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필로, 알렉산드리아의 Theophilus Alexandinus(3459~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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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385~412). 신학자. [생 애] 테오필로는 345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주교가 되기 전에 무엇을 하였는지 확실하게 알 려진 것은 없다. 700년경 니키우(Nikiu)의 주교인 요한 에 의해 작성된 《연대기)(Chonicon)에 따르면, 테오필로 는 엠피스라는 도시의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일찍이 부모를 여원 후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하였다고 한 다. 훨씬 더 후대에 만들어진 문헌들에 따르면 테오필로 가 아타나시오(Athanasius Alexandrinus, 295?~373)로부터 교육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는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또한 371~377년 사이에 알렉산드리아에 살며 맹인 디 디모(Didymus Caecus, 3139~395/399?)의 강의를 들었던 루피노(T. Rufinus, 345~410)는 자신이 테오필로의 가르 침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예로니모(Hieronymus, 347~ 419)는 이를 부정하였다(《루피누스 논박》 18). 테오필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전임 총대주교였던 아타나시오(328~373) , 베드로 2세(373~380), 디모테오 1세 (380~385) 아래에서 부제로 일하다가, 385년 디모테오 1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주교들에 의해 알렉 산드리아의 총대주교로 선임되었다. 381년 이전의 알렉 산드리아는 동방 교회에서 으뜸 자리, 그리스도교 세계 에서는 로마에 이어 두 번째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 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가 콘스탄티노플 총 대주교좌에 '새로운 로마 (civitas iunior Romae)라는 특권 을 줌으로써(규정 3항), 알렉산드리아는 세 번째로 밀려 났다. 이때부터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빼앗긴 두 번째 자 리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는 정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좌에 오른 테오필로는 이집트 바깥의 교회 문제에 일일이 개입하면서 알렉산드 리아 총대주교의 권한을 확장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테오필로는 이집트 문화의 파괴, 오리제네스(Ongenes, 185~253) 논쟁,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요한 그리소스 토모(Johannes Chrisostomus, 344/354?~407)의 해임 및 유 배와 관련된 사건 등으로 악명을 얻게 되었다. 그는 이집 트에서 그리스도교를 강화하기 위하여 이교 문화를 조직 적으로 파괴하였다. 특히 391년 이집트와 로마 세계에 서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건축물이던 세라피온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신전들과 도서관을 파괴하였고, 이를 통 해 얻은 보물들을 이용하여 성전과 수도원들을 건축하 였다. 테오필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신학자인 오리제네스의 추종자였고,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인 요한네스 2 세(386~417)와 같은 오리제네스 추종자들의 친구였다. 그 당시 이집트에는 신인 동형설(神人同%說, anthropomorphismus)이 수도승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오리 제네스의 사상을 따르던 소수의 박학한 수도승들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대다수의 수도승들은 반 (反)오리제네스 노선을 걸었다. 테오필로 총대주교는 신 인 동형설을 반박하다가 수도승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 고, 그때부터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꾸어 오리제네스주의 자들의 광적인 적대자로 돌변하였다(39). 결국 그는 401년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에서 오리제네스를 단죄 하였다(소크라테스, <교회사> 6, 75 : 소조메노, 《교회사》 8, 11). 또한 402년에는 자신의 동료였던 알렉산드리아의 이 시도루스, 네 명의 '키다리 수사들' (암모니우스, 디오스코 루스, 에우세비우스, 에우티미우스), 그 밖의 이집트 수도승 들에게 오리제네스주의 이단자들이라는 죄를 덮어씌웠다. 그러자 이들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아르카디우스 (395~408)에게 테오필로를 고발하였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요한 그리소스토모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요한은 이들을 자기 교구에 받아들여 보호하면서 공정한 조사와 판결을 요구하였다. 이때부터 테오필로는 요한에 게 극도의 증오심과 악의를 품게 되었다. 그는 요한이 이 단자들을 비호한다고 비난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치와 방종을 비난하는 요한의 설교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고 느낀 에우독시아(Eudoxia) 황후와 손을 잡고 요한 그리 소스토모에 대한 음모를 꾸몄다. 