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리비오 데 모그로베호 Turibius de Mogrovejo(1538~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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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페루 리마(Lima)의 대주교. 리마의 로사(Rose de Lima, 1586~1617)와 함께 라틴 아메리카가 배출한 최초의 성 인. 페루와 라틴 아메리카의 주교들, 원주민 인권의 수호 성인. 축일은 3월 23일. 본명은 토리비오 알퐁소 데 모 그로베호(Toribio Alfonso de Mogrovejo) . 〔생 애〕 투리비오는 1538년 11월 16일 스페인 오비 에도(Oviedo) 교구의 레온(Léon) 근처에 있는 빌라케히 다(Vliiaquejida) 또는 레온 교구의 바야돌리드(Valladolid)에서 부유한 지주 집안의 1남 4녀 중 둘째로 태어 났다. 그의 누이들 중 세 명은 후에 수도자가 되었다. 어 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는 제대를 만들고 꾸미기를 좋아하였으며, 가난한 이들을 즐겨 도왔다. 또한 성모 신 심이 깊어 매일 묵주 기도를 하였고, 주일마다 성모님을 위해 단식하였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자신의 저녁 식사 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엄격하게 금식을 하였기에, 지나치게 금욕하지 말도록 권고해야 할 정도 였다. 그는 12~15세 때 바야돌리드에서 인문학을 교육 받았으며, 1562년에는 삼촌 후안(Juan)이 있는 살라망 카(Salamanca)로 가서 교회법과 시민법을 공부하였다. 2 년 동안 삼촌과 함께 쿠임브라(Coimbra)에 머물다 돌아 온 그는, 산 살바도르 데 오비에도(San Salvador de Oviedo)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였으며, 1574년 7월 그라 나다(Granada)의 종교 재판관으로 임명될 때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다. 투리비오는 온 나라가 주목하는 가운데 5 년 동안 이 임무를 신중하고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1568년 신세계인 라틴 아메리카를 담당하는 교회 회 의가 개최되었을 때, 참석자들은 포괄적인 개혁을 수행 하며 사도 정신에 투철한 주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 하게 되었다. 그래서 리마 대주교인 로아이사(Jeronimo de Loaysa, 1498~1575)가 세상을 떠난 후 주교좌가 공석 이 되자, 모든 사람들은 거대한 나라인 페루의 교회를 잘 이끌고 비신자들의 회개에 장애가 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훌륭한 자질을 갖춘 인물로 투리비오를 지목하였다. 당시 국왕인 펠리페 2세(1556~1598)는 1578년 8 월 28일에 투리비오를 리마의 대주교로 교황 그레고리 오 13세(1572~1585)에게 추천하였다. 예기치 않은 소식 을 접한 그는 십자가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자신에 게 그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아 주시기를 간청하였고, 급 히 왕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은 그런 자리를 감당할 능 력이 없으며 평신도인 자신이 고위 성직자가 되는 것은 교회법에도 어긋나는 일이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결국 대주교로 임명되는 것을 받아들여 그 당시 삭발례만 받 았던 그는 주일마다 연속해서 네 개의 소품과 차부제품 을 받았다. 그리고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1579년 3월 16일에 그를 리마의 대주교로 임명하자 그라나다에서 부제품과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580년 세비야(Sevilla)에서 주교 축성을 받고 그해 9월 페루로 떠났다. 당시 리마 교구는 안데스 산맥 양기슭을 따라서 험준 한 지형에 수많은 오두막들이 흩어져 있는 지역으로 세 개의 도시와 많은 소도시, 마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페 루에 처음으로 침입한 유럽인 장군들은 매우 탐욕스럽고 야심이 많은 사람들이어서, 원주민들을 인간 이하로 취 급하였다. 그들은 정복자라기보다는 해적이나 약탈자에 가까웠으며, 게다가 당시 페루는 내전과 내분까지 겹쳐 서 불행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런 상태의 교구에 1581 년 5월 11일 부임한 투리비오는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 면서 방대한 교구 전체를 찾아다녔다. 