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엔트 공의회 - 公議會
〔라〕Concilium Tridentinum · 〔영〕Council of Trent · 〔독〕 Konzil van Trient
글자 크기
11권

1 / 2
트리엔트 공의회 개최에 큰 영향을 미친 카를 5세(왼쪽)와 프랑수아 1세.
현재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트렌티노알토아디제(Trentino-Alto Adige)의 주도(州都)인 트렌토(Trento)에서 1545년 12월 13일부터 1563년 12월 4일까지 18년 동 안 25차례에 걸쳐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대응하여 가톨릭 교리를 명료하게 정의하고 교회 쇄신을 위한 규 율을 제정함으로써 교회 개혁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수 용, 실현한 제19차 공의회. I. 교회 개혁의 시도와 노력 〔교황청의 개혁 시도〕 15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회는 머리에서부터 지체에 이르기까지 개혁되어야 한다" (Ecclesia reformanda in capite et membris)라는 외침이 드높 아졌고, 특히 머리인 교황청의 쇄신을 위한 공의회 소집 요구가 강해졌다. 이때의 여론은 교황을 포함한 교황청 의 개혁이 이루어지면 지체(신앙 공동체)의 개혁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콘스탄츠 공의회 (1414~1418)는 교황(청)의 중앙 집권적인 행정 및 재정 체제와 같은 악폐를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 교황 개혁 교 령인 <프레구엔스>(Frequens, 1417)를 발표하였고, 교황 청에 관한 18개항의 개혁안(1417)이 작성되었다. 1417 년 11월 11일에 교황으로 선출된 마르티노 5세(1417~ 1431)는 교황 개혁에 관한 일곱 가지 법령을 공포하였으 며(1418), 이어 교황의 지시를 받은 3명의 추기경들이 공의회에서 다룰 개혁 권고서(Advisamenta)를 작성하여 1430년 추기경 위원회에서 보완 · 완성하였으나 제안에 그쳤다. 교황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실제로 개 혁서는 바젤 공의회(1431~1437)에서도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만일 마르티노 5세의 서거 후 교황 물망에 오른 카프라니카(Domenico Capranica, 1400~1458) 추기경이 교 황에 선출되었다면 바젤 공의회에서 개혁이 실천되었을 것이다. 그는 교황이 교회의 으뜸으로 교회 개혁의 책임 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고 교황 니콜라오 5세(1447~1455) 시기에 <교황과 교황청에 관한 개혁 권고서>(Advisamenta super reformatione papae et romae)를 작성하였기 때 문이다. 이는 완벽한 가톨릭 개혁안으로, 트리엔트 공의 회 이후 개혁 교황들에 의해 구현되었다. 르네상스 교황들도 칙서와 공의회 교령을 통해 개혁을 시도하였다. 교황 비오 2세(1458~1464)는 포괄적인 교황 개혁 칙서 <영원한 목자>(Pastor aeternus)를 작성하였으 나 결실을 거두지는 못하였고, 교황 식스토 4세(1471~ 1484) 시대에도 교황청에 관한 구체적 개혁안이 작성되 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1497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가 구성한 추기경 위원회의에서는 개혁 안들이 가득 담겨 있는 칙서를 작성하였으나 <알렉산데 르 교황령>(Constituition Alexandrinae)이라는 명칭의 수집 본으로 남았을 뿐이다.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는 다가올 공의회에 대비한 개혁안을 준비하여 1512년 3월 30일에 칙서 형식으로 발표하였고, 5월 10일에는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1517)를 소집하였으나 그의 재임기 의 총회(제1~5차)에서는 개혁을 다루지 못하였다. 카말 돌리회의 주스티니아니(Tommaso Giustiniani, 1476~1528) 와 퀴리니(Vincenzo Quirini, 1479~1514)는 교황 레오 10 세(1513~1521)가 선출된 직후, 공의회를 염두에 두고 교 회의 폐해를 열거하면서 개혁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레오 10세 상서(上書)〉(Libelus ad Leonem X)를 저술하 여 바쳤다. 1513년 4월 25일에 교황은 개혁 위원회를 구성하였고, 5월 27일에 공의회를 속개하여 제9차 총회 (1514. 5. 5)에서는 추기경단을 포함한 교황청의 개혁 칙 서가 발표되었으나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다. 제5차 라테 란 공의회는 교회 분열 이전에 개혁을 시도하던 마지막 공의회로, 당시 제출된 개혁안들이 결실을 거두었다면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수도자의 개혁안은 결국 트리엔트 공의회와 공의회 이후 교황들의 개혁을 통해 실천에 옮겨졌다. 이처럼 개혁에 관한 교황 칙서들과 공의회 교령들은 시도에 그쳤을 뿐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그것은 '교황청 대분규 라고 불리는 '서구 대이교 (1378~1417) 로, 개혁을 주도해야 할 교황들이 대립되어 있어 교회 개 혁의 중심 세력이 형성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어지는 콘스탄츠 공의회와 바젤 공의회에서처럼 공의회 우위설의 영향으로 교회 개혁 주도의 책임을 진 교황권 이 무력해진 상태였다. 교황령의 탄생 이후 교황들은 보 편 교회의 영적 지도자이자 교황령의 세속 군주라는 두 가지 위상을 지니면서 교회 문제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세속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들은 서구 그리스 도교 세계의 평화와 질서를 책임진 지도자이며 조정자로 서 오스만 투르크(0sman Turk) 이슬람 세력의 서구 침공 에 대응하여 십자군을 조직해야 하였고, 이탈리아 반도 에서는 외세의 침략과 도시 국가들의 정치적 분쟁에 개 입하여 중재를 해야 하였으며, 성직 서임권과 공의회 우 위설을 내세우는 세속 군주들과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공의회 우위설을 종식시켜야 하였다. 교황직이 영적 직 무보다는 세속적 군주직으로 간주되면서 귀족들의 탐욕 의 대상이 되어 성직 매매와 같은 부적절한 방법으로 교 황이 선출되자 교황청에는 개혁을 실현할 만한 영적 역 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신앙 공동체의 개혁 노력〕 교황들의 개혁 칙서와 공 의회의 개혁 교령들이 실천되지 못하고 있었지만, 트리 엔트 공의회 이전부터 경건한 신앙인들이 사도직 활동과 자선 그리고 그리스도인 자아 실현의 수단으로 신앙 부 흥에 노력함으로써 교회 내적 쇄신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자선 활동에 봉사하던 평 신도 친목 단체들이 신심 단체로 발전하였는데, 피렌체 (Firenze)의 '성 예로니모 신심회' (1442)와 볼로냐(Bologna)의 '성 도미니코 신심회' (1443)는 영성 생활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였다. 공의회 중 설립 된 비천차(Vicenza)의 '성 예로니모 신심회' (1494)와 제 노바(Genova)의 '하느님 사랑의 형제회' 도 자기 성화를 위해 겸손한 마음을 지니고 모든 생각과 희망을 하느님 께 두면서 병자 방문과 간호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 는 등의 활동에 헌신하면서 난치병 환자를 위한 병원을 설립하였고, 이어서 비슷한 의료 기관이 사보나(Savona), 볼로냐, 로마에 세워졌다. 이렇게 평신도들로 구 성된 형제회들 중 일부는 탁발 수도회의 지도를 받았고, 일부는 교구장 주교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형제회에서 성직자가 참여하는 '신애회' (神愛 會, Oratory of the Divine Love, 1497)가 탄생하였다. 회원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매일 미사에 참석하고 매달 고해성 사를 보고, 영성체를 하며 열심히 기도하면서 병자를 방 문하고 간호하였다. 그리고 매주 모여 함께 미사를 봉헌 하고 기도를 바치면서 교회 개혁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 하였다. 이러한 개혁 단체들의 자발적 신앙 부흥 운동은 가톨릭 교회 쇄신의 원동력이 된 '트리엔트 영성' 의 기 반이 되어 트리엔트 개혁이라는 결실을 맺게 함으로써 교회의 쇄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개인 성화와 사도직에 헌신하는 '수행 성직자 수도회' (Ordo Clericorum Regularium), 정결 · 순명 · 가난의 서약을 한 '신애회' 의 회원 2명이 금욕 생활을 하며 성직록을 포기하고 가난하고 병 든 사람들을 돌보는 자선 활동에 헌신하려고 로마에서 설립한 '테아티노회' (Ordo Theatinorum, 1524), 바오로 사 도를 본받고 대중 설교를 통해 평신도의 개인 성화와 대 중 선교 사도직에 봉사한 '바르나바회' (Barnabtes)라고 도 불린 '성 바오로 수행 성직자 수도회' (1530),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돌보며 어린이 교리 교육에 봉사하던 모 임에서 시작되어 고유한 활동들을 통해 트리엔트 개혁의 길을 마련하는 교회 쇄신 운동을 전개한 '소마스키 수행 성직자 수도회' (1534) 등이 모두 '신애회' 에 그 뿌리를 둔 단체들이다. 이울러 도미니코회와 아우구스티노 은수 자회는 엄격한 원시 수도 회칙으로 돌아가 모든 개인의 소유권 폐지, 공동 생활의 회복, 수련자에 대한 세심한 교육, 신학 연구와 같은 목적을 수행함으로써 수도회 개 혁을 이루었다. 특히 프란스코회는 '꼰벤뚜알' (Conventuales)과 '원시 수도 회칙 준수파' (0bservantes)로 나누 어졌고 이어서 1525년에 '원시 수도 회칙 준수파' 에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 (Order of Friars Minor Capuchin)가 설립되어 엄격한 수도 생활과 함께 고해 신부, 설교가, 선교사 등의 사목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개혁 탁발 수도 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 구현에 공헌하였다. 지역 교회에서도 교회 개혁의 움직임이 있었다. 많은 주교들이 교구 순시와 교회 회의를 통해서, 말과 글을 통 해, 개인적 표양을 통해 교구 개혁에 최선을 다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파도바(Padova)의 주교 바로치(Pietro Barozzi, 1487~1507)와 베로나(Verona)의 주교 지베르티 (Giovanni Matteo Giberti, 1495~1543)가 사목자로서 교구 민의 구령(救靈)과 성직자의 생활 쇄신, 신자 교육에 헌 신하면서 설교와 교구 회의의 법규를 통해 교구를 개혁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로데즈(Rodez)의 주교 데스트랭 (François d'Estraing, 1504~1529)이 교구민 교육 및 성직자 교육에 유의하며 참사회 개혁과 교구 순시를 실현하였 다. 