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주의 - 主義 [라]Thomismus [영]Thom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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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철학, 특히 스콜라 철학의 대표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의 철학 및 신학 체계와 그의 주장을 따르는 이들이 발전시킨 견해들. [명칭의 의미와 유래] '토마스주의' 란 단어가 널리 알 려진 것은 17세기였다. 이전에는 토마스주의란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고, 다만 '토마스주의자' (Thomistae, Thomists)란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토마스 아퀴나스 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토마 스의 의견(opinio Thomae)을 따르거나, 토마스에 따라 (secundum Thomam) 자기 의견의 방향을 설정하는 사람 을 토마스주의자라고 칭하였다. '토마스주의자' 를 가리키는 단어로는 '토마티스트' (Thomatist)와 '토미스트' (Thomist)의 두 가지 명칭이 사 용되었는데, 이 표현들 중 가장 먼저 사용된 예는 1304 년 빌라노바의 아르날도(Amaldus de Villanova, +1311)에 의해서였다. 그는 '토마티스트들' (Thomatistae)에 대항하 여 자신을 방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토미스트' 란 말은 스코투스주의자인 베드로 데 아퀼라(Petus de Aquila)가 집필한 《명제집 주해》(1337 이전)에서 엿보인다. '토마 티스트들' 이란 표현은 1474년 파리의 유명론자들의 자 기 변호 서한에서 처음 등장하였으나, 이 명칭은 15세기 말에 사라졌다. 토마스주의와 관련된 표현으로 '토마시 나 (Thomasina)란 용어도 사용되었다. 그것은 14세기 초 모든 측면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을 견지한 베 드로 데 고디노(Petrus de Godino)가 토마스의 《명제집 주 해》를 해석한 필사본 위에 붙인 짤막한 제명이다. [발전과 전개] 토마스주의란 용어는 세 가지 주요 역사적 시기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다. 첫 번째 시기인 1500년 초까지는 스콜라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여러 학 파들이 경쟁하던 시기였다. 당시 토마스주의는 피조물 안의 존재와 본질의 합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입장을 견지 하고 있었으며, 인식론적으로 유명론과 이데아의 조명이 라는 신플라톤주의의 입장에 맞섰다. 두 번째 시기인 16~18세기까지는 스페인 스콜라주의의 황금 시기로 이 때 토마스주의가 매우 번성하였는데, 당시 토마스주의자 들은 모든 2차 원인들이 1차 원인에 의하여 미리 움직여 진다는 형이상학적 관념을 신학에 적용시켰다. 그리고 세 번째 시기는 19세기 중엽에 시작되는데, 가톨릭 교회 에 의해 승인된 토마스주의이다. 이 시기부터 토마스주 의는 스스로 '영원의 철학' (philosophia perennis)임을 주 창하였다. 즉 토마스주의자들은 다른 전통을 잇고 다른 이론을 대표하는 사상가들과 여러 측면들의 대화에 열중 하였으며, 토마스주의의 원리들을 현대의 사회 · 정치적 문제들에 건설적으로 적용하였다. 중세의 토마스주의(13~16세기) : 1274년 토마스 아 퀴나스가 사망하였을 때만 해도 그의 가르침은 대부분 호평을 받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호의를 가지 고 있었고(호의의 강도는 신학부보다 인문학부에서 더 컸다), 토마스는 자신의 저작을 통해 아베로에스주의에 분명히 반대되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곧 비판과 검열이라는 방식을 통해 그에게 신랄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 비판 은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노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었고, 프란치스코 학파의 교수들은 더욱 강화된 양상을 띠었 다. 그들은 반계몽주의적은 아닐지라도 매우 보수적이었 으며, 토마스의 사상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새로운 세 속화로 의심하였다. 