높은 산꼭대기를 기어서 넘기도 하고, 폭설을 맞기도 하면서 인디오들의 가난한 오두막을 찾아다녔다. 심지어 맨발로 걸어다닐 때도 있었으나,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며 단식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열렬하고 유능한 목자로서, 가장 먼 지역에 있는 사람들 도 교회의 가르침과 성사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1583년 8월 15일 개최된 제3차 리마 교구 교 회 회의를 시작으로 2년마다 교구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 으며, 7년마다 지구 시노드를 열었고, 성직자들이 추문 과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하였다. 인격을 존중하면서도 불의와 악덕을 엄격하게 꾸짖었고, 공적인 죄를 짓는 사람들의 오만함을 견제하며, 억압받는 가난 한 사람들을 옹호하였다. 하지만 그는 탐욕스럽고 자신 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던 당시의 통치자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당하였고, 직위까지 위협받 았다. 그러나 온유하고 인내롭게 모든 모욕과 공격을 이 겨낸 투리비오는 정의와 진리를 지켜내어 마침내 고질적 인 착취를 근절하고, 복음의 정신에 입각한 그리스도교 정신을 되살려냈다. 그는 온 나라에 신학교와 교회와 수 많은 병원을 설립하였으며, 그 어떤 업적에도 자신의 이 름을 내세우지 않았다. 리마에 머무는 동안에는 매일 여 러 병원들을 방문하여 병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성사 를 집전하였고, 교구에 페스트가 퍼졌을 때에는 자신의 필수품들을 환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을 가 장 큰 기쁨으로 알았던 그는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았 다. 그의 첫 번째 사목 순시는 7년이 걸렸고, 두 번째는 4년, 그리고 세 번째는 이보다 좀 더 짧은 기간이 걸렸 다. 어떤 곳에 도착하든 먼저 성당을 찾아가 제대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그의 규칙이었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교 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침대나 음식조차 없는 곳에 2~3 일씩 머물기도 하였다. 쉬지 않고 교리를 가르쳤으며, 이 가르침을 위해 여러 부족들의 말을 배웠다. 여행 중이라 도 미사를 거르는 일이 없었고, 미사 전후에는 오랜 시간 묵상하였다. 그의 눈에는 오로지 하느님과 하늘나라의 영광만이 보이는 듯하였으며, 그 외의 것에는 전혀 관심 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금욕과 경건한 행동들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투리비오는 1606년 교구 사목 순시 중 사냐(Saña)에 서 병을 얻었다. 죽음을 예감한 그는 자신을 돕던 사람들 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가 갖고 있던 것을 모두 나누어 주라고 유언한 후 성당으로 옮겨 달라고 하여 병자성사 를 받고, 주위에서 시편을 노래하는 가운데 3월 23일 세 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다음해에 리마로 옮겨졌는데 그때까지 부패하지 않았으며, 관절과 피부의 유연성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그는 1679년 교황 인노천시오 11세(1676~1689)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6년 교황 베 네딕도 13세(1724~1730)에 의해 시성되었다. 〔평 가〕 페루 교회에서 수많은 성인들과 뛰어난 목자 들이 배출되고, 수많은 신학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 원들이 세워진 것은 오직 그의 열정이 낳은 열매였다. 그 에게서 견진성사를 받은 사람들 중에는 후에 성인이 된 리마의 로사와 포레스의 마르티노(Martin de Porres, 1579~1639)도 있다. 비록 그가 페루에 처음으로 신앙을 전파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신앙을 널리 확산시키 고 공공연한 악습을 제거하여 참된 신앙으로 성장시킨 것은 분명히 성인의 공로이다. (→ 로사, 리마의 ; 마르 티노, 포레스의 ; 페루) ※ 참고문헌 http://www.catholicculture.org/lit/calendar/month.cfm/ http://www.etwn.com/library/Mary/Turibius.html/F. De Armas Medina, 《NCE》 9, 2003, pp. 761~762. 〔宋炯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