그 외에도 많은 주교들이 성직자의 올바른 성사 집전 과 설교 직무 수행을 강조하였다. 영국 노위치(Norwich) 교구에서는 1492~1514년에 걸쳐 성직자들이 영적 직 무를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본당과 수도원의 질서가 잡 혔고 본당이 신자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독일(신성 로마 제국)에서 개혁 주교들은 교회 제후(주교)들의 영적 직무 태만과 속화를 비난하였다. 콘스탄츠의 주교 헤벤(Heinrich von Hewen, 1436~1462)은 교구의 머리에서부터 지체 에 이르는 개혁을 교구 행정의 유일한 목표로 삼았다. 이 처럼 많은 주교들이 신품성사 수직자에 대한 엄격한 심 사, 하느님 말씀의 설교 임무, 전례서의 개정, 교구 회의 의 개최와 같은 직무를 수행하면서 교구 개혁에 헌신하 였다. 스페인에서는 세비야(Sevilla) 전국 교회 회의 (1478)를 통해 왕실과 주교단이 교회 개혁에 함께 힘을 모으는 데 합의함으로써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다. 톨레 도(Toledo)의 대주교 히메네스(Francisco Ximenez de Cisneros, 1436~1517)는 국왕과 협력하여 수도회의 개혁을 추진하며 사목 순시, 전례서와 신심서 간행, 교구 회의를 통해 교회 생활 개혁에 공헌하였다. Ⅱ. 준비와 소집 〔개혁 공의회의 준비〕 보름스(Worms) 제국 의회 (1521. 1. 27~5. 25)에서 루터(M. Luther, 1483~1546) 문제 와 교회 분열을 해결하는 최선의 도구는 공의회라는 주 장이 힘을 얻었다. 교황 레오 10세의 사절인 알레안드로 (Girolamo Aleandro, 1480~1542) 추기경은 앞으로 소집될 공의회가 반(反)교황 성향의 교회 회의가 될 것을 우려 하였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1519~1556) 는 교황의 권고를 받아들여 공의회를 교회 분열의 해결 과 연계하려는 시도를 차단하였다. 뉘른베르크(Nürnberg) 제국 의회(1522~1523)에서 교황 하드리아노 6세 (1522~1523)는 사절인 치에레가티(Francesco Chieregatti, 1478~1539) 추기경을 통해 개혁을 약속하였음에도 불구 하고, 의원들은 교황이 황제의 동의 아래 가능한 한 1년 이내에 스트라스부르크, 마인츠, 쾰른, 메츠 등 독일 국 경 도시에서 '자유로운 그리스도인 공의회' (frei christlich concilium)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였다. 1524년에 소집된 제2차 뉘른베르크 제국 의회에서는 '자유로운 그리스도 인 공의회' 의 대안으로 바이에른(Bayem)의 가톨릭 의원 들이 독일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주교단, 대학, 제후 들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독일 국가 교회 회의' (ain sinodum teutscher nacion)를 제시하였다. 따라서 이 해 4 월 5일에 의원들은 교황 글레멘스 7세(1523~1534)의 사 절인 캄페조(Lorenzo Campeggio, 1472~1539) 추기경에게 '전체 또는 국가 공의회' (ein gemain oder nacional concilium)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교황 사절은 평신 도에게는 교리 논의가 허용되지 않으며 국가적 배교의 돌발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 아래, 독일 국가 교회 회의의 소집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4월 11일에 의 원들은 슈파이어(Speyer)에서 11월 11일에 독일의 '국 가 총회' (Assemblee nacional)를 소집할 것이라고 발표하 였다. 이러한 계획에 대해 황제는 교황의 요청을 받아들 여 7월 25일에 모든 공의회의 개최를-전체 공의회이든 국가 공의회든-금지하였으며, 이로 인해 황제는 빠른 시일 안에 세계 공의회를 소집해야 할 임무를 지니게 되 었다. 따라서 황제는 교황에게 가능하면 여름에 공의회 소집을 선언하고 1525년 봄에 날짜를 확정하도록 촉구 하였다. 교황 글레멘스 7세는 공의회 반대를 공언하지 않았지만, 지연 정책으로 공의회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려고 노 력하였다. 그가 공의회 소집을 지연시킨 동기는 교회 및 정치 영역에서 발견된다. 첫째로 교황은 공의회가 내포 하고 있을 위험들을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공격적 공의회 우위설이 판치던 콘스탄츠 공의회와 바젤 공의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따라서 선불리 공 의회를 소집하였다가 1460년에 단죄된 공의회 우위설이 되살아나 교황권을 무력화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였다. 그의 마음 속에는 개혁 공의회의 소집 요구가 교황권 에 도전하는 외침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래서 공의회 소 집을 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공의회 우위설 의 위험은 슈파이어에서 시도하려던 '독일 영토 안의 자 유로운 그리스도인 공의회' 에서 발견되었다. 이 공의회 는 교황과 황제가 소집하여 주교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도 참석하여, 교황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발언 권과 표결권을 행사하는 교회 회의로 이해되었다. 둘째 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1515~1547)는 공의회를 그 리스도교 세계의 대표 모임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카를 5 세가 정치적 · 종교적 반대자를 패배시키기 위해 행사하 는 개인적인 세력 확대의 도구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자 국의 세력 확장과 왕권 강화를 추구하던 프랑수아 1세는 공의회의 가장 큰 반대 세력이 되었으며, 공의회를 통해 개혁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를 좌절시키려고 하였 다. 이를 위해 가톨릭 군주로서 프로테스탄트 또는 이슬 람과 군사 동맹을 맺으면서까지 카를 5세에게 도전하였 다. 이처럼 프랑스의 발루아(Valois) 왕가와 신성 로마 제국 그리고 스페인의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의 서 구 주도권 경쟁에 따른 대립이 공의회 소집에 대한 중요 한 정치적 장애가 되었다. 아울러 교황 글레멘스 7세의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지대한 관심은 안전한 교황령의 확보에 쏠려 있었다. 그런 데 이탈리아 전쟁(1521~1529) 중인 1525년 2월 24일에 프랑스 군대가 '파비아(Pavia) 전투' 에서 카를 5세의 군 대에 패전함으로써 이탈리아의 밀라노와 나폴리가 황제 의 지배를 받게 되자 교황령은 남북으로 포위되었다. 1526년 5월 22일에 교황령의 안보에 위협을 느낀 교황 의 주도로 교황령, 프랑스, 밀라노, 피렌체는 '코냐크 (Cognac) 동맹' 을 체결하고 실지(失地) 수복 전쟁에 착 수하였다. 그러나 1527년 5월 6일 황제군의 '로마 점 령' (Sacco di Roma)으로 로마 시는 점령군의 파괴, 약탈, 살인으로 수 주 동안 공포 분위기가 지속되었고, 교황 또 한 산 안젤로 성(城)으로 피신하였다가 6월 5일에 항복 하였다. 교황은 6개월 동안 감금 생활을 한 다음 12월 6 일 또는 7일 밤에 로마를 떠나 오르비에토(Orvieto)로 옮 겼다가(1527. 12. 7~1528. 5. 31), 1528년 6월 1일에는 다 시 비테르보(Viterbo)로 거처를 옮기는 등 고생을 하다가 1528년 10월 6일 로마로 돌아왔다. 1529년 6월 29일에 교황 사절 시키오(Girolamo da Sichio)가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카를 5세와 '바르셀로나 평화 조약' 을 체결 함으로써 교황과 황제는 화해하였으며, 교황은 카를 5세 의 황제 대관을 위해 볼로냐에 머물고 있는 동안(1529. 10. 24~1530. 3. 31)인 1530년 1월 6일에 황제와 '볼로냐 조약' 을 맺었다. 그리고 그해 7월 31일에 교황은 황제가 독일 상황에 비추어 공의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공의 회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독일 프 로테스탄트인들이 주창하는 공의회의 위험을 의식하던 교황은 공의회에 대한 두려움으로 공의회 소집을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공의회의 소집〕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에 이르 자 공의회 소집과 교회의 개혁에 대한 전망이 밝아졌다. 교황은 1534년 11월 20일에 추기경 개혁위원회를 구성 하였고, 1535년 1월 15일에 공의회 소집에 대한 확고한 결심과 만토바(Mantova)를 공의회 장소로 선정하였음을 알리기 위해 스페인을 포함한 독일, 프랑스, 스페인의 세 왕실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1536년 6월 2일에는 칙서 <앗 도미니치 그레지스 쿠람>(Ad dominici gregis curam) 을 통해서 1537년 5월 23일 만토바에서 개최된 공의회 의 목적을 오류와 이설의 박멸, 교회 개혁, 그리스도교 세계의 평화 회복, 십자군 원정으로 정했음을 밝혔다. 이 어서 개혁 의지를 지닌 추기경들로 구성된 '개혁 문제 연구 위원회' 가 조직되어 1537년 2월 말에 <교회 개혁 권고서>(Consilium de emendanda Ecclesia)를 교황에게 제 출하였다. 그러나 교황 사절들이 만토바 공의회 소집을 공고하는 과정에서 장애가 발생하였다. 먼저 1536년 11 월 1일에 카를 5세의 동생이며 황제 계승자인 페르디난 트 1세(1558~1564)는 공의회 소집에 동의하였으나 그 개 최 장소로 트리엔트를 선호하였다. 1537년 2월 15일 카 를 5세는 공의회 참석 결정을 확고하게 내리고 제후들에 게 공의회 소집을 받아들여 대표단을 파견하도록 강권하였으나 2월 28일에 '슈말칼덴 동맹' (Schmalkaldischer Bund)은 '독일 안의 자유로운 그리스도인 공의회' 를 내 세우면서 교황의 만토바 공의회를 거부하였다. 아울러 프랑수아 1세가 신변의 안전을 이유로 국왕과 주교들의 공의회 참석을 거부하고 있음을 알리는 프랑스 파견 교황 대사의 두 차례(7월 3일, 9월 5일)의 보고가 있었다. 더 욱이 만투아의 공작이 막대한 공의회 경비대 비용을 요 구한다는 이유로 1537년 4월 18일에 추기경회의는 공 의회 소집을 11월 1일로 연기하였다. 8월 29일에 교황 은 베네치아(Venezia) 공화국 총독에게 공의회를 개최할 장소를 요구하였고 9월 25일에 베네치아 시의회는 공의 회 장소를 '베네치아의 정원' 이라고 불리던 도시 비천차 (Vicenza)로 결정하였다. 1538년 3월 20일에 교황은 공 의회 파견 교황 전권 대사로 캄페지오 추기경, 알레안드 로 추기경, 시모네타 추기경(Giacomo Simonetta, 1475~ 1539)을 임명하여 의장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비천차 공의회는 프랑수아 1세의 반대와 카를 5세의 비협조로 소집일(1538년 5월 1일, 1539년 4월 6일)이 두 차례나 연 기되다가 1539년 5월 21일 바오로 3세는 '공의회의 연 기 가 아니라 '공의회의 중단' (Supensio ad beneplacitum) 을 선언하였다.