파리의 주교인 탕피에르(Etienne Tempier)는 교황 요한 21세(1276~127)로부터 토마스 철학에 대해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으나, 그의 조사는 월권적인 부분이 많았다. 1277년 급조된 219개의 명제들을 잘못된 것으 로 판결하였지만, 그중 토마스와 관련된 명제들은 12개 에 불과하였다. 그 내용 중에는 천사들의 위상, 인간의 본 성, 세계의 통일성에 관한 토마스의 견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같은 해에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킬워드비(Robert Kilwardby, 1215?~1279)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토마스 사상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그의 계승자인 페컴(John Peckham)은 혹독할 정도의 금지 정책을 폈 다. 토마스의 저작들에 부착된 윌리엄 데 라 마르(Wililiam de La Mare)의 교정표(comectoria)에서 명백히 보여지 듯, 문제시되는 점들은 매우 기술적인 문제였다. 더욱이 그 문제들 중의 일부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고, 그중 많은 부분은 토마스 자신이 《자유 문제 토론집》(Quaestiones Quodllibetales)에서 예견하였던 바였다. 그 토론은 자연과 은총, 이성과 신앙, 결정주의와 자유론, 우주의 영원성과 시간적 제한성, 생물학적 형상으로서의 영혼과 정신으로서의 영혼, 지식 획득에서 감각의 역할과 신의 조명 사이 의 대비를 다른 것들이다. 그런데 반대자들은 그것들 사 이의 관계를 갈등 관계로 파악하여, 토마스를 오해하고 비난한 것이다. 하지만 219개 명제의 단죄로, 신학을 설 명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ames, 기원전 384/383 ~322/321)나 아라비아 주석가들을 활용하는 방식과 범위 는 일대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검열은 파리와 옥스퍼드 밖에서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으며, 그 비판은 실제로는 온건하였 다. 그렇지만 토마스의 동료인 도미니코회 수사들은 그 에 대한 비난 혹은 판결을 무산시키고, 토마스 이론에 대 한 이른바 '교정' 들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기 위해 신속 히 단합하였다. 그래서 토마스의 스승인 알베르토(Albertus Magnus, 1200~1280)는 토마스를 옹호하기 위해 파 리에 잠시 머물렀다. 또한 도미니코회는 토마스의 가르 침을 회원들의 교육에 사용하도록 결의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을 도미니코회의 공인된 철학으로 인정하였다 (1278, 1279, 1286). 고린토의 대주교인 피에르(Pierre de Conflancs)와 벨기에의 철학자인 질(Giles de Lessines, +1304?)은 토마스 사상에 적대적이었던 킬워드비를 설 득하였다. 그리고 영국 도미니코회 회원이었던 옥스퍼드 의 대주교 클랩웰(RichardClapwel, ?~1288?)은 점차 토마 스의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토마스의 주장을 옹호하 는 이들은 영국과 프랑스의 뛰어난 도미니코회 수사들에 의해 보강되었다. 또한 그리스 철학에 호의적으로 기울 어져 있던 교황청으로부터의 지지도 기대할 수 있었다. 토마스 철학은 점차 교회 내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 였다. 비엔 공의회(1311~1312)는 인간이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진 단일체' 라는 토마스의 견해를 승인하였으며, 1323년 교황 요한 22세(1316~1334)는 토마스를 시성하 고 그의 학설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후 토마스의 주장과 학설은 교회로부터 공인된 권위를 갖게 되었다. 초기 50년 동안은 파리의 장(Jean de Paris, 1255?~1306) 과 서턴의 토머스(Thomas of Sutton, 1250?~1315)가 토마 스주의자로 두드러졌다. 다른 주목할 만한 학자들로는 토마스와 동시대인이며 아랍 과학의 미개척 분야를 연구한 라이문도 마르티니(Raymond Martini, 1220?~1285), 메 이클즈필드의 월리엄(William of Macclesfield, +1303), 오 퍼드의 로버트(Robert of Orford, 1250?~1290/1295?), 볼로 냐의 람베르트(Rambert dei Primadizi de Bologna, 1250?