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회 - 會
〔라〕Ordo Cisterciensium Strictioris Observantiae(0.C.S.O.) · 〔영〕Trappists, The Cistercian Order of the Strict Observ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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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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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피스트회를 설립한 랑세 아빠스.
시토회 소속인 라 트라프(La Trappe) 수도원의 랑세 (A.-J Le Bouthillier de Rancé, 1626~1700) 아빠스가 기도하 는 삶, 엄격하고 가난한 삶을 회복하고자 시토회를 개혁 한 것에 기원을 두고 있는, 1664년 설립된 시토회의 개혁 수도회. 〔초기 역사〕 1098년 설립된 시토회는 교회의 발전에 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초대 원장 몰렘의 로베 르토(Robertus Molesme, 1027?~1111), 2대 원장 알베릭 (Albéric, 1099~1109), 3대 원장 하딩(S. Harding, 1109~ 1134)을 거쳐 수도회의 체계를 세우며 크게 발전해 갔다. 그러나 수도회의 재산이 늘어나자, 아빠스들과 수사들은 점차 세속적인 일에 관여하게 되었고 본래의 시토회 정신 은 약화되었다. 이와 더불어 백년 전쟁(1337~1453) 흑사 병(1347~1351), 서구 대이교(1378~1417), 교회록 일시 보유제(수도자가 아닌 사람을 아빠스로 임명하는 제도) 등도 시토회를 황폐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쇠퇴기(1342~1790)를 거치는 동안 수도회 내에서는 다양한 개혁이 시도되었다. 그런데 이는 시토 회 내부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소 독립적인 연합회(Congregtion)를 중심으로 수행되었다. 초기의 더 욱 엄격하였던 삶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일어나면서 1598년에는 샤르무아(Chamoye, 아빠스 Octave Arnolphini) 수도원, 1615년에는 클레르보(Clairvaux, 아빠스 Denis Largentier) 수도원에 개혁 수도회가 설립되 었다. 시토 수도원의 부슈라(Nicholas Boucherat) 아빠스 는 클레르보 계열의 8개 수도원들이 초대 정신으로의 회 귀를 위해 노력하자 이 개혁을 승인하면서 성 베르나르도 (Bernardus de Clairvaux, 1090~1153)의 엄률 수도회(The Congregation of St. Bernard of the Strict Observance)라고 명명하였다. 가장 의미 있는 개혁 중 하나는 17세기 라 트라프 수 도원에서 이루어졌다. 1638년 성직록 일시 보유제에 따 라 12세의 나이에 라 트라프 수도원의 책임자로 임명된 랑세는 자신의 재산과 사제직을 포기하고 수도원에서 영 적 생활에 전념하며 시토회가 설립되던 시기에 강조되었 던 본래의 규율을 재건하려고 노력하였다. 랑세는 성격 이 강직한 반면, 지저분함과 추함이 수도자가 지녀야 할 가난의 일부라고 생각하여 정신적 · 육체적 엄격함을 요 구하였다. 또한 채식주의 식사를 방침으로 정하여, 베네 딕도(Benedictus, 480?~547?)의 규칙에 따라 환자는 고기 를 먹을 수 있으나 그 외의 수도자들이 고기를 먹는 것은 모든 타락의 표징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고기뿐만 아니 라 생선, 달걀, 치즈, 그리고 버터를 먹는 것도 금지하였 다. 이러한 엄격함-은둔, 침묵, 금식, 시간 전례와 공동 체 미사에 대한 열성, 그리고 노동-으로 라 트라프 수 도원은 '엄률' (Strict Observance)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 어 '엄률 수도회' (Order of Cistercians of the Strict Observance)가 되었으며, 수도원이 위치한 지명에 따라 '트라 피스트회' (Trappists)로 널리 알려졌다. 한편 초기의 엄격함으로 회귀하는 개혁에 반대하는 이 들은 변해 가는 상황에 대한 적응으로 고기를 먹는 것을 허용하였고, 엄률 수도회를 광신도들의 모임으로 간주하 였다. 