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시우스 1세 (347~395)

- 一世

Theodosius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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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시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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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시우스 1세.


로마 제국의 황제(379~395). 이교와 아리우스주의의 확산을 막았고,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에서 결의한 신경을 그리스도교의 보편적인 규범으로 삼았으며, 제1 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를 소집하였다. 〔생 애〕 347년 1월 11일 스페인의 북서쪽 도시인 카 우카(Cauca)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열심한 그리 스도교 가정이었으며, 그의 부친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 스(Flavius Theodosius)는 용감한 군인으로 이름을 날렸 다. 특히 부친은 스페인 지역 로마 제국 군대의 장군으로 영국에서 전쟁을 하였고, 372~373년 발칸 지방에서 사 르마티아족(Sarmatian)을 무찔렀다. 또 374년 아프리카 에서 일어난 왕위 찬탈자 피르무스의 반란을 진압하였으 며, 약탈자들을 엄하게 다스렸다. 아프리카의 장군 로마 누스(Romanus)를 해직시켰으나, 그의 친구인 막시미누 스(Maximinus)와 동료들에게 고발당하여 376년 카르타 고에서 처형당하였다. 부친과 함께 음모에 휘말렸던 테오 도시우스 황제는 후에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368년부터 부친의 지휘 아래 브리타니아(Britannia, 현 영국)에서 픽트족(Pict)과 스콧족(Scot)의 침략을 격퇴하 였고(368~369), 370년 갈리아(Gallia)에서 알레마니족 (Alemanni)과 싸웠으며, 374년 모이시아(Moesia) 지역 의 장군이 되어 사르마티아족을 섬멸하였다. 376년에 스페인 출신의 플라칠라(Flacilla)와 결혼하였다. 그라티 아누스 황제(375~383)는 그를 378년에 군대의 최고 사 령관으로 발탁하였고, 그가 사르마티아족을 물리쳐 군사 적 능력을 입증하자 379년 1월 19일 시르미오에서 공동 황제로 선포하였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발칸 반도 남 동부의 트라키아(Thracia) 지역을 포함한 동방 지역을 맡 았고, 동시에 다키아(Dacia)와 마케도니아 속주도 통치 하였다. 그는 동방 제국의 로마 군대를 새롭게 정비하고, 376년 이후 계속하여 이민족들로부터 시달려 온 발칸 지 역을 회복하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378년 고트족(Goth) 의 침공을 전략적인 요충지인 하드리아노플(Hadrianople, 현 터키의 Edirne) 전투에서 제압하여 평정시켰다. 379년 부터 데살로니카에 머물기 시작한 그도 로마 군대가 점 차 게르만족(Germane)들로 구성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 었다. 그의 군대에는 명성과 지휘력을 발휘하는 로마인 장군들뿐만 아니라 게르만인 장군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 에, 그들을 더이상 배격할 수 없다는 현실적 판단 아래 테오도시우스는 382년 그들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 의 내용은 로마 제국 내에서 고트족이 자치주를 형성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대신, 그들이 로마 군대를 돕도록 하 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테오도시우스는 점점 거세게 공격해 오는 이민족들의 침략을 막아내야만 하였다. 교회 정책에 있어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특별히 그라 티아누스 황제의 정책을 지속시켜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 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교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단들로 인해 교회 내의 상황이 어려워진 것을 알게 된 그는, 380년 가을에 세례를 받았지만 그 전인 2월 28일에 칙 령을 반포하여, 모든 신하와 국민들이 "성 베드로 사도 가 로마인들에게 전하였고, 또한 (로마의) 다마소 교황과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데르 주교가 준수한" 종교를 받아 들이게 하였다(테오도시우스 법전 16, 1, 2). 이때부터 삼 위 일체를 믿는 사람들만이 가톨릭 그리스도인으로 간주 되었으며, 처음으로 '가톨릭' (catholic)이라는 호칭이 정 식으로 문서에 등장하였다. 그는 세례 후 이전의 황제들 과는 달리 '폰티펙스 막시무스' (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 최초의 황제가 되었으며, 이후 이 칭호는 교황의 칭호가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us)를 비롯한 이단들에 단호하게 대처하였고, 제국 안 에서 이교의 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금지시켰다. 381년 여름 그는 자신이 소집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다시 좀 더 명확히 규명된 신경, 즉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을 모든 신자들이 따라야 할 규정으로 발표하였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교회의 서열상 로마의 주교 인 교황 다음의 서열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조치들로 동 로마 제국의 주교들은 381년 이후에도 교회 문제의 해 결에 있어서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그의 교회 정책을 옹호하였다. 그는 하느님이 자신을 신 자들의 보호자로 세우셨다는 사명감을 갖고 380년 모든 국민이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규정을 반포하였으며, 그 후부터는 이단자들을 처단하는 여러 법령을 선포하였다. 그로 인해 381년에는 이교로의 개종이 처벌의 대상으로 규정되었고, 당시까지 옛 국가 의식의 피난처였던 로마 원로원도 382년에 이교 신들에 대한 신앙을 끊을 수밖 에 없었다(테오도시우스 법전 16, 5, 16 이하). 