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로, 몹수에스티아의 (350?~428)

Theodorus Mopsuestenus

글자 크기
11

주교. 그리스 교부. 안티오키아 학파의 가장 위대한 성 서 주석가. 네스토리우스 논쟁과 그 후의 삼장서 논쟁 (三章書論爭, controversia de tribus capitulis)으로 인해 제2 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에서 단죄받았다. 〔생 애〕 테오도로의 생애에 관해서는 동시대 세 명의 역사가(치루스의 테오도레토, 《교회사》 V, 27, 40 ; 소크라테 스, 《교회사》 VI, 3 ; 소조메노, 《교회사》 VIII, 2) 및 네스토리 우스파인 세에르트(Se' ert)에 의해 11세기에 저술된 《연 대기》가 알려 준다. 요한 그리소스토모(Johannes Chrisostomus, 344/354?~ 407)와의 서신 교환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테오도로는 350년경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이교인 수사학자 리바니우스(Libanius, 314~ 393?)에게서 교육을 받았고, 스무 살 때 요한 그리소스 토모를 알게 되어 평생 우정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다르 소의 디오도로(Diodous Tarsens, ?~394?)가 세운 안티오 키아 부근의 수도원 학교에 들어갔는데, 테오도로는 얼 마 동안 결혼과 독신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를 결 정하지 못하였지만 큰 내적 위기 없이 신학 공부를 마쳤 다. 공부가 끝난 뒤 그는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인 플라 비아노(Flavianus, 381~404)로부터 383년에 사제품을 받 았으며, 안티오키아 분열 동안 사목자와 신학자로서 신 니체아파인 플라비아노를 도왔다. 이 시기에, 아리우스 주의자인 에우노미우스(Eunomius, 325?~394)와 아폴리나 리우스(Apollinarius Laodicensis, 315?~390?)를 논박하는 그의 수사학적 · 문학적 활동은 곧바로 신학자로서의 명 성을 드높게 하였다. 테오도로는 386년부터 몇 년간 다 르소에 머문 뒤, 392년 올림피우스의 후계자로 칠리치 아(Cilicia) 지방 몹수에스티아의 주교가 되었다. 세에르 트의 《연대기》( 《PO》 5, 286~287)에 따르면, 그는 그곳에서 이교인의 우상 숭배에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또한 36년 동안 주교로 있으면서 수많은 주석서와 교의서를 저술하 였을 뿐만 아니라, 성령 부인론자와 벌인 토론에서 성령 의 신성을 변론하였다. 394년에 테오도로는 콘스탄티노 플에서 열린 지역 교회 회의에서 보스트라(Bostra)의 주 교 임명에 관한 문제를 중재하였는데, 그의 설교는 이 교 회 회의에 참석한 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 (379~395)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주교로 지내는 동안 테오도로는 당시의 주요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특히 청년 시절부터 우정을 나누 어 온 요한 그리소스토모와의 관계는, 그가 추방된 뒤에 도 유지되었다. 테오도로는 요한을 위해 동로마 제국의 아르카디우스 황제(395~408)에게 선처를 부탁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외에도 자신의 《요한 복음 주 석서》를 헌정한 바실리오(Basilius Magnus, 329~379)와 나 치안츠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azianzenus, 329/330~ 389/390) 및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Cynilus Alexandrinus, 380~444)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 후대의 작가들은 네 스토리우스 논쟁이 일어난 뒤 더이상 이 우정을 지속시 키지 않은 치릴로의 변심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420년 테오도로는 펠라지우스 논쟁에서 면직된 에클라 눔의 율리아누스(Julianus ab Eclano, 380?