한편 카를 5세는 1539~1542년에 교회의 재일치를 위한 수단으로 공의회보다는 신학 토론회를 선호하였고, 교황청도 이를 받아들여 가톨릭 신학자들을 파견하였다. 1539년 1월에 라이프치히(Leipzig) 종교 회담에서 가톨 릭과 프로테스탄트 대표가 라이프치히 합의서(Antwort und Repulsion) 초안을 작성하여 독일과 황실 그리고 교 황청에 보냈다. 1539년 2월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 서 시작된 가톨릭과 슈말칼덴 동맹의 회담은 4월 19일 에 보고서(Der Frankfurter Anstand)가 제출되었으나, 6월 2일에 슈파이어에서 열려던 종교 회담은 전염병의 발생 으로 하게나우(Hagenau)로 옮겼음에도 주요 협상 대표 들이 불참함으로써 협상 방법에 대한 토론 이외의 진전 이 없었다. 1540년 11월 25일에 보름스 회담은 절차 문 제를 협의한 다음 1541년 1월 14일에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Confessio Augustana)을 기초 자료로 삼아 대 화(Colloquium)를 시작, 1월 18일에 원죄에 관한 신조 가 제출되었으나 황제의 명령으로 레겐스부르크로 이동하였다. 4월 4일에 시작된 레겐스부르크 종교 회담은 라 이프치히 합의서를 바탕으로 23개항으로 작성된 <레겐 스부르크서〉(Regensburger Buches)의 내용을 갖고 토론하 여 5월 22일에 최종 문서로 제출하였으나, 5월 31일에 프로테스탄트 측에서 합의되지 않은 쟁점에 대한 견해를 담은 문서를 내놓음으로써 회담은 실패하였다. 6월 15 일에 콘타리니(Gasparo Contarini, 1483~1542) 추기경은 레겐스부르크 종교 회담이 결렬된 후, 카를 5세에게 교 황이 곧 공의회를 소집할 것이라고 통보하였고, 황제는 의원들이 공의회를 요구할 때까지 기다릴 것을 요구하면 서 공의회에 관련된 문제를 교황에게 넘기고 6월 29일 에 떠났다. 1541년 카를 5세는 루카(Lucca) 회담(9. 12~18)에서 교황 바오로 3세에게 공의회의 장소로 트리엔트를 추천 하였으나 교황은 여전히 만토바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1542년 3월 6일 모로네(Giovanni Morone, 1509~1580) 추 기경에게 독일의 동향을 보고받은 교황은 트리엔트를 공 의회 장소로 확정하였다. 그러나 5월 17일에 프랑수아 1세가 카를 5세에게 유리한 공의회는 받아들일 수 없으 며 국가 대표단과 주교들을 보내지 않겠다고 통보하였다. 5월 22일에 교황은 칙서 <이니시오 노스트리 후유스 폰티피카투스>(Initio nostri huius pontificatus)를 통해서 11 월 1일의 트리엔트 공의회 소집을 공고하였으나, 7월 10일에 프랑수아 1세는 오스만 투르크와 군사 동맹을 맺고 황제에게 전쟁을 선언하였다. 교황은 정치적 중립 을 지키면서 전쟁 억제와 평화 회복에 노력하였지만 8월 25일에 카를 5세는 교황에게 중립을 포기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10월 16일 교황은 모로네 추기경, 파리시오 (Pierpaolo Parisio) 추기경, 폴(Reginald Pole, 1500~1558) 추기경을 공의회 파견 전권 대사로 임명하여 의장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11월 21일에 의장단이 트리엔트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에는 인접 지역의 이탈리아 주교들만 도착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국왕의 명령으로 교황 칙 서가 공표되지 않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황제의 명 령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스위스 연방 회의는 불참을 통 보하였다. 공의회의 개회는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1543년 부세토 회합(6. 21~25)에서 교황 바오로 3세는 황제의 중립 포기 요구를 거절하였고, 카를 5세는 교황 의 프랑스와의 협상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긴장이 심화되 었다. 이어서 1543년 7월 2일에 황제는 트리엔트에서 모로네 추기경의 공의회 소집 협조를 거부하고 교황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7월 6일에 교황은 트리엔트에서 대기 하고 있는 주교들의 의견을 들은 후 9월 29일에 공의회 중단을 알리는 칙서 〈엣시 궁티스>(Etsi cunctis)를 공포하 여 교황의 공의회 사절들을 로마로 불러들이고 주교들의 귀향을 허가하였다. 1544년 2월 20일에 카를 5세는 슈파이어 제국 의회 에서 제후들의 군원(軍援)을 얻어 여름에 프랑스 공격에 나서 파리까지 진군하였다. 이때 전쟁에 지친 프랑수아 1세가 화해를 제의하자 병참의 어려움과 군 기강의 해이 로 난처해진 황제도 협상을 받아들였다. 도미니코회 수 사 신부인 구스만(Gabiel Guzman)의 중재로 9월 18일 '크레피(Crépy) 평화 조약' 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의 비 밀 조항에 따라 프랑수아 1세는 황제가 정한 날에 트리 엔트에서 소집될 공의회에 동의하고 주교들과 신학자들을 참석시키겠다고 약속하였다. 따라서 11월 14일에 교 황 바오로 3세는 추기경 회의에서 1545년 3월 25일에 트리엔트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하였다가, 3월 25일이 성주간에 들어 있어 3월 15일로 변경하여 칙서 <래타레 예루살렘>(Laetare Jerusalem)을 통해 공의회 소 집을 공고하였다. 이어서 교황은 공의회 파견 전권 대사 폴 추기경, 몬테(Giovanni Maria Ciocchi del Monte, 1487~ 1555) 추기경, 체르비니(Marcello Cervini, 1501~1555) 추 기경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의장단은 공의회 개회 3주일 전에야 구성되었으며, 3월 13일 3명의 공의회 사절들이 트리엔트에 도착하였을 때에도 공의회를 개회할 만큼 주 교들이 도착하지 않았다. 게다가 프로테스탄트 대표가 공의회 참석을 거부함으로써 6월 말에 교황은 황제의 요 구로 군사 동맹을 맺고 공의회를 연기하였다. 그러나 개 전(開戰)은 되지 않았고 국가 대표단과 주교단이 도착하 자 개회일을 12월 13일로 확정한 국무성 장관의 서신 (11. 6)이 11월 13일 트리엔트에 도착함으로써 공의회 개회가 가능해졌다. Ⅲ. 공의회의 진행
〔제1기(1545~1547)〕 제1차 회기 : 1545년 12월 11일에 개회를 정식 명령하는 교황의 소칙서(12.4)가 도 착하자 12월 13일에 공의회의 개회와 함께 제1차 회기가 시작되었다. 먼저 공의회의 진행 방식으로 의사 규정과 의제에 대한 논의와 결정이 있었다. 의사 규정에 있어서 세 분과(clases)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congregatio particularis)가 의제를 선정, 논의한 다음 신학자 회의(theologi minores)가 토의, 종합하여 총회(congregatio generalis)에 제출하면 토의(때로는 격렬한 논쟁)를 거친 후 투표에 부쳐 졌다. 여기서 승인되면 공개 회의(sessio)에서 다수결 원 칙에 따라 교령이나 법규를 채택, 공포하였다. 투표권을 행사하는 자는 추기경, 주교, 수도원장, 대학과 주교좌 참사 회의 대표로 한정하였다. 아울러 소수의 교부들이 모인 공의회라도 교황을 대리한 전권 사절이 합법적으로 소집하고 시작하여 주재하는 공의회는 전체 교회를 대표 한다는 정의가 내려졌다. 제2차 회기 : 이 회기의 개회식(1546. 1.7)에서 공의회 중 교부들의 신심 실천과 생활 자세에 대한 권고 교령이 발표되었다. 아울러 총회(1. 18, 22)에서 '교의의 재정립'과 '규율의 개혁' 에 관한 심의 우선 문제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카를 5세의 의향을 따르는 스 페인의 주교들(황제파)은 개혁 우선을 내세웠 고, 교황의 뜻을 따르는 의장단은 교의를 먼 저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총회(1.22)에서 캄페지오 추기경이 내놓은 병행 심의라는 절 충안이 승인되었다. 물론 1월 26일에 로마로 부터 교황의 병행 심의 반대와 함께 교의 우 선 심의 지시가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교의 교령과 개혁 교령이 공포되었다. 