~ 1308), 트릴의 베르나르(Bermard de Trille, +1292), 네델렉 의 에르베(Herve de Nédélec, +1323), 니콜라 트레베 (Nicolas Trevet), 루카의 톨레미(Tolemi di Lucca), 라 팔 뤼의 피에르(Pierre de La Palu), 메츠의 자코브(Jacob de Metz, 1295?~1309) 단테(A. Dante, 1265~1321)의 스승인 레미조(Remigio de'Girolami) 등이 있다. 그들은 본질과 존재, 질료와 형상, 실체와 우유(偶有) 사이의 구분을 더 첨예하게 보았다.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은 독일 그룹인 데, 그들은 토마스보다는 알베르토로부터 연유하였으며, 프로클로스(Proklos, 412~485)와 아비천나(Avicema, 980~ 1037)로부터 온 신플라톤주의 경향에 물들어 있었다. 이 그룹에는 슈트라스부르크의 울리히(UIich von Strassburg), 프라이베르크의 디트리히(Dietich von Freiberg, 1250~1310)가 속하며,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에크하 르트(J. Eckhart, 1260~1328)였다. 이 모든 사람들이 도미 니코회 회원들이었다. 수도원 밖의 학자였던 클레르몽의 주교 오베르뉴의 피에르(Pierre de Auvergne, 1240/1250?~ 1304)와 아우구스티노회 수사로 부르주의 대주교인 로마 의 질(Giles de Rome, 1243/1247~1316) 및 나폴리의 대주 교인 비테르보의 야고보(Jacobus a Viterbo, 1255~1308) 역 시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중세 후반기에 이르자 광범위한 철학을 신학에 통합시키려는 시도는 더 세분화된 연구에 의해 이어졌으며, 학 자들은 자신들의 학파 노선에 안착하였다. 이때 논리학 은 논변에 있어서 이전보다 더 날카롭게 전개되었으나, 독창성은 다소 감소되었다. 도미니코 학파와 프란치스코 학파의 경쟁에서 토마스주의는 스코투스주의에 맞섰으 며, 이로써 토마스주의의 모습이 규정되었다. 특히 도미 니코회의 카프레올뤼스(Jean Capréolus, 1380?~1444)는 저 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옹호하는 4권의 책》에 서 토마스의 원전을 체계적으로 사용하여 스코투스주의 자들과 오컴주의자들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 은 양자의 차이나 대립이 아니라 합의였다. 모든 대학들 에서 온건 실재론이 대두되었으며, 루뱅, 괄른, 그리고 뒤늦게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토마스주의 안에서도 르네상스의 영향은 컸다. 이 시 기 토마스주의의 대표자는 스피나(B. Spina, 1480?~1546) , 자벨리(G.C. Javelli, 1470?~1538?) , 프란체스코 실베스트 리(Francesco Sylvestri de Ferrara, 1474?~1528), 그리고 토 마소 데 비오(Tommaso de Vio, Cajetanus, 1469~1534) 등 이다. 이들은 《이교도 논박 대전》(Summa contra Gentiles, 1259~1264)과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1266~ 1273)의 고전적 주석에서 서로 일치하기도 하고, 대립하 기도 하였다. 특히 유비(類比)의 형이상학에 관해서는 서로 일치하지 못하였지만, 라틴 아베로에스주의가 부흥 하는 데 일조하였다. 후에 추기경이 된 토마소 데 비오는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였으며, 훌륭한 학자인 동시에 실무 행정가였다. 그는 존재 혹은 실존을 실체의 현실태 라고 보았는데, 그것은 단순히 술어로 취급되던 실존과 관계없이 본질을 그 자체로 취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 해 주었다. 또한 그는 토마스의 《신학 대전》과 《유(有)와 본질에 대하여》(De ente et essentia, 1254~1256)를 자세히 주석하였다. 역시 <신학 대전》을 주석한 프란체스코 실 베스트리는 이 저술이 신앙과 철학의 관계, 인격의 의미 등에 관해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고 밝혔다. 근대의 토마스주의(16~19세기) : 토마스주의의 두 번 째 시기는 부르고뉴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시기는 스페 인에서의 토마스주의의 황금 시대와 인접해 있었다. 국 제법의 아버지인 비토리아(F. de Vitoria, 1486~1546)의 스 승으로 브뤼셀 출신인 크록케르트(P. Crockaert, ?~1514?) 는 살라망카 대학에서 <신학 대전》을 가르쳤다. 그는 아 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학을 토론을 위한 유효한 도구 로 간주하였다. 