~455)가 몹수에 스티아에 잠시 머무르는 것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칠리 치아 교회 회의에서 그를 이단자로 단정하는 데에는 주 저하지 않았다. 테오도로는 428년 네스토리우스 논쟁이 일어나기 전에 생애를 마쳤다. 〔작 품〕 에벳예수(Ebedjesu)와 세에르트의 《연대기》에 테오도로의 작품 목록이 언급되는데, 그 내용처럼 그는 다작의 저술가였다. 두 목록은 서로 보완되지만, 몇몇 작 품의 제목은 조금 차이가 있다. 테오도로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가장 저명한 성서 주석가로, 성서를 주석하지 않 은 네스토리우스와 더불어 페르시아 교회에서 가장 중요 한 신학자로 여겨진다. 남아 있는 대부분의 성서 주석서 는 그리스어 원본이나 시리아, 라틴어 번역으로 전해졌 다. 그렇지만 테오도로는 553년 삼장서 논쟁에서 단죄 되어, 교의서와 성서 주석서를 비롯한 거의 모든 작품이 파기되었다. 이 사건으로 단편만 남은 그리스어 작품이 종종 시리아 번역의 완전한 본문으로 발견되기도 한다. 구약성서 주석서 : 《창세기 주석서》는 시리아어와 그 리스어 단편이 남아 있는 반면, 《출애굽기 주석서》는 거 의 소실되었다. 그 밖에도 테오도로는 여호수아서와 판 관기를 주석하였지만,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알렉산드리 아의 치릴로에게 헌정된 《욥기 주석서》는 제2차 콘스탄 티노플 공의회 문서에 몇몇 부분이 인용 · 보존되어 있 고, 《집회서 주석서》는 시리아어 번역이 단편으로 남아 있다. 시편 1-31장의 주석은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가 한 라틴어 번역에 남아 있고, 32-60장은 그리스어로, 61-80장은 성서 주석서 선집에 남아 있어 1-80장은 완 전하게 되찾을 수 있었다. 그 밖에 118장과 138-148장 은 시리아어 번역으로 남아 있다. 《소예언서 주석서》는 그리스어 원본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테오도 로는 대예언서 중 이사야서, 에제키엘서, 예레미아서, 다 니엘서를 주석하였지만, 몇몇 단편만 전해진다. 신약성서 주석서 : 구약성서 주석서처럼 신약성서도 대부분 주석되었다. 테오도로는 모든 복음서를 주석하였 지만 《요한 복음 주석서》만이 시리아어 번역으로 완전하 게 전해지며, 나머지는 수많은 그리스어 성서 주석서 선 집에 단편들로 전해진다. 《마태오 복음 주석서》의 그리 즈어 단편들이 있는 반면, 마르코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 주석서에 관해서는 일부 전승에서만 언급된다. 메르브의 이쇼다드(Ischodad von Merw)가 9세기에 테오도로의 《사 도 행전 주석서》를 인용하였지만, 이것이 돕슈츠(E. Dobschutz)가 편집한 단편들과 같은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또한 테오도로는 바오로의 작품도 모두 주석하였 다. 그가 베드로의 첫째 편지, 야고보의 편지, 요한의 첫 째 편지를 어디서도 인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는 시리아-안티오키아 규정 규범의 특성과 관계 있는 것 같다. 교의서 : 세에르트의 《연대기》 목록과 에벳예수의 목 록에 나오는 신학서가 같지 않기에, 테오도로의 작품을 확인하는 것은 다른 유형의 작품보다 더 어렵다. 그리스 어로 된 각 저서의 제목이 시리아어와 아라비아어에서 다르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392년 이전 안티오키 아의 사제 시절에 쓰여진 주저(主著) 《아폴리나리우스와 비유사파를 논박하는 육화론》(De incarnatione adversus apolinaristas et anomoeos)-5세기 말경 마르세유에서 활 동한 신학자인 겐나디우스(Gannadius)는 이 작품을 훌륭 한 저서로 언급하였다ㅡ은, 1909년 쿠르드족 봉기 때 쿠르디스탄의 세에르트 도서관에 있던 몇몇 시리아어 사 본이 사라진 뒤 몇몇 그리스어 단편까지도 없어졌다. 