처음에 그는 이교도들에 대해 관대하였고 제국 내에서 높은 관직도 수여하였으나, 383년 브리타니아 주둔군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갈리아 지역에서 세력을 떨친 반 란자 막시무스(Magnus Maximus, ?~388)에 의해 서로마 제국의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그해 8월 25일에 살해되 고, 387년 이탈리아를 침공한 막시무스를 피해 황제 발 렌티니아누스 2세(375~392)가 데살로니카로 도망치자 이후 강경책을 택하였다. 그는 388년 막시무스를 쳐서 이긴 후, 사실상 전 로마 제국의 통치자로서 서방 제국을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에게 내주고 자신은 391년까지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서방 제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친분을 유지하던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Ambrosius, 339~397)와 갈등을 겪는 일도 이 때 발생하였다. 유대인들의 회당을 방화한 극렬주의자들 을 제재하는 과정에서 390년 봄에 데살로니카 주민들이 난동을 일으키자, 테오도시우스는 군대를 보내어 시민들 을 진압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를 안 암브로시오 주교가 황제에게 명령을 철회하라고 요구하였고 황제도 철회를 시도하였으나, 이미 늦어 결국 그곳 시민들 7,000명이 잔인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암브로시오 주교 는 390년 성탄절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공식 참회를 지시하였고(서간 51 ;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서거 애도사 34), 황제는 주교의 지시에 따라 황제의 옷을 벗고 죄인의 참 회복으로 갈아입은 후 공식 참회를 하였다. 이는 후에 벌 어질 카노사 사건의 예표였으며, 주교가 황제의 권위를 누른 승리였다. 395년 2월 25일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장례식 때 행한 애도사에서 암브로시오 주교는 그를 경 건한 신자로서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던 황제라고 칭찬하 였다(애도사 4). 특히 황제가 통회 때 보여 준 겸손의 덕 을 칭찬하면서 그를 다윗 왕에 비유하였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법령으로 이교도들을 더 엄하게 다루었다. 391년 2월 24일 이교도들의 신전 참배 및 제 물 봉헌을 금지시키도록 지시하였으며, 392년 11월 8일 에는 모든 이교 신의 숭상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이교 의 식에 참여하는 것이 대역죄로 선고되어(법전 16, 10, 10. 12) 이후 이교는 공적인 생활에서 급속히 사라졌다. 그 리스도교는 국교가 되고, 교회는 제국 교회가 되었다. 그는 392년 여름에 황제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민 에우제니우스(Eugemius)를 제압하였다. 하지만 암브로시 오 주교의 권유로 그에게 관용을 보였고, 제국의 일치를 위해 균형을 유지하는 데 노력하였다. 테오도시우스는 393년 1월에 후에 서로마 제국의 황제(395~423)가 되는 아들 호노리우스(Honorius, 384~423)를 '아우구스투스' (augustus)로 승격시켜 후계 구도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 나 이교 의식을 고수하려는 이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 해 394년 5월 콘스탄티노플에서 출병하였고, 원정에서 과로한 것이 원인이 되어 병에 걸렸다. 그는 밀라노로 가 서 자신의 아들인 호노리우스를 정식으로 서부 지역의 황제로 공표하려고 하였으나, 395년 1월 17일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병상에서 아들 호노리우스와 동로 마 제국의 황제(395~408)가 되는 아르카디우스(Arcadius, 377?~408)를 스틸리코(Flavius Stilicho, 365?~408)에게 맡 겼다.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황제 콘스탄 티우스 2세(337~361)가 건축한 묘에 안장되었다. 〔평 가〕 5세기에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교회 내에 서 '대제' (大帝)로 인정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법령 이 종교 · 정치적 분야에서 매우 유익하였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모든 질서를 보존하는 역할을 맡았던 그는 군대를 재건하였고, 종교의 영향으로 제국의 개혁 법안을 만들었다. 그는 귀족들이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자리를 마련하여 주었으며, 공직자들의 윤리를 드높이고, 세금 징수 권한을 가진 책임자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배 려하였다. 또한 하층 계급의 평민들을 위하여 특별하게 큰일을 하지는 않았어도, 경제 · 사회적인 면에서 그들의 생활이 더 악화되지 않게끔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는 재임 기간 동안 한 지역도 잃지 않았고, 중요한 결정 은 모두 자신이 내렸다. 고급 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우 수한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였기 때문에, 그의 시대에는 문학과 예술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는 교회사 저술가들 (소크라테스, 소조메노, 테오도레토)뿐만 아니라, 주교들(암 브로시오,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로부터도 긍정적인 평가 를 얻은 위대한 황제이다.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내리 는 데 있어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가장 좋은 자료는 그의 수많은 법령들 그 자체이다. (→ 니체아 콘스탄티노 플 신경 ; 암브로시오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 참고문헌  《ODCC》, p. 1361/ R.H. Schmandt, 《NCE》 13, 2003, p. 884/ A. Lippold, 《LThK》 IX, pp. 1421~1422. 〔張仁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