제3~4차 회기 : 개회일(1546. 2. 4)에 니체 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신앙 원리로 선언하 였다. 이어서 특별 위원회, 신학자 회의, 총회 는 성서와 성전〔傳承〕 그리고 성서의 정경을 토의하면서 성서에 관련된 폐해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총회(4. 10)는 성서와 성전에 관 한 교령 초안과 '불가타본' 에 관한 교령을 제 출하였다. 이 교령들은 특별 위원회의 승인(4. 6)과 총회의 승인(4. 7)을 받은 다음 제4차 회 기 공개 회의(1546. 4. 8)에서 <성서와 사도 전 승의 수용>과 <성서의 라틴어 불가타본의 수 용, 성서 해석법에 관한 규정>이 교령으로 공 포되었다. 첫째 교령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는 구원의 진리와 윤리 규범의 원천이며 이러 한 "진리와 규범이 ···전승들(성전, 사도 전승) 안에도 보존되어 있다" 라고 천명하면서 성서와 함께 전 승들도 같은 애정과 존경으로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아 울러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정경(正經)을 규정하였다. 둘째 교령은 "모든 라틴어 성서본들 중에서 ··· 고전 '불 가타본' 이 강의, 토론, 설교, 해설을하는 데에 공신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라고 언급하면서 고전 '불가타본' 의 성구(聖句)에 대한 왜곡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모독하 는 이는 처벌된다고 경고하였다. 이어서 성서 연구와 설 교에 대한 특별 위원회와 총회의 토의를 거쳐 이에 대한 교령을 총회가 심의하였고 주교의 임지 주재(residentia) 의무도 논의하였다. 한편 신학자 회의와 총회는 원죄 문 제를 토론한 다음 이에 대한 교령을 심의하였고, 총회(6. 16)는 성서 연구와 설교에 관한 교령과 원죄에 관한 교 령을 승인하였다. 제5차 회기 : 이 회기의 공개 회의(1546. 6. 17)에서는 <교육과 설교에 관한 교령>과 <원죄에 관한 교령> 이 공 포되었다. 첫째 교령은 개혁 문서로, 주교좌 성당에 성서 교사 양성 기관의 설치, 수도원장의 수도자 성서 교육, 주교와 신부의 주일 및 축일 강론, 수도원장의 수도회 내 설교가 엄선과 주교 승인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둘째 교령은 아담의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에 따른 성덕과 의 덕의 상실, 아담의 범죄(원죄)의 후손과의 연대성, 세례 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의 공로 부여, 세례성사의 은총을 통한 원죄의 사죄, 영세 후 사욕편정(邪慾偏情, Concupiscentia)의 잔존과 같은 내용을 언급하면서 성모 마리아 는 원죄의 물듦에서 제외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어 서 총회(6. 21)는 원죄와 연계하여 의화(義化)를 발제하 여 열띤 토론을 거쳐 1547년 1월 12일에 교령을 심의, 승인하였다.
제6차 회기 : 공개 회의(1547. 1. 13)에서 <주교와 하급 성직자의 임지 주재에 관한 교령>과 <의화에 관한 교령> 이 공포되었다. 임지 주재에 관한 교령은 성직자의 임지 주재 의무, 성직자와 수도자의 개혁, 주교의 순시 의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의화 교령은 인간의 의화를 다음 과 같이 설명하였다. 원죄의 결과로 인간의 본성과 율법 이 인간 의화에 무력하므로 인간은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 에 따른 은총)를 통하여 의화에 이른다. 죄인의 의화는 그 리스도를 통하여 은총의 지위와 하느님의 자녀로 옮겨가 는 것이며, 이러한 전이(轉移)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이 루어진다. 인간의 의화는 하느님의 은총이 선행되어야 하며, 하느님의 은총에 인간의 의지가 협력함으로써 인 간의 공로가 가능할 수 있다. 아울러 교령은 의화에 관한 법규를 첨부하였으며, 이어서 총회는 1547년 1월 7일부 터 의화에 연계하여 성사와 세례성사 및 견진성사를 토 의하고 3월 2일에 승인하였다. 제7차 회기 : 공개 회의(1547. 3. 3)에서 <성사에 관한 교령>이 공포되었다. 교령은 "의화에 관련된 구원의 교 리를 완성하기 위하여 교회의 성사들을 다루는 것이 합 리적이라고 판단되어" 공포하며 성사에 관련된 오류와 이단을 근절하기 위해 성사, 세례성사, 견진성사에 관한 법규를 제정한다고 밝혔다. 성사에 관한 법규는 칠성사, 성사의 사효성(ex opere operato), 성사의 인호(印號)를 반 대하고 '신앙 유일' , '만인 사제직' 을 주장하는 루터의 교설을 겨냥하였다. 세례성사에 관한 법규는 요한의 세 례와 그리스도의 세례의 동일함, 고해성사 이후의 재세 례, 구원에 필요한 세례의 거부와 같은 주장에 대한 가톨 릭의 답변 등이다. 견진성사에 관한 법규에서는 영세자 의 견진성사 불필요, 주교 이외의 집전, 성유 거부를 주 장하는 견해를 단죄하였다. 아울러 개혁 교령은 교회 직 무 임명 조건, 겸임 금지, 교회록의 검증과 통합, 사목 안정을 위한 주교의 교구 순시 의무, 사제 서품의 집전 자, 사제 수품의 기간과 허가, 주교의 병원 감독 의무와 같은 사항을 공포하였다. 이어서 총회(3. 7~9)는 성체성 사를 토의하던 중 트리엔트에서 발진 티푸스로 사망자가 증가하자, 3월 10일에 황제파 주교들의 반대에도 불구 하고 투표를 통해 공의회의 볼로냐 이전을 결정, 제8차 회기 공개 회의(1547. 3. 11)는 공의회 장소를 교황령에 있는 볼로냐로 이전한다는 교령을 공포하였다. 교령은 유행병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교부들의 철수에 따른 공의회의 해체 위험과 참석자의 감소에 따른 공의회 진 행의 장애 발생을 고려하여, 공의회가 안전하게 진행될 수 있는 볼로냐로 옮겨 4월 21일에 성사와 개혁에 관한 회기를 시작할 것이라고 공고하였다. 볼로냐로의 이전 : 볼로냐에서 열린 제9차 회기 공개 회의(1547.4.21)에서는, 많은 교부들이 성주간이기에 참 석하지 못하자 성사와 개혁에 관한 토의를 6월 2일로 연 기한다는 교령을 공포하였다. 한편 트리엔트의 제8차 회 기에서 논의되었던 성체성사에 관한 토의를 5월에 시작 하여 법규가 완성되었으나 제10차 회기의 공개 회의 (1547. 6. 2)에서는 이를 공포하지 않고 다시 공의회를 9 월 15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나 교령에 의해 교의와 개혁 에 관한 토론은 지속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신학자 회의 와 총회는 6~9월까지 고해성사, 종부(병자)성사, 혼인 성사에 관한 법규를 완성하고 연옥, 대사, 미사를 토의하 였다. 총회(1547. 9. 26~1548. 1. 30)는 6월 6일에 구성된 개혁 위원회와 교회 법학자 회의가 논의한 성사 집전의 폐해를 토의하였다. 1월 28일에 구성된 개혁 위원회는 미사, 대사, 신품성사를 논의하였고, 12월 10일에는 속 권의 폐해 목록을 작성하는 개혁 위원회와 아직 다루지 못한 폐해를 다루는 개혁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철저한 토의를 거쳐 작성된 개혁 교령들은 공포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나올 교령들에 크게 기여하였다. 아울러 공의회 에서는 사목 활동에 대한 관심이 증진되면서 관구 교회 회의와 교구 교회 회의, 교리 교육과 전례 등의 의제 선 정이 고려되었다. 한편 카를 5세는 1548년 1월 15일에 볼로냐에서, 그리고 1월 23일에는 로마에서 교황에게 볼로냐 이전을 정식으로 항의하고 트리엔트로의 공의회 복귀를 독촉하였다. 그동안 트리엔트에 있는 황제파 교 부들이 공의회 속개를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은 분열을 피하기 위해 2월 1일에 볼로냐에서의 토의를 중 단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1549년 9월 14일에 공의 회를 정지시킨 교황 바오로 3세가 11월 10일에 사망하 자 1550년 2월 8일에 공의회 의장인 몬테 추기경이 교 황 율리오 3세(1550~1555)로 선출되었다.