16세기 토마스주의 저자들 가운데 카노(M. Cano, 1509~1560)는 자연 과학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바르톨로 메 데 메디나(Bartolome de Medina, 1527/1528~1580) 소 토(D. de Soto, 1494~1560), 마르탱 드 레데스마(Martin de Ledesma, +1574)는 윤리 이론으로 유명하며, 바네스(D. Bafiez, 1528~1604)는 형이상학과 자연 신학에서 토마스 주의의 연구로 각광받았다. 그들은 모두 도미니코회 소 속이지만, 가장 잘 알려진 학자인 수아레스(F. Suárez, 1548~1617)는 관심의 폭과 방대한 규모의 저작들의 체계 적인 저술로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후 성 토마스의 요한(Joannes a Sancto Thomas, 1589~1644)에게서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는데, 그는 토마스 사상에 따라 《토마스 철학의 역정》(Cursus Philosophicus Thomiscus)과 <신학의 역정》(Cursus Theologicus)을 잇따라 출판하였다. 이 저서 들에서 논리학 · 자연 철학 · 형이상학을 영역별로 구별 한 그는 이 구분에 따라 토마스의 철학적 가르침을 분류 하고 재정립하였다. 이 시기에 일어난 종교 개혁은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토마스주의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하였다. 특히 신학자들 이 성서, 사도 전승, 신학 체계 등에 대해 제기한 기초적 인 질문들이 종교 개혁가들에 의해 교리적인 문제로 등 장하였는데, 이 문제들에 대한 두드러진 특징은 토마스의 《신학 대전》에 의해 재정립되고 해결되었다. 트리엔 트 공의회(1545~1563)는 가톨릭 대학교와 신학교의 철 학 및 신학 교육을 강화하면서, 토마스의 저술에 특별한 위치를 부여하였다. 반종교 개혁 동안 설립된 새로운 수 도회들은 토마스를 자신들의 공식적인 스승이라 주장하였고,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그의 가르침을 교육하기 위 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교황 비오 5세(1566~ 1572)는 공의회의 정신을 교구 신학교만이 아니라 교황 청에도 가득 채우기 위해서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 신에 따른 (ad mentem S. Thomae Aquinatis) 방법을 신학 과 철학의 지침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후 토마스의 저작들을 연구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토마스주의의 근대적 부흥이 시작된 곳은 이탈리아였다. 부체티(V. Buzzetti, 1777~1824)와 예수회원인 소르디 (S. Sordi, 1793~1865)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 스의 원전을 직접 연구할 것을 장려하였고, 그로 인해 토 마스의 가르침에서 하느님과 인간 및 사회에 대한 가르침 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 큰 영향을 미 친 예수회 저술가로는 다체글리오(Luigi Taparelli d'Azeglio), 리베라토레(M. Liberatore), 클리이트겐(J. Kleutgen) 등이 있는데, 이들은 1850년 이후 판을 거듭한 철학 교 과서들을 통해 토마스 사상의 부흥을 역설하였다. 그들 이 인식론, 형이상학, 사회 이론 분야에서 취한 입장은 절충적이었지만, 근대의 지적인 쟁점들과 사회적 쟁점들에 비추어 토마스의 저술을 연구하도록 자극하였다. 이 시기에는 철학 과정이 신학과 분리되어 개설되기 시작하였다. 신토마스주의(19~20세기) : 이 시기의 토마스주의는 흔히 '신토마스주의' (Noothomisismus)로 불린다. 이 시기 의 토마스주의 형성에 가장 큰 전기가 된 것은 교황 레오 13세(1878~1903)의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mini Patris, 1879. 8. 4)였다. 이 회칙에서 교황은 교부들과 중세 학자들의 그리스도교 철학을 재발견할 것을 촉구하면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지혜를 재발견할 것을 요청하였 고, 토마스는 "가톨릭 신앙의 특별한 보루이며 영광"이 라고 찬양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반대자들을 건전한 가르침으로 안내하고 설득할 해답을 찾기 위해 토마스 철학의 재건과 정신을 탐구하도록 강력하게 요청 하였다. 