이와 같은 차이로 인해 시토회는 2개의 수도회로 완전히 분리되었고, 초기에 양측은 극심한 갈등과 분열 을 겪었다. 또한 랑세가 시토회보다 덜 엄격한 수도회들 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로 인해 극도로 엄격한 규율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나, 1660년에는 이 개혁 정신에 따라 생 활하는 수도원이 70여 개로 증가하였다. 〔개 혁〕 양측 간의 갈등이 계속되자 1664년 교황 알렉 산데르 7세(1655~1667)는 양측 대표를 로마로 초대하여 추기경직을 수여하였다. 교황은 2년 뒤에 교서 <인 수프 레마>(In suprema)에서 2개의 시토회-시토회와 트라피 스트회-를 모두 인정한다고 선언하였으며, 두 수도회 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시토회는 1주일에 세 번 고기를 먹는다는 것(사순 시기와 대림 시기 제외)과 트라피스트회 는 전혀 먹지 않는다는 것을 꼽았다. 트라피스트회 대표 로 로마 회의에 참석하였던 랑세 아빠스는 라 트라프로 돌아온 뒤 초기 시토회보다 더 엄격한 규율 체계를 만들 었으며 이와 같은 엄격함으로 인해 라 트라프 수도원에 입회를 희망하는 지원자들이 증가하였다. 보다 엄중해진 이 규율은 1678년 교황 인노첸시오 11세(1676~1689)의 허가를 받았다. 라 트라프 수도원의 규율에 의하면, 수사 들은 새벽 2시에 자리-밀짚 침낭과 밀짚 베개 및 그 위 의 깔개로 구성된-에서 일어나 하루에 11시간 동안 기 도와 미사에 전념한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들이나 수 도원 안에서 말없이 노동하며, 회개와 죽음에 대한 집중 적인 묵상이 요구되기 때문에 모든 문학 활동은 금지된 다. 인사말을 제외하고는 절대적인 침묵이 요구되며, 식 사는 채소, 과일, 빵과 물로 한정된다. 랑세의 사상은 《수도 생활의 성덕과 임무들에 대하여》(De la sainteté et des devoirs de la vie monastique, Paris, 1683)라는 저서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 책으로 인한 논쟁은 18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다. 트라피스트회는 1705년 피렌체 근방 등 다른 지역에 도 설립되면서 크게 번성하였으나, 프랑스 대혁명 (1787~1799)의 여파로 1791년 수도회가 프랑스에서 추 방되자 수련장이었던 오귀스탱(Dom Augustin de Lestrange, 1754~1827)은 22명의 수도자들을 이끌고 스위스 로 갔다. 1791년 6월 1일 그는 프리부르(Fibourg) 주의 발생트(La Val-Sainte)에 수도원을 설립하였고, 라 트라 프에서보다 더욱 엄격하게 수도회를 이끌었다. 수도자들 은 난방 시설도 없이 바닥에서 잠을 자고 그 외 시간은 모두 노동과 기도, 묵상으로 보냈으며, 오직 빵과 삶은 채소, 물만을 먹으며 생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금욕적인 생활은 많은 이들에게 사명감을 불러일으켰고, 오귀스탱은 몇몇 수도자들을 스페인, 벨기에, 영국, 이탈 리아로 파견하였다. 1794년 교황 비오 6세(1775~1799) 는 발생트를 대수도원으로 인정하고, 트라피스트 수도회 (the Congregation ofTrappists)로 명명하였다. 2년 뒤 오귀 스탱은 생브랑시에(Saint-Branchier)에 트라피스트회의 첫 번째 수도원을, 바발레(Bas-Valas)의 상브랑세(Sembrancher)에 첫 번째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1798년 나폴레옹이 스위스를 침공하였을 때 오귀스 탱은 244명의 수도자들을 이끌고 독일, 바이에른과 오 스트리아를 거쳐 러시아와 폴란드로 갔으나, 18개월 뒤 러시아에서 추방된 후 다시 독일로 돌아가 함부르크(Hamburg)에서 겨울을 보냈다. 다음해 몇몇 수도자들이 다르펠트(Darfeld), 베스트팔렌(Westfalen)에 정착하였 고, 1795년 설립된 웨스말(Westmalle) 등 벨기에의 수도 원들이 다시 문을 열었다. 1802년 오귀스탱은 발생트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미국으로 대표를 파견하였다. 그러 나 오귀스탱과 다르펠트의 수도원장인 외젠(Eugène de Laparade) 사이의 반목이 깊어지자, 교황청은 오귀스탱 의 관할 내에서 다르펠트의 독립성을 인정하였고, 다르 펠트 수도원이 발생트의 규칙이 아닌 랑세의 규칙을 따르는 것을 허가하였다. 〔재통합) 1815년 나폴레옹의 폐위 후 수도자들이 다 시 프랑스로 돌아온 뒤에 19세기의 트라피스트회는 점 차 분열되었다. 