〔제2기(1551~1552)〕 교황 율리오 3세는 공의회의 공동 의장으로서 공의회를 볼로냐로 옮겼지만, 카를 5세 에게 양보하여 공의회의 트리엔트 복귀를 결정하였다. 이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의 결정(1548. 6. 30) 에 따라 프로테스탄트 대표들이 참석할 것이라는 추측에 서 이루어진 것이다. 황제는 슈말칼덴 전쟁 중인 1547 년 4월 24일 '묄베르크(Munlberg) 전투' 에서 승리를 거 둔 후 프로테스탄트의 공의회 참석을 이끌어내기 위해 5 월 30일에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 교황의 승인 없이 교의에 관한 '잠정 규약' (Interim)을 인정하였고, 6 월 30일에 프로테스탄트의 공의회 참가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는 교황의 지도 아래 진행되는 공의 회를 거부하고, 프로테스탄트의 성서 원칙을 바탕으로 이미 공포된 교의 교령을 다시 토의해야 한다고 요구하 였다. 1550년 11월 14일에 교황은 칙서 <쿰 앗 톨렌다> (Cum ad Tollenda)를 통해 트리엔트 공의회를 재개하였 다. 볼로냐 이전을 합법화하기 위해 '재개' (reductio)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지만 트리엔트에 남아 있던 주교들은 '속개' (contiuation)를 주장하였다. 프랑스는 볼로냐에서 의 이전을 승인하였지만 트리엔트 공의회 참가를 거부하 였다. 교황은 공의회 사절로 크레셴치오(Marcello Crescenzio) 추기경, 피기노(Sebastiano Pighino) 추기경, 리포 마니(Luigi Lippomani) 추기경을 임명하여 의장단을 구성 하였다. 제11차 회기 공개 회의(1551. 5. 1)는 교령을 통 해서 제12차 회기(1551.9. 1)를 공고하였으나, 독일의 불 참과 다른 교부들의 참석 저조로 10월 11일로 연기하였 다가 1551년 9월 2일에 볼로냐 회기에 완성된 성체성사 에 대한 10개항을 특별 위원회(9.8~16)와 총회(9. 21~10. 10)가 토의하여 신앙 조항으로 합의하였다. 제13차 회기 : 이 회기의 공개 회의(1551. 10. 11)에서 3개의 교령이 공포되었다. 첫째는 교의 교령인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에 관한 교령>이다. 이 교령은 성체 안 의 그리스도의 실존, 성체성사의 제정, 성체성사의 탁월 성, 실체 변화(Transsubstantiatio), 성체 보존과 병자 영성 체, 성체 공경, 영성체 시 마음의 준비와 같은 교의와 함 께 성체성사에 관한 법규를 첨부하였다. 둘째는 주교 직 무에 관한 법규를 담은 개혁 교령이었다. 이 교령은 주교 의 재치권에 관한 법규를 제정하기에 앞서 목자인 주교 의 품행과 교구민에 대한 자세를 제시하고 임지 주재의 의무를 일깨웠다. 법규는 주교의 직무와 주교권 보호에 관련된 8개 조항을 담고 있다. 셋째는 <성체성사에 관한 네 항목의 결정 보류와 안전 통행증에 관한 교령>이다. 즉 양형 영성체의 정의는 보류하고 공의회에 참석하는 독일인들에게 자유로운 발언, 논의, 발제를 보장하고 '안전 통행증' 을 부여한다는 내용이다. 이어서 특별 위 원회(10. 20~30)와 총회(11.6~15)는 고해성사에 관한 12 개 항목과 종부성사에 관한 4개 항목을 토의하였다. 제14차 회기 : 이 회기의 공개 회의(1551. 11. 25)는 고 해성사와 종부성사에 관한 교리를 발표하고, 개혁 교령 을 공포하였다. 공의회는 고해성사에 대한 다양한 오류 발생에 대해 정확하고 완전한 정의를 내림으로써 그리스 도인들이 올바른 교리를 보존하기를 기대하였다. 문서는 고해성사의 제정과 필요성, 고해성사의 본질적 요소인 통회와 죄 고백과 보속, 고해성사의 대상(대죄), 집전 사 제의 사죄(赦罪), 유보된 죄를 설명하였다. 아울러 종부 성사는 병자를 구제하는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그리스도 가 세우고 사도 야고보가 선포한 성사라는 정의와 함께 이 성사의 제정과 효과, 집전자와 집전 시기를 가르쳤다. 마지막으로 고해성사와 종부성사에 관련한 법규가 첨부되었다. 개혁 교령은 성직자의 생활 쇄신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즉 교회 장상의 결정권과 교정권, 부적합한 성직 자의 성무 집행 정지, 주교의 수도회에 대한 재치권을 설 명하였다. 한편 브란덴부르크(Burandenburg)의 선제후 요아킴 2세와 작센(Sachen)의 선제후 모리츠의 파견 대 사들,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 공작, 스트라스부르크 (Strasbourg)의 대표단이 10월부터 트리엔트에 머물면서 공의회와 접촉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뷔르템베르크 선제 후와 작센 선제후의 파견 대사들이 총회(1552. 1.24)에서 아우크스부르크의 공의회 참석 조건(1547)을 다시 제기 하였다. 그들은 공의회 우위설적인 '자유로운 그리스도 인 공의회' 를 주장하면서 결의된 교리의 재검토와 함께 공의회의 의화 교리가 성서에 배치된다고 주장하였다.
제15~16차 회기 : 공의회는 이 회기의 공개 회의 (1552. 1. 25)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청원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친절하게 맞이하고 호의를 가지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고 그들에게 안전 통행권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3월에 작센의 선제후인 모리 츠 공작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카를 5세에 대한 모반 을 일으켜 4월 5일에는 아우크스부르크를 점령하였다. 이때 사회를 주재하던 의장인 크레센치오 추기경은 중병 에 걸린 상태였으며 황제는 필라흐(Villah)로 피신하였 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제16차 회기 공개 회의(1552. 4. 28)에서는 "독일이 무장 폭동으로 불타고 있고 거의 모 든 독일 주교들, 특히 선제후(교회 제후)들이 자신들의 교 회를 돌보기 위해 공의회를 떠나는 것을 보고" 스페인 주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의회를 2년 동안 중단하 기로 결정한 교령을 공고하였다. 한편 교황 율리오 3세 가 1555년 3월 23일에 세상을 떠나자 4월 10일에 공동 의장인 체르비니가 교황 마르철로 2세(1555)로 선출되 었으나 그 역시 5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 결국 테아티 노회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카라파(Gian Pietro Caraffa) 가 바오로 4세(1555~1559)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제3기(1562~1563)] 교황 비오 4세(1559~1565)는 선출된 지 1년 만인 1560년 11월 29일 칙서 <앗 엑클레 시애 레지멘>(Ad ecclesiae regimen)을 공포하였다. 교황 은 이 칙서에서 "중단의 종결" 이라는 표현으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1556~1598)가 요구한 '공의회의 속개' (continuatio)에 동의하고 공의회의 '공고' (indictio)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1 세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2세(1559~1560)의 '새 공의 회' 요구를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양측은 이에 만족 하지 않고 교황 칙서를 수용하지 않았다. 아울러 1561 년 2월 5일에 독일 프로테스탄트 의원들은 나움부르크 (Naumburg)에 모여 교황 칙서의 수용을 공개적으로 거 부하였다. 이렇게 국가들의 공의회 참석이 불확실한 가 운데 교황은 1561년 2월과 3월에 공의회 파견 전권 대 사로 곤자가(Ercole di Gonzaga, +1563) 추기경, 세리판도 추기경, 호시우스(Stanislaus Hosius, 1504~1579) 추기경, 시모네타 추기경, 호헤넴스(Sittich von Hohenems) 추기경 을 임명하여 공의회 의장단을 구성하였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교황으로부터 '공의회의 속개' 를 보장받 고 주교들에게 공의회 참석을 명령하여 1561년 말에 스 페인 주교들이 트리엔트에 도착하였고, 페르디난트 1세 도 황제 대리 사절과 주교들의 파견을 약속하여 제국의 교회 선제후(대주교)들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칼뱅파인 '위그노' (Huyguenot)의 발흥에 따른 국가 위기 로 참석이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받은 교황은, 이탈리아 주교들에게 직접 공의회 참석을 독촉하였다. 제17~20차 회기 : 제17차 회기 공개 회의(1562. 1.18)는 성 마리아 주교좌 성당에서 추기경을 포함한 109 명의 주교들과 8명의 수도원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 회되었다. 제18차 회기 공개 회의(1562. 2. 