이러한 교황의 요청은 1917년에 시행된 <교회 법전》에 수록되어 신학과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토 마스의 방법과 가르침,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고 명시되 었다(1366조 2항). 신토마스주의의 특성은 외부로부터의 영향, 즉 그 자 신의 전통 밖으로부터의 영향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 는 태도에 있다. 그것은 먼저 그 사고 방식에서 엿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토마스주의는 어떤 권위나 학파도 아 니며, 단지 진리의 의무를 다하는 '열린 체계' 일 뿐이다. 이 같은 태도는 오늘날의 토마스주의로 하여금 현대의 다양한 철학 사조와 대화하고자 하는 노력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오늘날의 토마스주의는 현대의 모든 철학적 이론들을 검토하고 그들과의 연관성을 확립하고 자 시도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의 토마스주의에 대한 연 구가 깊이 있고 다양하게 전개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이 연구가 교회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지 적해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교회는 사회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많은 평신도들과 정치인들이 그리스 도교적인 민주주의의 이상을 현실화시키려고 노력하게되었다. 그리고 그 연구는 성직자들에게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마리탱(J. Maritain, 1882~1973)과 질송(E.H. Gilson, 1884~1978)이 그 대 표적인 예이다. 토마스주의 연구에는 어떤 고정적인 이 미지가 없다. 하지만 20세기의 토마스주의자들은 토마스 아퀴나스 의 가르침을 중세의 맥락에서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것과 현대의 문제들과 관련하여 그 가르침을 재해석하는 것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 방면의 선구적인 역사가들 은 토마스의 생애, 저자의 원전, 역사적 관계들을 연구한 도미니코회 회원인 망도네(P. Mandonnet, 1858~1936)와 독일의 그라프만(M. Grabmann, 1875~1949) 신부이다. 토마스주의에 대한 연구는 현재 전 서방 지역에서 활 발히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유럽 대륙에 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영국과 미주 대륙에 서도 주목할 만한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토마스주 의를 세계적인 토론의 마당으로 끌어온 주요 기관이나 인물은 루뱅 대학교와 프랑스 도미니코회 회원들이었다. 루뱅 대학교 부설 철학 연구원(Institut Supérieur de Philosophie)은 1889년 메르시에(D.J. Mercier, 1851~1926)에 의하여 건립되어, 현대 과학과 철학 사이의 틈새를-특 히 인식론의 문제와 관련하여-메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토마스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나 학자들로는 메르시 에 이외에 그레트(J. Gredt, 1863~1940)와 가르데일(A. Gardeil, 1859~1931)이 있다. 가르데일의 수제자인 가리구 라그랑주(R. Garrigou Lagrange, 1877~1964)는 신토마스주 의에서 가장 체계적인 사상가일 것이다. 그는 하느님과 섭리의 문제를 강조하였다. 제일 유명한 학자는 마리탱 이며, 그는 현대의 지도적인 토마스주의 철학자였다. 마 리탱은 인간 질서 안에서 다양한 방법과 지식을 어떻게 통일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으며, 토마스주의의 인격 개념과 공동체 개념을 민주주의 문제에 적용하였 다. 또한 세르티양주(A.D. Sertillanges, 1863~1948)는 창조 활동을 해석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리고 프랑스 철학자 로 특히 철학사 분야에서 체계적인 저술로 유명한 질송 이 있는데, 그는 중세 시기의 여러 가지 지적인 경향들과 연결시켜 토마스가 주장하는 배경을 서술하였다. 또한 토마스의 형이상학에서 '실재' (實在, existens) 개념의 역 할을 밝혔으며, 토마스의 형이상학을 다른 학자들이 저 술한 형이상학과 비교하였다.독일어권에는 만저(G.M. Manser, 1866~1950) , 호르파트(A. Horvath, 1884~ 第一 ) , 그리 고 유명한 중세 철학사가 그라프만 및 마우스바흐(J. Mausbach, 1861~1931) 등이 있다. 