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리아

〔히〕 טְבֶרִיָה · 〔그〕 Τιβεριάς · 〔라〕 Tiberiadis · 〔영〕 Tiber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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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4대 성도 중 하나인 티베리아.

유대교 4대 성도 중 하나인 티베리아.


이스라엘 북동부 갈릴래아 호수 서쪽에 위치한 도시. 유대교의 4대 성도(聖都 : 예루살렘, 제파트, 티베리아, 헤브 론) 중 하나. 이 도시는 갈릴래아 호수의 북쪽 끝에서 약 15.5km, 남쪽 끝에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평균 해발 210m 정도에 위치하고 있으나, 도시의 북쪽 지역 은 해발 249m의 높은 곳에 있다. 이곳의 지명을 《예루 살렘 탈무드》에서는 티베리야(Tivveryah), 《바빌로니아 탈무드》에서는 테베리아(Teveya)라고 기록하고 있다. 티베리아는 갈릴래아 호숫가의 충적토 위에 세워졌다. 헤로데 대왕(기원전 37~4)의 아들로 갈릴래아 영주인 헤 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서기 39)가 서기 14~18년 사 이에 납달리 지파의 영토로 언급된 라캇(רַקָּת : 여호 19, 35)에 이 도시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라캇의 위치는 오늘날 티베리아 북쪽의 키르바트 쿠나이티라(Khirbat Qunaytira)로 알려져 있다. 티베리아는 헬레니즘 양식을 따라 성곽이 없는 도시로 서기 18년에 낙성식이 거행되 었으며, 도시의 이름은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티베 리우스(14~37)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서기 20년 에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포리스(Sepphois)에서 티베리 아로 갈릴래아 지역의 중심지를 옮겼고, 행정 관서나 이 에 따른 각종 기관도 이곳으로 옮겨졌다. 티베리아의 거 주민은 원래 이곳에 살던 원주민과 노예들이었다. 처음 티베리아를 건설하였을 때 유대인들은 이 도시를 꺼렸 다. 왜냐하면 도시를 세우기 위하여 이곳에 있던 무덤을 모두 없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차 유대 독립 전쟁 (66~70) 때에는 대부분의 거주민이 어업에 종사하는 유 대인이었다. 티베리아는 도시의 면적이 넓지 않기 때문 에 도시 전체가 대부분 어업에 의존하였으며, 약간의 유 리나 토기 제작 산업, 직조업 그리고 나무 가공업 등에 종사하였다. 서기 39년에 티베리아는 후에 유대의 왕이 된 헤로데 아그리파 1세(41~44)에게 넘겨졌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 이 도시는 로마가 직접 통치하였다. 61년에 네로 황 제(54~68)는 티베리아를 갈릴래아에서 분리하여 다시 헤로데 아그리파 2세(27~93?)에게 주었다. 66년 젤롯당 (Zealot)을 중심으로 제1차 유대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으 나, 67년 후에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69~79)에 의해 갈릴래아가 초토화되고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정복된 후 갈릴래아가 팔레스티나 유대인들의 중심지가 되면서 티베리아는 주요 거점이 되었다. 2세기 초에 시메온 벤 요하이(Simeon ben Yohai)가 티 베리아를 정화한 후 산헤드린과 유대교 학술 기관들이 이곳으로 옮겨졌고, 636년에 아랍인들이 예루살렘을 정 복할 때까지 티베리아는 유대인의 수도 역할을 하였다. 5세기에 예루살렘 탈무드가 티베리아에서 기록되었으며, 이 도시 랍비들의 영향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황제 하드리아누스(117-138)를 기념하는 신전도 완공되지 못 하였다. 특히 서기 70년부터 활동한 랍비 요하난 벤 자 카이(Johanan ben Zakkai, ?~?)의 명령으로 공공 목욕탕에 있던 모든 신상이 파괴되었다. 뿐만 아니라 황제 콘스탄 티누스 1세(306~337) 시기에 티베리아에 성당을 지으려 는 시도 역시 무산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이곳에 공동체를 이루고 처음으로 교회를 세우면서 티베리아에 주교가 임명된 것은 5세기부터 이다. 하지만 곧 그 주교좌는 폐지되었고, 520년에 바빌 로니아 총주교의 아들인 마르 주트라(Mar Zutra)가 이 주 교좌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614년 티베리아는 벤자민 (Benjamin)을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고, 636년 무슬림이 팔레스티나를 점령한 후에는 지방의 수 도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아랍 통치하에서도 유대인 공 동체는 지속적으로 존재하며 번영하였다. 십자군 시대에 티베리아에는 유대인 50가구만이 살고 있었다. 십자군들은 티베리아에 성벽을 건설하였으며, 이 성벽의 일부는 현재도 남아 있다. 1100~1247년까 지 티베리아는 갈릴래아 지역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술 탄 살라딘(1169~1193)이 이끄는 이슬람 군대가 하틴 전 투(1187. 7. 4)에서 십자군을 대파한 이후 제파트(Zefat) 를 갈릴래아의 수도로 정하면서 티베리아는 그 중요성을 점점 더 잃어 갔다. 1562년 티베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술탄 슐레이만 1세(1520~156)는 티베리아와 그 주변 지역을 유대 정치가이며 금융업자인 낙소스 공작 요제프 나시(Joseph Nasi)에게 하사하였다. 이후 이 도시는 유대인 도시가 되었지만, 양잠업과 목양 업을 바탕으로 정착지를 건설하려던 계획은 실패하였다. 신약성서에서 티베리아는 단 한 차례, "티베리아로부 터 다른 작은 배들이 주님께서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 음 그들이 빵을 먹었던 곳으로 다가왔다" (요한 6, 23)라 고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티베리아 호수" 라는 표 현은 2번(6, 1 ; 21, 1) 언급된다. 티베리아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1100년경 십자군에 의해 세워진 성벽과 유대인 철학자이자 율법 학자로 이 집트에서 사망한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 1135~ 1204)의 무덤 및 서기 70년 이후 유대교를 재건한 율법 학자 요하난 벤 자카이와 유대교 최초의 성문법 미쉬나 의 기초를 세운 아키바 벤 요셉(Akiba ben Joseph, 50?~ 135)의 무덤이 있다. (→ 갈릴래아 호수 ; 아키바 벤 요 셉 ; 요하난 벤 자카이) ※ 참고문헌  M. Avi-Yonah, 《EJ》 15, pp. 1130~1135/J.F. Strange, Tiberius, 《ABD》4, pp. 547~549. [金永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