몇몇 수도원은 지속적으로 오귀스탱의 규칙을 따랐고, 몇몇 수도원은 오귀스탱의 규칙이 지나 치게 엄격하다고 판단하여 랑세의 규칙을 따랐다. 그리 고 다른 몇몇 수도원은 규칙을 수도회가 있는 주(州)에 맞게 수정하고 사목적 임무만을 충실히 수행하기도 하였 다. 다르펠트 수도원의 입장에 동조하는 이들은 세풍 (Sept-Fons) 본부를 만들어 랑세의 규칙(Rancean Regime) 하에 분원들을 통합하였고, 오귀스탱은 라 트라프에 자 리를 잡고 발생트의 규칙들을 준수하였다. 1827년 오귀 스탱이 사망할 당시 라 트라프의 수사들은 700명에 달 하였으며, 특히 네덜란드 왕의 영향을 받던 웨스말 수도 원은 오귀스탱을 영적 아버지로 생각하면서 규칙을 수정 한 후 몇몇 사목적인 임무를 수행하였고 스스로를 트라 피스트회라고 칭하였다. 1829년 프랑스의 왕 샤를 10세(1824~1830)는 라 트 라프 수도원을 따르는 모든 수도원들을 폐쇄하라는 칙령 을 내렸으나, 이듬해의 7월 혁명까지 프랑스에는 9개의 수도원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1834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는 이 수도원들을 결합하여 랑세의 규 칙을 따르는 하나의 수도회로 통합하고, '트라피스트의 성모 시토회' (Congregation of the Cistercian Monks of Notre-Dame de La Trappe)로 명명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각 수도원이 각자의 관습에 따르는 것을 허용하였기 때 문에, 이것이 수도회의 완전한 통합을 가져오지는 못하 였다. 이에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프랑스 내 수도 원을 랑세의 규칙을 따르는 '트라피스트 성모 고대 개혁 회' (The Ancient Reform of Our Lady ofLa Trappe) 수도원 과 시토회의 초기 규칙을 따르는 '트라피스트 성모 개혁 회' (The New Reform of Our Lady of La Trappe) 수도원으 로 분리하였다. 이 같은 분리 이후에 두 수도원 모두에서 개혁이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몇 년 만에 랑세의 규칙들 은 14개 수도원에서 준수되고, 시토회 규칙들은 20개 수도원에서 준수되었다. 벨기에 내에서도 웨스말 수도원 이외에 5개의 수도원이 추가로 설립되었다. 그 결과 19 세기 중반까지 라 트라프, 세풍, 웨스말 등의 입장을 따 르는 세 부류의 수도원으로 분열된 채 남아 있었고, 1878년 분열된 수도회를 통합하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거부되었다. 그러다 10년 뒤 교황 레오 13세(1878~ 1903)에 의해 '트라피스트의 성모 개혁 시토회' (The Reformed Cistercians of Our Lady ofLaTrappe)라는 명칭으로 재결합되었고, 세풍의 아빠스인 비야르(Dom S. Wyart)가 첫 번째 총아빠스로 선출되었다. 6년 뒤 명칭에서 라 트 라프는 빠지게 되었고, 1902년 교황 레오 13세는 공식 적으로 '개혁 시토회' (The Order Reformed Cistercians) 즉 '엄률 시토회' (Cistercians of Strict Observance)로 재명명 하였으며, 시토의 수도원을 모(母) 수도원으로 공포하 였다. 이후 트라피스트회는 보스니아, 소아시아, 팔레스티나, 중국, 알제리, 콩고, 동아프리카의 독일령, 아일랜 드, 영국, 캐나다 및 브라질 등에 설립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에 트라피스트회의 활동 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이후 수도회는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일본으로 퍼져 나 갔으며, 1947년 트라피스트회의 수도자는 64개의 수도 원에 약 4,000명 가량에 달하였다. 이어 1950년대에는 열두 곳에 수도원이 설립되고, 수도자의 수는 4,500명으 로 증가하였다. 1944~1956년 사이에 미국에서는 9개 의 수도원이 설립되고 수도자의 수가 300명에서 1,000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1960년대에는 특히 아프리카 지 역에 새롭게 진출하였다. 1971년 세계 각지의 트라피스 트회 수도원은 총 84개, 회원수는 3,415명이었다. 트라피스트회는 네 차례(1967, 1969, 1971, 1974)에 걸 쳐 총회를 열어 수도 생활 전체에 대하여 재검토하였고, 그 결과 <일치와 다양성에 관한 규정>, <시토회 생활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였다. 