토마스주의의 주요 연구 기관이나 대학으로는 파리의 가톨릭 연구소, 밀라노의 가톨릭 대학, 로마의 안젤리룸 대학(Collegio Angelicum) 및 스위스의 프리부르 대학, 독 일의 뭔헨 대학과 민스터 대학 등이 있다. 이 외에 돋보 이는 연구 기관으로는 토론토의 중세 연구소가 있으며, 워싱턴, 세인트 루이스, 몬트리올, 시드니에도 많은 토마 스주의 연구소들이 설립되었다. 오늘날 토마스주의의 연구 규모는 광범위하다. 대표적 인 문헌 목록 기관지인 <토마스주의 공보>(Bulletin Thomiste)에는 매년 거의 500편에 가까운 신간 소개와 서평 이 수록되며, 또 토마스주의의 학술잡지도 25종 이상 출 판되고 있다. 토마스주의자들은 현재의 모든 문제들과 대결하지만, 동시에 내부적으로 고유한 특수 문제에 관 해서 토론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이 개최하는 학술 회의에서는 커다란 논쟁이 벌어진다. 20세기 초에 여러 학술 토론회가 개최되었는데 유명한 것으로는 토마스주 의 협회가 마련한 현상학(1932) , 그리스도교 철학' (1933), 철학과 자연 과학을 의제로 한 모임(1935) 그리 고 로마의 토마스주의 아카데미가 실존주의에 대한 논의 를 위해 개최한 모임(1947) 등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토마스주의자들이 직면한 주된 과제는 적절한 과학 철학의 발전, 인간에 대한 현상학적 · 정신 의학적 발견, 실존주의 존재론과 자연주의 존재론을 평가하는 것이다. 교회는 신학과 철학 교육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방법 이 사용되고 그의 주장이 가르쳐지기를 반복적으로 요청 해 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사제 양성 교령>(0ptatam Totius)에서 신학생들은 신학 고찰에서 토 마스를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밝혔고(16항), <그리스 도인 교육 선언>(Gravissimum Educationis)에서는 토마스 의 발자취를 따라 어떻게 신앙과 이성이 하나인 진리를 함께 추구하는지 더욱 깊이 깨달아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10항). 이후 역대 교황들과 교황청의 교육성은 사제 양 성을 위한 신학교 교육에서 토마스의 철학을 가르치도록 계속 역설하였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 1998. 10. 15)을 통해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 면서 현대 철학을 어지럽히는 일부 사조와 주의들을 경 고하였다. 동시에 교황은 현대 철학의 오류를 바로잡는 역할을 해야 하는 그리스도교 철학의 가장 좋은 본보기 로 토마스의 철학을 제시하였다. (V 가능태 ; 신토마스 주의 ; 토미즘 ; → 가리구 라그랑즈 ; 마리탱, 자크 ; 바 네스, 도밍고 ; 비엔 공의회 ; 소토, 도밍고 데 ; 수아레 스, 프란시스코 ; 스콜라학 ; 신스콜라 철학 ; 신플라톤 주의 ; <신앙과 이성> ; <영원하신 아버지> ; 요한, 성 토 마스의 ; 유명론 ; 질, 로마의 ; 질송, 에티엔 앙리 ; 카 노, 멜키오르) ※ 참고문헌  V.J. Bourke, Thomistic Bibliography. 1920~1940, St. Louis, 1945/ Pierre Mandonnet . Jean Destrez, Bibliographie Thomiste, Paris, 1921/ Maurice de Wulf, Histoire de la philosophie médievale, 5th ed., Paris · Louvain, 1925, Ⅱ, pp. 33~51, 112~151, 197~203, 272~2771 M. Schneid, Die neuere thomistische Literatur, Literarischer Handweise 20, 1881/ G. Feldnor, Die Neu-Thomisten, Jahrbuch fiir Philosophie und spekulative Theologie 8(1894), 9(1895)/ G. La Piana, Recent Tendencies in Roman Catholic Theology, Harvard Theological Review 15, 1922, PP. 122ff/ M. Grabmann, Die Geschichte der katholischen Theologie seit dem Ausgang der Vaiterzit, Freiburg, 1933, pp. 218ff/ P. Dezza, 1 neotomisti italiani del secolo XIX, Milano, 1942, 1944, 2 vols./ J.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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