에 우노미우스를 논박하는 반(反)아리우스 논쟁서는 지금 몇몇 단편들만 남아 있다. 이와 달리 테오도로가 392년 소아시아 아나자르부스(Anazarbus)에서 벌어진 논쟁을 기록한 《마체도니우스파와의 논쟁》(Disputatio cum Macedonianis)은 시리아어로 완전하게 전해진다. 에벳예수와 세에르트의 《연대기》에서 언급되는 페르시아인들, 우의 (寓意, allegory)적인 해석을 주장하는 이들(오리제네스파) 을 논박하는 원죄에 관한 작품들은 남아 있지 않다. 실천서 : 테오도로의 수덕서 가운데 《사제직》(De sacerdotio)과 《도덕의 완성》(De perfectione morum)은 시리아 의 신비주의자인 니니베의 이삭(Isaak von Ninive, 7세기) 의 글에 몇몇 단편만 전해진다. 시리아어 번역으로 20세 기 초에 발견된 교리 문답 강해들은 전례사와 테오도로 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귀중한 자료이다. 이 작품 들은 삼위 일체론과 그리스도론에 강조점을 두어 니체아 신경(1-10), 주님의 기도(11), 세례(12-14), 성찬례(1516)를 다루고 있다. 〔신 학〕 신학적 위치와 방법 : 테오도로는 살아 있을 때 정통 신학자로 평가받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는 네스토리우스 논쟁 때 그에게 이단자라는 오명을 씌 웠다. 또한 삼장서 논쟁으로 그가 집필한 거의 모든 교의 작품이 파기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동로마 제국에서 안티오키아 신학은 일시적으로 종말을 고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 교회가 그를 '복된 성서 해석가 로 존경하였듯 이, 서방에서도 그의 많은 작품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는 사실로 테오도로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6세기 스 페인과 북아프리카의 신학자 헤르미아네의 파군두스 (Facundus von Hermiane) 및 아일랜드 신학자, 그리고 라 바누스(Rabanus Maurus)와 같은 독일 신학자들도 테오도 로의 성서 주석 방법에 영향을 받았다. 구약성서, 특히 예언서에 관한 그의 역사적 · 문법적 성서 주석은 오리제 네스파의 우의적 해석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그는 성서의 예형론(豫型論, typology)적 고찰을 결코 배 제하지 않는다. 예형론적 해석에서는 율법서와 예언서의 역사적 실재가 미래의 구원 사건에 대한 암시를 내포하 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도 강조된다. 곧 알렉산드리아 학 파의 우의적 방법이 더 심오한 의미를 찾지만 문자적 의 미를 거부하는 반면, 안티오키아 학파에서 사용된 예형 론은 문자적 의미를 기초로 구원사의 관계에서 예언적 기술을 인식하였다. 신학적 주요 주제 : 5세기의 그리스도론 논쟁은 필연 적으로 삼위 일체론에서의 테오도로의 공로를 항상 올바 로 이해하지도 않았고 올바르게 평가하지도 않았다. 삼 위 일체 교의를 결정하는 데 근본적인 기여를 한 그의 성 령론은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의 '동일 본질' 을 실질 적으로 성령의 신성으로 넓힌다.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 스(Meletius, ?~381)의 전통에 있는 테오도로의 삼위 일체 론은 안티오키아의 신니체아파 경향에 가까웠으며, 개념 에서 구니체아파에 연결을 시도하였다. 테오도로는 하느 님 안에서 존재적 내지 자연적 일치에 관해서는 하느님 의 본질과 본성을, 이와 달리 신성에서 다른 위격에 관해 서는 '히포스타시스' (ordotatous) 개념과 '프로소폰' (xpooorov)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는 이 두 개념을 긴 밀히 연결시키기 때문에, 후대에 파쿤두스가 보고하듯이 사벨리우스주의자라는 혐의도 받았다. 