26)에서 "불순 한 교설을 담고 있는 의심스럽고 위험한 책들을···가려 내어 논쟁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도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또한 "우리와 친교를 이루고 있지 않은" 독일인들에 대한 안전 보장에 관한 교령이 공포되어, 총 회(3. 4)에서 독일과 다른 국가들의 단체나 개인에게 안 전 통행증을 발부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1일에 의장 단이 발의한 12개항의 개혁 의안 중 주교의 임지 주재 의무에 관련된 논쟁이 4월 7일에 시작되었다. 스페인과 일부 이탈리아 교부들은 '신법(jus divinum)에 의거한 의 무' 를 주장하고 교황청파와 대다수 이탈리아 교부들은 '교회법(jus ecclesiastica)에 의거한 의무' 를 강조하였다. 의장단이 총회(4. 20)의 투표에 부치자 '신법에의 의거'는 반대 35표와 찬성 67표, 교황에게 일임 24표, 시기 상조 14표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5월 11일에 교황은 공 의회 의견 대립에 따른 폐회의 위기를 피하기 위해 토론 중지를 명령하였다. 의장단은 이 문제를 신품성사와 관 련하여 다룰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속권의 '공의회 속개' 와 '새 공의회' 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제19차 회기 공개 회의(1562. 5. 14)와 제20차 회기 공개 회의(1562. 6.4)에서 교령의 공포가 연기되었다. 제21 ~22차 회기 : 제21차 회기 공개 회의(1562. 7.16)에서 양형 영성체와 어린이 영성체에 관한 교리와 4 개 조항의 법규가 발표되었다. 이는 제13차 회기의 성체 성사 교령을 반영한 것이다. 이 교령은 양형 영성체에 대 한 신법상의 의무가 없으며 단형 영성체가 오랜 관습과 법으로 규정된 이상 평신도의 양형 영성체는 허용될 수 없고 어린이는 영성체의 의무가 없다고 가르쳤다. 아울 러 양형 영성체와 어린이 영성체에 관한 법규가 첨부되 었다. 그리고 성직 매매 금지, 주교의 수도원 순시 의무 과 같은 규정을 담은 교령이 공포되었다. 이어 미사에 대 한 토의에서, 미사의 제사성과 십자가 희생의 관계에 대 한 논쟁이 있었다. 주요 쟁점은 '최후 만찬이 속죄제(贖 罪祭)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는 제22차 회기 공개 회 의(1562. 9. 17)에서 십자가상 제사의 회상과 재현이라는 미사의 의미,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한 미사, 속죄제와 같 은 교리를 담고 있는 문서로 발표되었다. 아울러 미사에 관한 법규와 미사 봉헌 시에 지켜야 할 사항과 피해야 할 사항에 관한 교령 및 성직자의 생활, 주교좌 성당과 사제 단, 주교의 직무, 성직 계급과 같은 규정을 담은 법조문 양식의 개혁 교령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 혈 배령에 관한 청원을 교황에게 일임하는 교령이 공포 되었다. 한편 의장단과 이탈리아 주교들 대부분은 프랑스 · 독 일 대사들과 함께 개혁을 먼저 다루자는 스페인 주교들 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성품성사에 관한 교의 토의 를 시작하였다. 총회(10. 13)는 성품성사를 토의하기 시 작하였고 11월 6일에 주교의 임지 주재에 관한 새 교령 심의에 착수하였다. 토론과 새 교령의 초점은 교황의 수 위권과 주교의 재치권(栽治權, potestas iurisdictionis)이었 다. 1562년 11월 13일 프랑스 로렌(Lorraine) 대교구의 기즈(Charles de Guise) 추기경이 13명의 주교들을 이끌 고 트리엔트에 도착한 이후 의장단과 교황청의 격려를 받고 있던 '열성파' (zelanti)는 성품권(potestas ordinis)과 재치권을 구분하여 주교권의 교황권 종속을 주장하고, 의장단의 '반대파' 인 스페인과 프랑스의 주교들은 '신권 에 의거한 주교권 제정' 을 주장하며 대립이 심화되었다. 1563년 1월 13일에 교황청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대리자 이며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은 전체 교회를 이끌고 다 스리는 전권(全權, plenitudo potestatis)을 지녔다는 수위 권을 성품성사에 관한 교령에 삽입하라는 지시가 도착하 였다. 공동 의장인 곤자가와 세리판도 추기경은 1562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타협안을 찾으려고 노력하였 으나 실패하자, 공의회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1563년 2 월 9일에 혼인성사에 관한 특별 위원회를 가동하였다. 그러나 속권의 간섭으로 공의회는 강제 해산의 위험에 이르렀다. 그해 3월 3일 인스브루크(Innsbruck)에서 페 르디난트 1세는 '반대파' 의 지도자인 기즈의 방문을 받 고 교황에게 공의회를 통한 개혁의 보장과 '열성파' 에 대한 제재를 요청하였다. 당시에는 곤자가(3. 2)와 세리 판도(3.7)가 모두 사망하였기때문에 교황의 신임을 받고 있던 모로네 추기경이 의장단을 이끌고 있었다. 모로네 는 화해 정책을 펼쳐 기즈 추기경과 스페인 주교들 및 독 일 황제파들을 받아들였고, 4월 1일에 교황은 스페인 국 왕에게 자신이 추구하는 개혁의 진실성과 공의회의 속개 를 알렸다. 제23차 회기 : 공의회는 두 달 동안의 위기를 극복하 고 제23차 회기(1563. 7. 14)를 시작하였다. 이 회기의 공 개 회의에서 '성품성사의 참된 보편적 교리' 와 함께 성 품성사에 관한 오류를 단죄하는 법규가 공포되었다. 즉 사제직의 설정, 성품성사의 성사성과 일곱 단계(수문품, 독서품, 구마품, 시종품, 차부제품, 부제품, 사제품), 성품성사 와 교계 제도에 대한 가르침을 담았고, 8개 조항의 성품 성사에 관한 법규가 첨부되었다. 제6조에서 제8조에 이 르는 항목은 주교 직무에 관한 프로테스탄트의 주장을 배척하고, 교황의 수위권 정의를 피하였다. 아울러 개혁 교령은 주교의 임지 주재 의무를 강조하면서 '신법에 의 거한' 이라는 표현은 언급하지 않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주교는 장래 사제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설립할 의무를 가진다는 제18조의 내용이었다. 1563년 7월 30일에 모 로네 추기경은 이탈리아 주교들의 소견서(1562. 3), 스페 인 주교들의 소견서(4월), 황제 사절의 개혁 소견서(6. 6), 프랑스 주교들의 청원서(1563. 1. 3)에 나타난 개혁 의지와 교황청의 지시 사항들을 종합하여 작성한 42개 항목의 개혁안을 국가 대리 대사들에게 보내어 의견을 구하였다. 그중 21개 항목이 총회(9. 11~10. 2)에서 토의 되었고 11월에 나머지 항목도 토의되었다. 아울러 총회 는 7월과 8월의 혼인성사에 관한 토론에서 비밀 결혼의 무효 선언과 간음에 따른 이혼 문제에 대해 격렬한 논쟁 에 휩싸였다. 제24차 회기 : 이 회기의 공개 회의(1563. 11. 11)에서 혼인 교리와 혼인의 개혁에 관한 법규 그리고 개혁 교령 이 채택되었다. 첫째로 혼인 교리는 혼인의 성사성, 혼인 의 불가해소성(不可解消性), 교회의 혼인 장애 제정권을 담고 있다. 둘째로 법규는 유효한 혼인, 혼인 합의, 내 연 · 인척 · 친척 관계에 따른 혼인 장애, 혼인 강요 금지 와 같은 내용을 담았다. 셋째로 개혁 교령은 주교 후보자 신상 조사 절차를 포함한 임명 방법, 3년차 관구 교회 회 의와 연차 교구 교회 회의, 주교의 교구 순시와 복음 선 포(설교) 직무, 신자 교리 교육, 성직 매매 금지, 본당 신 부 임명 등의 내용을 담았다. 제24차 회기는 차기 회기 를 12월 9일로 정하면서 날짜를 앞당길 수 있는 가능성 을 열어 놓았다. 교황의 병세 악화 소식으로 인해 마지막 회기(제25차 회기)의 개회일은 12월 3일로 정하였다. 제25차 회기 : 마지막 회기의 공개 회의(1563. 12. 3~4)에서는 아직 논의되지 않은 교리인 연옥, 성인 공경 , 성해(聖骸), 성화상, 남녀 수도자에 관한 교령들과 족벌 주의 금지, 관구 교회 회의, 교회록 설정 규정, 교회 직 무 겸직 금지, 사회 복지 활동 권장, 십일조 의무, 주교 지의 품위, 관면 적용의 신중성, 개혁 교령의 인정, 교황 권위의 존중 등의 내용을 다루었다. 이어서 회기가 다음 날로 연장되는 교령이 공포되어 금서 목록, 성직자를 위 한 교리서, 미사 경본, 성무 일도서의 개혁은 완성되지 못한 채 준비된 자료들을 교황에게 제출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마지막으로 교황 바오로 3세와 율리오 3세 시대에 공 포된 모든 교령들을 낭독하고 참석한 모든 주교들이 서 명하였다. 교령들은 6명의 추기경, 3명의 총대주교, 169명의 주교, 7명의 수도원장, 수도회 대표 몇 명이 서 명한 후 모든 교령의 승인을 교황에게 요청하기로 결정 하였다. 기즈 추기경의 제의로 모든 참석자들은 바오로 3세, 율리오 3세, 바오로 4세,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 1 세 등 공의회를 성공으로 이끈 공헌자들에게 갈채를 보 내면서 "우리는 거룩한 전체 공의회의 신앙을 언제나 고 백하고 준수하기로 결심한다" 라고 외쳤다. 1564년 1월 26일에 공의회 의장 모로네 추기경은 공의회 교령에 대 한 교황 인준을 구두로 받았고, 6월 30일에 칙서 <베네 딕투스 데우스>(Benedictus Deus)를 통해 서면 인준을 받 았다.
