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레프 니콜라예비치 Tolstoy, Lev Nikolayevin(1828~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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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톨스토이.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사상가. 문명 비평가. 도스토예 프스키(F.M. Dostoevsky, 1821~1881), 투르게네프(I. Turgenev, 1818~1883)와 함께 러시아 사실주의의 3대 문호 (文豪) 중 한 사람. 〔생애와 작품] 톨스토이는 1828년 9월 9일 모스크바 에서 약 200km 떨어진 툴라(Tula)에 있는 영지 야스나 야폴랴나(Yasnaya Polyana)에서 유서 깊은 백작 가문인 톨스토이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친척들과 가정 교사들에 의해 양육되었 다. 어려서부터 일기 쓰는 습관을 가지고 있던 그는 관찰 력과 언어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고, 문학에 심취하여 푸 슈킨(A. Pushkin, 1799~1837)의 시와 성서를 탐독하였다. 1841년 친척을 따라 카잔(Kazan)으로 옮겨간 톨스토이 는 1844년 카잔 대학교의 동방학부에 입학하였으나 학 업에 흥미를 느끼지는 못하였고, 도덕 철학에 관심을 가 졌다. 특히 루소(J.J. Rousseau, 1712~1778)의 저작들은 소 년 톨스토이의 정신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디킨스(C. Dickens, 1812~1870), 레르몬토프(M. Lermontov, 1814~ 1841), 스턴(L. Sterne, 1713~1768) 등의 저작을 즐겨 읽었다. 형식적인 수업에 실망한 톨스토이는 1847년 대학을 자퇴하고 영지인 야스나야폴랴나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내 시골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1851년에 형 니콜라이가 복무 중이던 카프카스(Kavkaz)로 떠났다. 군사학교를 마 치고 포병 장교가 된 톨스토이는 다뉴브 전선과 크림 전 쟁(1853~1856)에 참전하여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였다. 그의 본격적인 창작 활동은 군생활 중 시작되었다. 여가 를 이용하여 습작한 중편 소설 《유년 시절》(Detstvo)은 시인인 네크라소프(N.A. Nekrasov, 1821~1878)가 편집장 이던 잡지 <현대인>(Sorememcik)에 발표되자마자 비평 계의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작가의 자전적 요소와 상상적 허구가 주인공인 소년 니콜렌카의 시각을 통해 묘사되는 회상록 형식의 이 소설은, 어린 시절의 슬픔과 기쁨, 꿈과 동경을 담고 있다. 비평가들은 《유년 시절》의 주인공에 대한 심리 묘사를 극찬하였다. 《유년 시절》은 뒤이어 나 온 《소년 시절》(Orochestvo) <청년 시절》(Yunost)과 함 께 톨스토이의 자전적 '삼부작' (Trilogy)을 이룬다. 군복무 시절 톨스토이는 전투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 로 소설 《세바스토폴 이야기들》(Sevattopolskiye rasskazy, 1855~1856)을 저술하였다. 소설과 르포 형식이 융합된 이 작품에서 그는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표출하 였고, 러시아 병사들의 특성과 심리를 파헤쳤다. 1856년, 전쟁이 끝나자 톨스토이는 군복무를 마치고 상트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에 머물렀다. 이미 작 가로서 상당한 명성을 획득한 그는 투르게네프, 네크라 소프, 체르니세프스키(N.G. Chemyshevsky, 1828~1889)와 같은 문단과 비평계의 주요 인사들과 친교를 맺기 시작 하였다. 이듬해 프랑스 · 스위스 독일 등지로 유럽 여행 을 하고 돌아온 톨스토이는 좀 더 '쓸모 있는 일' 을 갈망 하며 야스나야플라나에 정착한다. 그곳에서 영지 관리와 농민 자녀들의 교육 개선에 착수한 그는 농민 학교를 열 고 아동용 교재를 편찬하는 한편, 유럽식 교육 이론과 지 식을 얻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유럽을 방문하는 열정을 보였다. 1862년 나이 34세에 톨스토이는 궁정 시의(侍醫)의 딸 소피야 베르스(Sofya Andreyevna Bers)와 결혼하였다. 결혼 초의 행복한 가정 생활과 성공적인 영지 관리는 그 에게 왕성한 창작열을 불어넣었고, 그 결과 《전쟁과 평 화》(Voina i mir, 1863~1869), 《안나 카레니나》(Ama Karenina, 1875~1877)가 발표되었다. 7년 동안에 걸쳐 완성시킨 《전쟁과 평화》는 1805~ 1814년 사이에 벌어진 러시아 5대 귀족 가문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으며,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소 재로 한 대하 소설이다. 이 작품에는 60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생로병사 · 희노애락과 같은 인간 삶의 모든 측 면이 묘사되고 있다. 또한 역사는 한두 명의 영웅에 의해 서 움직이거나 변경되는 것이 아니며, 개인의 의지는 국 민 대다수의 무의식적 정신 앞에 의미를 상실한다는 톨 스토이 특유의 역사 철학이 내재되어 있다. 한편 한 여인 의 사랑과 가정 문제를 상세하게 다룬 장편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농노제 폐지 이후 러시아 귀족 사회의 한 단면을 반영하고 있다. "복수는 나에게 있으니 내가 이 를 갚으리라"는 작품의 제사(題詞)는 불륜을 저지른 여 주인공 안나를 단죄하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타락 한 사교계 사람들에게 보내는 작가의 메시지이다. 1870년대 중반 이후 톨스토이의 세계관에 심각한 위 기가 일어났다. '회심' (悔心)이라 불리는 이 시기에, 그 는 매년 겨울을 보냈던 모스크바에서 상류층과 빈민층 사이의 극심한 모순을 목격하였다. 톨스토이는 사회의 불공평에 항의하고, 상류층의 삶을 부도덕하다고 여기며 이를 거부하였다. 