그 이유는 두 용 어에서 미묘한 차이가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프로소폰' 은 개별적인 신적 위격의 계시사적 측 면을, 반면 '히포스타시스' 는 내재하는 존립 방식을 뜻 한다. 그렇지만 테오도로는 이에 관한 정확한 구분을 논 리 정연하게 전개하지 않았다.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론은 테오도로의 두 본성론으로 일시적인 정점에 이른다. 그는 두 본성 내지 신적 · 인 간적 존재 방식이 완전한 상호 관계가 있다는 대칭적 그 리스도론의 고전적 대표자로 여겨진다. '취해진 인간' (homo assumptus)은 취하는 로고스에 상응하고, '인간아들' 의 도덕적 발전은 하느님 아들의 은총 작용에 상응 한다. 테오도로는 '취해진 인간' 이라는 전통적 신학에 기초하여 그리스도 안의 인성의 완전성을 매우 강조하였 다. 이러한 강조는 '두-아들 이론' 의 위험을 안고 있지 만, 그는 이를 '프로소폰' 개념으로 해결하였다. 즉 그리 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각각의 '프로소폰' 에 돌릴 수 있 었으며, 두 본성의 일치를 하나의 '프로소폰' 에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테오도로에게 '프로소폰' 개념은 후대의 칼체돈 공의회(451)의 '위격' (persona)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본성' 또는 '히포스타시스' 가 나타나는 형태를 나타낸다. 그리스도론이 발전하지 않은 당시에 테오도로 가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의 혼합되지 않은 일치' (korid ovvoupencv)를 강조한 점을 고려하면, 그는 네스 토리우스주의의 선구자가 아니라 정통 신학자로 평가되어야 한다. 〔영 향〕 네스토리우스가 단죄받은(431) 뒤 그의 추종 자들이 테오도로의 작품들을 널리 유포시키자, 사람들은 그의 정통 신앙을 의심하였다. 서방에서처럼 동방에서도 테오도로와 그의 작품은 극과 극을 달리는 평가를 받았 다. 그는 추종자들로부터, 특히 페르시아의 네스토리우 스파 교회에서 성인으로 존경받는 반면, 반대자들은 제2 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그를 단죄하였다. 이미 네 스토리우스 논쟁을 통해 상당한 손상을 입은 테오도로는 이때부터 비잔틴 전 제국 교회에서 이단자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파쿤두스처럼 영향력 있는 라틴 신 학자들은 테오도로를 결코 네스토리우스 이전의 네스토 리우스주의자로 여기지 않았으며, 일부 미숙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의 교의사적 가치를 인정하고, 당시 반칼체돈 성향에 대해 그의 두 본성론을 들어 강력히 변론하였다. 테오도로는 페르시아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에서 교회 학자로 존경받았다. 486년 마르 아카치우스(Mar Acacius, 5세기 후반) 주도 아래 열린 교회 회의는 그의 삼위 일체 론, 두 본성 및 프로소폰 안에 두 본성이 일치한다는 그 리스도론 용어를 받아들였다. 그 밖에 585, 596, 605년 에 페르시아 지역에서 열린 교회 회의는 테오도로의 학 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헤나나 아디아베누스(Henana Adiabenus, +610?), 사도나(Sahdona, +7세기 중엽)와 같은 신학적 주장에 대해 그의 가르침을 변론하였다. 이 교회 회의들은 신칼체돈 의미에서 테오도로의 유산을 해 석하였다. (→ 디오도로, 다르소의 ; 삼장서 논쟁 ; 테오 도레토, 치루스의) ※ 참고문헌  P. Bruns, 《TRE》 33, 2002, pp. 240~246/ H.R. 드롭너, 하성수 역, 《교부학》, 분도출판사, 2000/ E. Tremp, 《LThK》 9, 2000, pp. 1414~1416. 〔河聖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