IV. 결과 및 의의
〔공의회의 결과〕 교황청 : 교회사가인 프란츤(August Franzen, 1912~1972)의 평가대로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령 은 이전의 공의회처럼 개혁 교령이 사문화(死文化)될 위 험은 없었다. 교회의 미래를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가 내 놓은 개혁을 수행하려는 강한 의지를 지닌 교황들이 등 장하였기 때문이다. 교황들은 공의회가 미처 처리할 수 없었던 개혁 업무까지 완성하였다. 교황 비오 4세는 1564년 3월 24일에 칙서 <도미니치 그레지스>(Dominici gregis)를 통해 공의회에서 준비하였던 금서 목록을 간행 하였고, 8월 2일에 트리엔트 공의회의 올바른 해석과 실 시를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 해석 추기경위원회' 를 구성 하였다. 그리고 11월 13일에 주교들과 수도회의 장상, 신학자들이 휴대할 수 있는 공의회의 교의 요강인 《트리 엔트 신앙 고백》(Profesio fidei Tridentina)을 발표하였다. 교황 비오 5세(1566~1572)는 1566년에 본당 신부들 을 위해 가톨릭 교회의 주요 교리와 윤리를 간단명료하 게 담고 있는 《로마 교리서》(Catechismus Romanus ad parochos)를 간행하였고, 1568년에는 교구 성직자와 수도 자가 사용할 새로운 《로마 성무 일도》(Breviarium Romanum)를, 1570년에는 서방 교회가 로마 전례로 통일 하여 사용하게 될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을 간행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는 과거의 파견 교 황 사절 제도를 상주 교황 대사 제도로 새롭게 바꾸었는 데, 이 교황 대사들을 통해 지역 교회의 트리엔트 개혁을 지도 감독함으로써 전 교회의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었 다. 또 '로마 신학원' 을 재건하고 '독일 신학원' 에 '헝가 리 신학원' 을 통합시켜 확대하였으며, 신학교에 관한 교 령이 시행되기 어려운 영국의 성직자 양성을 위해 로마 에 '영국 신학원' 을 신설하였다. 그리고 가톨릭 동방 교 회의 중심이 로마임을 인정받으려는 의도에서 로마에 '성 아타나시오 신학원' 과 함께 아르메니아 교회와 마론 파 교회를 위한 신학원을 설립하였다. 이로써 로마는 교 회 행정과 신학 연구 그리고 성직자 양성의 중심이 되었 다. 1582년 2월 24일에 '율리우스력(曆)' 을 개정하여 내놓은 '그레고리오력(曆)' 의 도입은 교황권의 확대에 기여하였다. 가톨릭 국가들은 이 달력을 즉시 사용하였 으나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100년 후에, 그리스 정교 회는 20세기에 이르러 수용하였다. 교황 식스토 5세(1585~1590)는 공의회가 미루어 왔던 머리(교황청)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교황은 회칙 <임멘사 에테르니 데이>(Immensa, aeterni Dei, 1588. 1. 22)를 통해 일정한 권한을 행사하며 행정을 수행하는 15개의 성 (省)을 설립하였다. 이후 추기경들의 행정 참여는 성을 통해 이루어졌다. 상서원과 함께 추기원 회의는 의결이 아니라 집행 기능을 지님으로써 그 중요성이 감퇴되었 다. 교황은 1586년 12월 3일에 교황령 <포스트괌 베루 스>(Postquam verus)를 통해 추기경 정원을 콘스탄츠 공 의회가 결정한 24명에서 70명으로 늘리고 개혁 의지를 지닌 인물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1585년 12월 20 일에 교황은 주교들과의 일치를 증진하기 위해 '교황청 정기 방문' (ad limina Apostolorum) 제도를 새롭게 도입하 여 이탈리아와 인접 국가들의 주교들은 3년마다, 유럽의 주교들은 4년마다, 그 외의 주교들은 5년마다 로마를 방 문하여 교회 상황 보고(Relatio status diocesis)를 한 후에 교회 개혁 훈령을 받아 돌아감으로써 이 방문은 개혁의 출발점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교황은 공의회 제4차 회기 (1546. 4. 8)에서 발표한 불가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 령인 <성서와 사도 전승의 수용>에 따라 '불가타' 의 개 정을 위해 성서 위원회를 구성하여 1590년 5월 2일 《성 서 불가타》를 간행하였다. 그러나 간행을 서둘러 오류가 많자 교황 글레멘스 8세(1592~1605)가 수정본을 간행하 였다. 이로써 가톨릭 교회는 하나의 성서인 불가타와 하나의 전례인 로마 전례로 통일된 교회의 단일성을 보여 주었 다. 교황 식스토 5세의 사망(1590. 8. 27)과 함께 트리엔 트 시대는 끝났지만 이후 교황들은 주교 또는 교황 대사 로 공의회의 교령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한 성직자들이었 기 때문에,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 구현은 막힘없이 이 어졌다. 지역 교회 :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지역 교 회의 주교들은 임지 주재 의무(제23차 회기 개혁교령, 법규 3조)를 다하면서 주일과 축일 강론 및 교구 순시(제24차 회기, 개혁 교령 3~4조)와 같은 사목 활동에 충실하였다. 그들은 사제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세우고(제23차 회기, 법규 18조), 그전까지는 일정 기간 동안 개인 교육을 받 으면 사제가 될 수 있었지만 이제 주교들은 "성품과 의 지가 언제나 교회 봉사직을 수행하리라는 희망을 일깨워 주는 소년들을"(제23차 회기 개혁 교령, 법규 18조) 선발하 였고, 신학교에서 신학 교육과 영성 지도를 받은 사제 지 망자를 엄격하게 심사하여(제23차 회기 개혁 교령, 법규 7, 11, 13, 14조) 서품을 주었다. 주교들은 공의회의 결정(제 24차 회기 개혁 교령 2조)에 따라 3년차 관구 교회 회의와 교구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제24차 회기 개혁 교령 3조) 트 리엔트 개혁을 활성화하였다. 트리엔트 개혁 정신을 철저하게 실천한 대표적인 주교 는 보로메오(Carolus Boromaeus, 1538~ 1584) 추기경이었 다. 그는 밀라노 교구장으로서 사목 방문과 함께 11차례 의 교구 교회 회의와 6차례의 관구 교회 회의를 소집하 여 교구 개혁 법규를 제정하였으며, 트리엔트 개혁의 효 과적 실현을 위해 대교구를 12개 지역으로 분할하여 교 구장 대리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였다. 보로메오 는 사제 양성을 위해 몇 개의 부속 소신학교와 함께 신학 교를 설립하는 한편 교리 학교들도 세웠는데, 1595년에 는 학생이 2,000명 이상이었다. 1582년에는 모든 개혁 사업을 압축한 <밀라노 교회 법령>(Acta ecclesiae Mediolanensis)을 간행하여 밀라노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스페인 교구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등 트리엔트 시대가 요구 하는 이상적인 주교의 본보기를 보였다. 수도회 : 1563년 11월 11일에 공의회는 "오래된 수 도회의 규칙이 무너진 곳에서는 간편하고 신속하게 재건 하고, 잘 보존되는 곳에서는 굳건히 준수될 수 있어야 하 며 ··· 남녀 수도자들은 수도 서약과 함께 ··· 공동 생활과 완덕 생활을 추구하며 이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제24차 회기, 남녀 수도자들에 관한 교령, 제1장)라고 역설하면서 수 도 규칙의 강화를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수도회는 특히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에서 자기 성화, 사도직, 자선 이라는 동기에서 출발한 가톨릭 교회 쇄신을 활발하게 구현함으로써 개혁 수도회, 사목 수도회, 사회 복지 수도 회가 탄생하였다. 개혁 수도회로 봉쇄 수도회인 '카르투지오회' (Ordo Cartusiensis)는 네덜란드와 프랑스에서 위그노 전쟁(1562 ~1598) 중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가들의 수도원 파괴와 수도자 학살, 칼뱅파 위그노가 자행한 프랑스 그르노블 (Grenoble)의 샤르트뢰즈(Chartreuse) 수도원 파괴(1562) 등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수도 성소가 줄어들지 않았으 며, 오히려 1581년에 초기의 엄격한 수도 규칙으로 돌 아가는 근본적인 내적 생활의 쇄신을 단행하였다. 1562 년에 스페인 아빌라의 데레사(Teresa de Avila, 1515~ 1582)는 '완화 가르멜회' 의 수도 생활보다 초기 가르멜 회의 엄격한 가난 고행과 기도 생활을 원하는 수도자들 을 모아 성 요셉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데레사는 완화된 수도 규칙을 지키는 가르멜회의 반대를 극복하고 1580 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인가와 국왕 펠리페 2세 의 보장을 받아 내적 생활의 수련과 수도 규칙의 엄수를 강조하는 개혁 '맨발의 가르멜회' 를 시작하였다. 이후 '데레사의 개혁' 은 점차로 가르멜회 전체에 퍼졌다. 성 녀는 가톨릭 교회의 신비주의와 극기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고 관상 생활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움을 주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1562년 9월 17일에 공포한 개혁 교령(제22차 회기)과 1563년 7월 15일에 공포한 '성품성 사에 관한 교리' 와 '개혁 법령' (제23차 회기)을 통해 성직 자의 생활 쇄신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원칙은 사 제상의 이상을 밝혔다는 탁월한 점을 지니고 있지만, 성 직자들에게 필요한 지식 함양과 수덕과 수련의 실천 방 법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이상과 실천이 연계되지 않 은 공의회 문헌의 성직자 생활 쇄신에 관한 내용이 충분 하지 못하자, 교회의 지도적 인물들은 공의회 개혁 교령 을 바탕으로 성직자 문제들을 연구하여 성직자 개혁을 통해 대중의 신앙 부흥 운동을 전개하는 방법을 탐색하 였다. 