또한 자신의 기존 작품을 포함하여 국 가, 착취, 폭력, 전쟁, 군대, 교회, 당대 예술을 부정하였 고, 오직 서민들의 삶에서 그리스도적이며 보편 인류적 인 이상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시기에 그가 세운 도 덕 · 철학적 가르침의 원칙은 '폭력으로 악을 갚지 않는 것' (무저항주의)과 모든 사람은 정신적으로 완성되어야 하며 자신을 자각하고 자기 마음 속의 악과 싸워야 한다 는 '정신적 자기 완성' 이었다. 또한 그는 '생활의 검소' 를 몸소 실천하며 귀족들에게 소유와 착취를 거부하고 농민과 화합하여 노동을 통해 농민의 세계관과 도덕성을 받아들일 것을 호소하였다. 톨스토이의주의' 로 불리는 그의 가르침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미국 등지에서 열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켜 그는 '인류의 양심' 으로 추앙 받았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이러한 도덕적 · 철학적 원칙을 《교의 신학 연구》(Kritika dogmaticheskogo bogoslaviya, 1880), 《참회록》(Ispoved, 1882),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가》(Chem lyudi zhivy, 1882),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가?》(Tak chto zhe nam delat?, 1886) , 장편 소설 《부활》 (Voskreseniye, 1899) 등을 통해 피력하였다. 특히 러시아 의 모든 사회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민중과 화합한 인간이 정신적으로 부활하는 과정을 묘사한 《부활》에서 정교회를 비판하였다는 이유로, 그는 1901년 러시아 정 교회로부터 파문당하였다. 만년의 톨스토이는 부인과의 불화 때문에 불행하였지만, 다양한 종류의 글을 집필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가르 침을 바탕으로 한 교훈적 에세이, 인생론, 예술론, 어린 이를 위한 민화, 결혼 · 죽음 · 정신적 깨달음을 주제로 한 소설 등이다. 중년의 재판소 관리가 병을 얻어 삶을 마감하는 심리적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린 수작 《이반 일 리치의 죽음》(Smert Ivana Ilicha), 결혼과 사랑, 질투의 문 제를 심도 있게 다른 《크로이체르 소나타》(Kreytserova Sonata), 농민 생활의 비참함을 다룬 희곡 《어둠의 힘》 (Vlast tmy)을 통해 그는 귀족 사회의 정신적 위기와 인 간의 영적 완성, 삶의 의미 모색에 대한 철학적 원칙을 표출시켰다. 톨스토이는 항상 러시아 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하였으 며,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들을 돕고, 폭력과 사형에 반대 하고, 대학생들과 사병 및 혁명주의자들을 대변하였다. 동시대인들 사이에서 그의 도덕적 권위는 매우 높았다. 국적과 연령, 계층을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편 지를 보냈으며, 대화를 나누기 위해 야스나야폴랴나로 그를 찾아왔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이론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였고, 자신의 토지 소유권과 저작권을 포기하였 다. 그러나 가족들은 이러한 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구나 부인과의 불화는 노령의 톨스토이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고, 결국 그는 1910년 10월 28일 주치의와 딸 한 명만을 데리고 야스나야폴랴나를 떠났 다. 정처 없는 여행 도중 그는 11월 20일 랴잔(Ryazan) 의 외딴 마을인 아스타포보(Astapovo)란 간이역의 역장 관사에서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고, 유언에 따라 유년 시 절을 보냈던 야스나야폴랴나의 소박한 묘지에 묻혔다. [평 가] 문학가로서 톨스토이의 탁월함을 의심하는 비 평가는 없다. 분명 세계적으로 위대한 작가들 중 한 사람 이었던 그는 진리를 탐구하면서 동시에 불완전한 지식과 불완전한 인간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것을 찾고자 노력하 였다. 그 결과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완벽하고 합리적 으로 설명하려는 강박 관념 같은 의무감 때문에 그의 이 론은 때로 비난받기도 한다. 특히 1870년 이후 일명 회 심' 의 시기에 그는 담배와 술을 끊고 채식주의자가 되었 으며, 농부처럼 옷을 입고 가능한 한 자급자족의 생활을 하려고 하였다. 나아가 순결이라는 이상에 한층 다가서 고자 아내와의 육체적인 관계도 멀리하였으며, 박애 활 동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가족이 누리는 편안한 삶과, 자신이 원하는 삶 즉 속세의 소유물로부터 해방되고 타인에 대한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은 둔 생활 사이의 괴리에 대해 고통스러워하였다. 그는 지 난 역사는 근본적으로 개인의 도덕적 성장과 정부의 도 덕적 타락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믿었다. 또한 소수에 의 한 다수의 억압이 전세계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하고, 이 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 방법은 인간의 도덕적 성장이라 고 확신하였다. 그는 계급과 국가가 없는 상태를 향한 진 보적 운동은 모든 개인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는 것에 달려 있다고 보았는데, 이 도덕적 완성은 사랑이라는 최 고의 법을 준수하고 어떤 형태의 폭력도 거부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 러시아) ※ 참고문헌 V. Terras, Handbook ofRussian Literature, Yale Univ. Press, 1985, pp. 476~480/ Entziklopedia dlia detej tom. 8, Russkaia literatura XIX veka, Moskva, 2000, pp. 632~647. [金炫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