안티오키아 출신인 요 한이 '새로운 로마' 인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라는 사 실 또한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테오필로에게 한없는 경쟁 심과 시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그는 397년 콘스탄티노플의 선임 주교인 넥타리 우스(Nectarius, 381~397)가 세상을 떠나자, 그 자리에 자 신의 동료인 이시도루스를 앉히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황실은 '황금의 입' (金口, Chrisostomus)이라는 별명을 지닌 안티오키아의 빼어난 설교가 요한을 지명하였고, 테오필로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콘스탄스노플의 총대주교 로 서품해야 하였다(398). 그런데 이제 요한을 몰아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권모술수에 뛰어났 던 테오필로는 개혁적인 총대주교 요한에게 반발하던 주 교 서른여섯 명만 참석한 가운데 칼체돈 근처 황후의 영 지 궤르치아(Quercia)에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를 주재한 그는 요한 그리소스토모를 해임하고 추방 하기로 결정하였고, 이에 대한 황제의 동의를 얻어냈다 (403). 그러나 에우독시아 황후가 유산하자 불길한 두려 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첫 번째 추방 명령은 곧 취소되었 으나 황실을 꾸짖는 요한의 설교는 그칠 줄 몰랐고, 마침 내 그 이듬해인 404년에 그는 돌아오지 못할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다. 요한 그리소스토모가 귀양살이를 떠난 직후, 자신에 대한 나쁜 소문이 민중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가자 테오필로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집트로 되돌아갔다. 그 러나 교황 인노천시오 1세(402~417)는 요한의 상소를 받 아들여 황제와 테오필로의 결정을 거부하였다. 이로 말 미암아 로마 교회는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동방 교회와 10년 이상 친교가 끊어진 채 지내야만 하였다(406~4171 418) 테오필로의 마지막 나날들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는 412년 10월 15일에 세상을 떠났고, 바로 그 해에 요한 그리소스토모는 공적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 요한이 유배지에서 숨을 거둔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테 오필로가 세상을 떠난 지 사흘 만에 알렉산드리아의 총 대주교좌는 그의 조카인 치릴로(Cynilus Alexandrinus, 412 ~444)가 물려받아 또다시 교회 정치 싸움에 휘말리게 된 다. 치릴로는 테오필로보다 더 뛰어난 신학적인 역량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교회 권력 다툼에서 삼촌 못지않은 야심을 불태웠고 교회 정치가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테오필로는 대부분의 동 · 서방 교회에서 잔인하고 불 쾌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지만, 곱트와 시리아 교회에서는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에 관한 고대 저술가들의 평 가도 엇갈린다. 팔라디오(363/364-4317), , 소크라테스(Sokrates Scholasticus, 380?~450?), 소조메노(S.H. Sozomenus, 380?~?)와 같은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그의 정치적인 면모 를 혹평하였다. 반면 치루스의 테오도레토(Theodoretus Cyrensis, 393?~460?, 서한 170)나 교황 레오 1세(440~461, 서한 53)와 같은 교부들은 그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 하고 있으며,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Apophthegmata Patrum)도 테오필로가 수도승들로부터 존경받았다고 증 언하고 있다. 롭트 교회는 10월 15일, 시리아 교회는 10 월 17일을 그의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저 술〕 테오필로의 저술은 단편들으로만 남아 있다. 예로니모의 《서간집》에 그의 편지 7통이 보존되어 있는 데(87, 89, 90, 92, 96, 98, 100), 모두 오리제네스 논쟁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 : (CPG》 2, (Epistola ad Theodosium imperatorem ; 2580~2590)는 386~409년까지의 부활 주기를 담아 황 제에게 보낸 것으로, 이 부활 주기를 채택해 주기를 청하 고 있다. 그리스어로 온전하게 남아 전해지고 있는 설교 로는 그리스도의 최후 만찬을 주석한 《신비로운 만찬에 관한 설교》(Homilia in mysticam coenam : 77, 1016~ 1029)가 있는데,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예루살렘의 치 릴로(Cyillus Hierosolymitanus, 315~387)의 작품으로 오해 받아 왔다. 테오필로의 이름으로 된 수많은 설교들이 롭 트어로 전해지고 있지만, 《십가자형과 선한 강도에 관한 설교》(Homilia de crucifixione et in bonum latronem)와 《참 회와 재계》(De poenitentia et abstinentia)만이 그의 작품이 다. 《죽음과 심판에 관한 설교》(Sermo de morte et de iudicio ; (PG) 65, 200)는 단편으로만 남아 있고, 자선에 관 한 그의 가르침도 《교부들의 가르침》(Doctina Patrum) 속 에 단편으로만 남아 있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도 테오필로의 다양한 고담(古談)이 전해지고 있다. (→ 요 한 그리소스토모) ※ 참고문헌  (PG》 65, 29~68 ; 77, 1016~1029/ 《CPG》 2, 2580~2684/ G. Bosio, Introduzione ai padri della chiesa. secoli Ne V, Torino, 1995, pp. 349~3591 H. Crouzel, (DSp》 15, 1991, pp. 524~530/ A. De Nicola, 《DPAC》 2, 1984, PP. 3403~3404/ H.R. 드롭너, 하성수 역, 《교부학》, 분도출판사, 2001, Pp. 451 ~452, 468~469/ M Fiedrowicz, 《LThK》 9, 2000, pp. 1471~1472. [崔元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