그는 자신이 관여하였던 모든 분야에 매우 정 통한, 합리적인 저술가였다. 호교가, 논쟁가, 신학자, 역 사가, 성서 주석가로 그는 늘 전통을 중시하였다. 그는 <편지> 119에서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설주의자들을 반 박하면서도 중용적 입장을 취하였으며, 속성의 호환을 거부하였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완전한 본성을 취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삼장서 논쟁과 관련하여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단죄받아, 그의 중요한 많은 작품들이 소실되었다. (→ 삼장서 논쟁 ; 에 페소 강도 공의회 ; 치릴로, 알렉산드리아의 ; 테오도로, 몹수에스티아의) ※ 참고문헌 G. Koch, Strukturen und Geschcihte des Heils in der Theologie des Theodoret von Kyros, Frankfurt am Main, 1974/ A. Viciano, 《LThK》 9, 2000, pp. 1401~1404/ J.-N. Guinot, 《TRE》 33, 2002, pp. 250~254. 〔河聖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