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베아, 알렉산델 (1751~1808)

Gouvea, Alexander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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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베아 주교의 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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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베아 주교의 인장


중국명 탕사선(湯士選). 북경 주교(1782~1808). 포르 투갈의 에보라에서 출생하였다. 1773년 프란치스코회 제3회 정규 회원으로 입회하여 리스본 수도원에서 수도 서원을 하였으며, 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리스본의 왕립 과학 한림원의 회원이 되었다. 1782년 교황으로부 터 북경 주교로 임명되어 다음해 2월 2일 인도의 고아 (Goa)에서 주교품을 받은 그는, 1784년 마카오의 포교 지 신학교를 다시 열고 고아의 라자로회 회원(Lazaristae) 들을 불러 그 신학교를 맡아보게 하였다. 북경에 부임한 것은 1785년 1월 18일이고, 1808년(7월 6일) 뇌일혈로 사망하기까지 24년 간 북경교구를 위해 열심히 일하였 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신심이 깊고 열심한 주교였다. 그 러나 중국 의례에 대한 교황청의 금지령, 특히 조상 제사 금지령을 준수시키는 데 엄격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보호권에 속하는 북경 주교로서 보호권 수호에 집착한 나머지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북 경의 다른 나라 선교사들과 충돌하며 불화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는 북경 주교로 있으면서 건륭(乾隆) 황제의 특별한 대우를 받고 흠천감(欽天監)의 감정(監正), 국자 관(國子館)의 산학관장(算學館長)의 영직(榮職)도 역임 하였다. 〔한국 교회와의 관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 세한 것은 1784년 초이고 구베아 주교가 북경에 부임한 것은 그로부터 1년 후였다. 그러므로 이승훈이 북경에 이르러 남당(南堂) 주교좌 성당으로 구베아 주교를 찾아 가 그의 가르침을 청했다는 달레(Ch. Dallet)의 기술은 잘 못된 것이다. 그러나 이승훈의 영세 사실을 알게 되고 1790년 2월 윤유일(尹有一)을 만나 그에게 견진을 준 후부터는 조선 교회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에게 사목 서한을 들려 보내며 선 교사를 영입할 방도를 강구하도록 권하였고, 같은 해 8 월 윤유일이 건륭제 80회 탄신을 계기로 예비 교우 한 명과 함께 북경에 다시 나타나자 이번에는 선교사 파견 을 약속하였다. 한편 다음해 3월, 국경에서 선교사를 맞 아들일 수 있도록 구체적인 합의를 하고, 같이 온 예비 교우에게 직접 영세를 주었으며 그에게 미사 도구까지 들려 보냈다. 윤유일을 떠나 보낸 후 구베아 주교는 포교 성성 장관에게 2통의 편지를 보냈다(1790. 10. 6). 첫째 편지에서 그는 조선에 기묘하게 복음이 전해지고 신속히 발전한 상황과 이미 선교사를 임명한 사실을 보고하였 고, 둘째 편지에서는 앞으로의 조선 포교지의 관할 문제 에 대해 언급하며 그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만일 조선 포 교지를 프랑스 선교단에 위임한다면 그들이 다시 만주에 독립된 교구를 세우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경 교구 의 평화가 교란될 위험이 있다 하며 은근히 반대하였다. 그는 포교성성에서 조선 포교지를 어느 선교단에 위임하 든 간에 그 결정에 따를 것이라고 하면서도 북경은 조선 과 가장 가깝고 조선에 입국하려면 선교사들이 반드시 북경을 거쳐야 하므로 북경 교구에 위임하는 것이 마땅 함을 강력히 시사하였다. 포교성성은 구베아 주교의 견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 이고 그렇게 교황에게 건의함으로써 교황 비오 6세는 1792년 4월 조선 교회를 구베아 주교의 개인적인 지도 와 보호에 맡기게 되었다. 한편 구베아 주교는 약속대로 1791년 2월에 선교사를 조선 국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조선 교우들이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북경으 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 후 조선 교회로부터 3년 이상 소식이 끊겼다가 1794년 초에 가서야 조선 교회의 밀사 지황(池璜)이 북경에 나타났다. 이에 구베아 주교는 선 교사 파견을 다시 약속하고, 첫번째 선교사는 이미 사망 하였으므로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새 선교사로 임명하 였다. 주 신부는 1794년 말 국경을 넘어 조선 입국에 성 공하였고 1796년 말에는 동지사(冬至使) 편을 이용하여 조선 교회의 현황과 복음 전파의 어려움에 관해 북경 주 교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 신부는 얼마 안 가서 박해(1801)로 희생되 고 말았다. 이에 황사영(黃嗣永)은 박해의 경위와 그 대 책을 건의하고자 구베아 주교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이것이 황사영 〈백서〉(帛書)이다. 이 서한은 사전에 발 각되어 압수되었지만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회 박해 소 식에 접하게 되었다. 포교성성에 보낸 그의 마지막 서한 (1807.10.5)에서 구베아 주교는 이 박해에 대해 언급하면 서 조선 교회는 아직 공포와 박해 가운데 있으므로 그 교 회에 관해 전혀 소식을 들을 수 없고, 다만 교우들이 그 들의 신앙을 항구하게 지키고 있다는 풍문이 나돌고 있 을 뿐이라고 하였다. 구베아 주교에게 위임되었던 조선 교회에 대한 보호권은 개인적인 것이었으므로 그의 사망 과 더불어 끝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교황청은 조선 교 회를 위한 가장 좋은 해결책은 역시 그 길밖에 없다고 판 단하였고, 이리하여 조선 교회에 대한 관할권이 구베아 주교의 후계자로 연장되었고, 그것은 1831년 조선교구 가 설정되고 그것이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구베아 주교 서한〕 한국 교회와 관련된 그의 서한은 모두 16통으로, 그중 파리 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부 대 표 르통달(Claude-Francois Letondal) 신부에게 보낸 것이 4 통,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것이 9통, 그 밖의 것이 3통 이다. 이 서한들은 유실(遺失)된 것으로 추측되는 한두 통을 제외하면 모두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고 또는 포 교성 고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다. ① 르통달 신부에게 보낸 서한 : 1790 년 3월 17일자, 1790년 6월 23일 자, 1790년 10월 20일자, 1796년 10월 11일자. ②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서한 : 1790년 8월 6일자(유 실?), 1790년 10월 6일자(조선 교회 의 기원과 발전), 1790년 10월 6일자 (조선 교회의 관할 문제), 1791년 10 월 5일자, 1801년 9월 15일자, 1802년 6월 23일자(발췌), 1802년 8월 2일자, 1803년 9월 8일자, 1807년 10월 5일자. ③ 수신자 미상 : 1801년 7월 23일자(그 발췌가 'Nouvelles Lettres Edifiantes' , t. 5, Paris, 1820, pp. 295~298에 게재됨). ④ 포교성성 마카오 대표부 마르쉬니(Jean-Baptiste Marchin)에게 보낸 서한 : 1802년 7월 23일. ⑤ 중국 사천(四川) 교구장 생 마르탱(Jean Lidier de St. Martin) 주교 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서 한. 이 서한은 한국 초기 교회사를 아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료이고 따 라서 가장 많이 알려지고 많이 애독 되는 서한이다.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上/ Andreas Choi, L'Erection du premier Vicariat Apostolique et les origines du Catholicisme en Corée, Suisse, 1961/ 《教會史研究》 제8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崔奭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