그 결과 교구 사제들이 생활 쇄신을 목표로 공동 생활과 사목 생활을 함께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제 공동 체가 설립되었다. 1575년에 필립보 네리(Filippo Neri, 1515~1595)는 성직자의 지도력 향상을 위해 로마에 '오 라토리오회' 를 설립하였다. 오라토리오회 회원들은 개인 의 성화, 훌륭한 강론, 잘 준비된 전례 집전을 강조하는 사목을 주요 임무로 삼았다. 1578년에는 보로메오 추기 경이 네리의 자문을 받아 트리엔트 개혁을 구현하기 위 해 교구 사제 공동체인 '성 암브로시오의 헌신회' 를 설 립하였다. 이 회원들은 교구장을 도와 교구 사목에 헌신 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1563년 12월 3일에 평신도이든 수도자이든 환자, 노인, 빈민을 정성스럽게 돌보는 사람 들은 수혜자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사실을 상 기하면서(마태 25, 30) 기쁜 마음으로 환대의 의무를 실 천하는 일은 교부들의 칭찬을 받을 만하다고 언급하였다 (제24차 회기 개혁 교령, 8장). 이렇게 사회 복지 활동을 권 장하는 공의회의 가르침은 새로운 트리엔트 영성을 탄생 시켰다. 이 영성에 따르면, 가톨릭 신자들은 영적 완성에 이르기 위해 자신을 억제하고 개선하면서 이웃을 위해 선행을 실천하려는 열의를 지녀야 한다. 여기서 수도 생 활과 사회 봉사 활동을 겸비하여 트리엔트 영성을 구현 하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가 창립되었다. '가밀로회' (1584년 설립, 1586년 교황 인가)는 병자와 임종자들을 보 살폈고, 일반적으로 '피아리스트회' (Piarists)라고 불리는 '하느님 모친의 가난한 성직자 교직 수도회' (1597년 설 립, 1617년 교황 인가)는 가난한 청소년들에 대한 영성 교 육과 지성 교육에 헌신하였다. '마리아 방문회' (1610년 설립, 1626년 교황 인가)는 병자 간호와 소녀 교육에 헌신 하였고, '자비의 자매회' (1633년 설립, 1668년 교황 인가) 는 병자 간호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폈다. 〔공의회의 의의〕 트리엔트 공의회는 교회사에 있어서 공의회의 목적인 가톨릭 교의의 재정립과 교회 개혁을 성취하였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첫째로 트리엔트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 개혁 교리에 대응하여 가톨릭 신앙 교리를 확인하고 정리하였다. 그 리고 전통 신앙 교리와 종교 개혁가들의 주장 사이에 선 을 명확하게 그음으로써 그동안 제기된 교의의 불명료성 과 불안전성을 제거하였다. 이 교의 교령에는 성서와 전 승에 따라 교의 내용을 당연한 귀결로 이해하도록 하는 법규가 이어졌으나 가톨릭 교의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충 분하게 정의되지 못하였다. 적극성의 부족은 공의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종교 개혁가들이 쏟아내는 주장들에 대처하는 과제가 시급하였기 때문이었는데, 공의회는 이 러한 부족함을 이단 단죄(anathema sit)의 법규로 보완하 였다. 아울러 가장 맹렬한 도전을 받았던 교황의 수위권 과 교회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함으로써 교의 교령 내 용에 아쉬움을 남겼다. 이러한 아쉬움은 교의 교령 자체 보다 역사적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1562년에 주교의 임지 주재 의무에 대한 논쟁(공의회의 제1차 위기)과 이에 따른 '신법에 의거한 주교권' 과 교황의 수위권 논쟁(공의 회의 제2차 위기)은 공의회 우위설을 내세우는 프랑스의 '갈리아주의' (Galiacanismus)와 주교권의 신수설을 주창 하는 독일의 '에피스코팔리즘' (Episcopalismus)의 도전을 받았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수위권에 대한 토의와 정 의는 공의회를 종말로 이끄는 위험을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황의 수위권은 교령 곳곳에서, 특히 '혼인성사 에 관한 교리' (제24차 회기, 1563. 11. 11)에 나타난 교황의 혼인 장애 설정권에서 드러났다. 둘째로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대응하여 가톨릭 교회 쇄신을 설정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개혁 교령 의 내용 역시 충분하지 못하였고, 순조롭게 작성되지 못 하였다. 그 이유는 개혁 교령이 교의 교령과 동시에 논의 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공의회 대표로 참석한 국가 대 리 대사,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 독일 그리고 황제 와 교황청이 내놓은 다양한 요구들과 타협하지 않고서는 개혁 교령이 공고될 수 없었다. 이는 공의회의 결함이지 만, 개혁 교령은 타협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타협은 최대 의 양보와 최소의 요구로 이루어지는 만큼 만족한 결과 를 기대하기 어렵지만, 개혁 교령이 타협에 의해 공고된 것은 현명한 모로네 추기경의 중립성 및 실리주의와 함 께 공의회를 지속시키려는 노력에 바탕한다. 아울러 교 회 안의 오랜 관습과 새로운 이상과의 투쟁 과정 때문에 개혁 교령의 공고는 언제나 충분하지도 못하였고 쉽게 이루어지지도 못하였다. 공의회는 교황청 개혁에 등한하 였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사목적 배려에 의거하여 교구, 본당, 수도원의 영역에서 구현된 개혁으로 폐해를 비난 하는 목소리를 낮출 수 있었다. 아울러 공의회 중 교황청 개혁을 열망하던 인물들이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교황으 로 선출되어 교황청 개혁을 이루었다는 것도 간과하여서 는 안 된다. (→ 갈리아주의 ; 공의회 우위설 ; 그레고리 오 13세 ; 금서 목록 ; 네리, 필립보 ; 데레사, 아빌라의 ; 독일 ; 라테란 공의회, 제5차 ; 《로마 교리서》 ; 르네상 스 교황 ; 마르티노 5세 ; 바오로 3세 ; 바젤 공의회 ; 반종교 개혁 ; 보로메오, 가롤로 ; 비오 5세 ; 서구 대이 교 ; 성사 ; 세리판도, 지롤라모 ; 소토, 도밍고 데 ; 슈말 칼덴 동맹 ; 수위권 ; 식스토 5세 ; 신성 로마 제국 ; 아 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 에피스코팔리즘 ; 오라토리오 회 ; 율리오 3세 ; 카르투지오회 ; 카를 5세 ; 콘스탄츠 공의회 ; 테아티노회 ; 펠리페 2세) ※ 참고문헌 Henrichus Denzinger · Adolfus Schonmetzer eds., Enchidirion Symbolorum Def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35th ed., Barcione · Friburgi Brisgoviae · Romae · NeoEboraci, 1973/ Ludwig Pastor, History ofthe Popes. From the Close of the Middle Ages, vols. I~XXV, trans. from the German Geschichte der Paste seit dem Ausgang des Mittel-alters vols. I~XXV, Freibug, Herder, 1886, Frederick Ignatius Antrobus ed., St. Louis, Mo., B. Herder, 1891~1952/ Norman P. Tanner ed., Decrees of the Ecumenical Councils, vols. 1~2, London, Sheed & Ward : Washington, Georgetown Univ. Press, 1990/ Hubert Jedin, A History ofthe Council ofTrent, vols, I~II, London · Edinburgh · Paris . Melbourne · Toronto . New York, Thomas Nelson and Sons Ltd., 1961/ -, Ecumenical Councils of the Catholic Church, 3rd impression, New York, Herder and Herder, 1960 ; trans. by Ernest Grap from Kleine Konziliengeschichte, Freiburg, Herder, 1959(최석우 역, 《세계공의회사》, 분도출판사, 2005/ E.I. Watkin, The Church in Council, London, Darton, Longman & Todd : New York, Sheed & Ward, 1960/ John L. Murphy, The General Councils of the Church, Milwaukee, The Bruce Publishing Company, 1960/ Francis Dvornik, The General Councils of the the Church, London, Burns & Oates, 1961/ Philip Hughes, The Church in Crisis. A History of the Twenty Great Councils, London, Burns & Oates, 1961/ Henricus van Straelen . 濱寬五郎 . Leo Elders 편, 公義會解說叢書 6》, 東京, 中央出版社, 1969(현석호 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 헌 총서 6》, 성 바오로출판사, 1993)/ Klaus Schatz, Allgemeine Konzilien-Brennpunkte der Kirchengeschichte, Paderborn, Ferdinand Schoningh, 1997(이종환 역, 《보편공의회사》, 분도출판사, 2005)/ A.G. Dickens, The Counter-Refomation, rep., London, Thanes and Hudson, 1977/ Michael A. Millett, The Catholic Reformation, London · New York, Routledge, 1999/ Richard L. DeMolen ed., Religious Orders ofthe Catholic Refomation, New York, Fordam Univ. Press, 1994/ Hubert Jedin · John Dolan eds., History of the Church, volume IV : From the High Middle Ages to the Eve of the Refomation, London, Burns & Oates, 1980. (金聖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