또한 전례를 쇄신하고 보조 수도자 제도를 폐지하였으며, 회헌을 개정하여 1990년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다. 〔영성과 생활〕 트라피스트회 회원들은 기도와 독서 그 리고 노동의 조화를 통한 균형 잡힌 수도 생활을 지향한 다. 또한 일반인들이 제공하는 헌금이나 기부금에 의존 하기보다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생활하려고 노력함으로 써, 외부적인 영향을 제거하고 속세에서 벗어나 본연의 수도 생활을 회복하고자 노력한다. 회원들은 관상과 속 죄 생활을 위주로 하고, 기도와 노동을 통하여 하느님과 일치하려고 노력하며, 완덕에 도달함으로써 인류의 구원 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려 한다. 새벽 일찍 일어나 시간 전례를 바치고 미사를 봉헌하며, 낮에는 노동과 거룩한 독서와 신학 연구에 몰두한다. 육류와 어류를 먹지 않고, 독방 생활을 배척하면서 함께 공동 생활을 한다. 수도원의 성당과 건물은 단순하게 지어 빛과 어둠의 조화와 공간의 균형미를 추구하며, 침묵과 고요를 부각 시키면서 수도원의 사막적 성격을 유지하여 공동체 생활 이 번잡하거나 소란스러워지지 않고 내적 고요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있다. 〔한국 진출과 폐원〕 남자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한국 진출은 서울대교구 소속 오무수(吳武洙, 라우렌시오) 신 부가 1984년 11월 30일 미국 제네시 트라피스트 수도 회에 정식으로 입회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수련을 마 치고 한국 진출을 위하여 돌아와, 제네시 트라피스트 수 도회의 도움을 받아 경기도 법원리에 수도원 부지를 매 입하여 1987년 9월 미국 수사 1명, 한국 형제 3명과 함 께 공동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 이 수도회는 정식으로 트라피스트회 소속 수도회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서울대 교구 소속 창설 수도회로서 '한국 시토회' 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는데, 교구 소속 수도회로 성장한 후에 정식으 로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가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설 립 초기에는 원활하게 발전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 라 이 수도회는 많은 난관과 고난, 몰이해와 배척을 겪어 야만 하였다. 트라피스트회는 쉽게 들어왔다가 인내하지 못하고 잘 나가는 드문 성소이고,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이 걸리는 인내의 성소라는 것을 이해받지 못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교구와의 관계도 불편하게 되었 다. 결국 2001년 이 수도회는 14년간의 법원리에서의 수도 생활을 청산하고, 수도원 부지와 건물을 서울대교 구에 매도한 후 서울대교구에서 철수하였으며, 현재 새 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수도 생활을 하기 위해서 터를 찾고 있다. 반면 1987년 10월 19일 한국에 진출한 여자 트라피 스트 수도회는 경남 마산시 구산면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여자 수도원' 이라 명명하였다. '엄률 시토회' 라고도 불리는 이 수녀원에서는 2003년 12월 현재 종신 서원자 17(한국인 15, 외국인 2), 유기 서 원자 4, 수련자 1명이 수도 생활에 전념하고 있다. (⇦ 랑세 ; 한국 시토회 ; → 로베르토, 몰렘의 ; 마비용, 장 ; 머튼, 토마스 ; 베네덕도회 ; 선교회 ; 시토회) ※ 참고문헌 D.N. Bell, Encyclopedia of Monasticism, vol. 2, W.M. Johnston ed., Fitzroy Dearborn Publishers, Chicago · London, 2000, pp. 1298~1300/ M.R. Flanagan, 《NCE》 14, pp. 261~264/ M.R. Flanagan · M.B. Pennington, 《NCE》 14, 2003, pp. 160~ 162. 〔편찬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