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디, 제임스 Pardy, James(1898~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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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969년 파디 주교가 설립한 성심원 전경(왼쪽)과 제천 남천동 본당의 천혜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196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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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969년 파디 주교가 설립한 성심원 전경(왼쪽)과 제천 남천동 본당의 천혜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1960년경)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주교. 초대 청주 교구장. 세례명은 야고보. 한국명은 파지(巴智). 1898년 3월 미국 뉴욕 주 브루클린(Brookyyn)에서 출생하였다. 1918년 뉴욕 시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메리놀회에 입회 하여 1927년 뉴욕의 세인트 프랜시스 대학, 1930년 워 싱턴 가톨릭대학원을 졸업하고 32세의 나이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된 뒤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신학교에서 교편을 잡 았다가 1932년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하였다. 당시 평북 비현 본당의 보좌로 있던 레이(J. Ray, 李) 신부에게 한글 을 배웠으며, 1934년에는 주일마다 헬로란(E. Halloran, 河) 신부가 사목하던 영유 본당을 도와 주기도 하였다. 같은 해 2월부터 1941년 12월까지는 평북 의주 본당의 8대 주임으로 재임하였는데 파디 신부는 특히 주일학교 를 철저하게 운영하고 유치원과 양로원을 확충하며 해성 학교를 정식 인가받아 운영하는 등 교육 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처럼 열성적으로 사목 활동을 하고 있던 중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일제에 의하여 체 포되어 신의주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뒤, 1942년 6월 평양 대목구의 다른 메리놀회 선교사들과 함께 본국 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그 후 미 육군에 입대하여 유럽에 서 군종 신부로서 사목 활동을 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6년 미국 메리놀회의 소신학교 교장, 1948년에는 메리놀회 본부의 교육감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군종 신부로 다시 한국에 입국하여 1953년까지 거제도와 마산의 포 로 수용소 등에서 미군과 포로들을 위한 사목 활동을 폈 다. 전쟁이 끝난 1953년 9월에는 메리놀회 한국 지부장 겸 충북 감목 대리로 임명되었다. 1956년에 메리놀회 부총장으로 선출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부총장으로 재임 중이던 1958년 6월 23일에 청주 대목구가 설정되 어 7월 4일에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9월 16일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일에 미국 뉴욕 메 리놀회 대신학교 성당에서 주교 축성식을 갖고, 그해 11 월 21일 세 번째로 한국에 입국하여 25일 청주중학교 강당에서 착좌식을 가진 뒤 1969년 6월 교구장직을 사 임할 때까지 청주교구의 사목과 행정을 총괄하면서 교세 신장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부임 초 15개 본당에 신자수 18,600여 명이던 교세가 재임 11년 동안 22개 본당과 140여 개의 공소 그리고 신자수 48 893명 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또한 매괴상업고등학교의 설립 (1953)과 이후 매괴여자중 · 업고등학교로의 발전 (1966. 11) 등을 위시한 교육 사업에도 큰 힘을 기울였 다. 그 밖에 증평 · 청원의 보육원과 옥천의 양로원 및 진 료소를 운영하는 등 사회 사업과 여러 가지 문화 사업에 도 힘을 쏟으며 각 방면에서 청주교구 발전의 기반을 마 련하였다. 1969년 6월 28일 72세의 고령으로 교구장직을 사임 하고 청주 사천동 소재 양로원인 성심원 원장(1970. 6~ 1975. 4)으로 부임하여 불우한 노인들을 돌보다가 1976 년 본국으로 귀국하여, 미국 캘리포니아의 메리놀회 본 부 은퇴 신부 휴양소에서 생활하다가 1983년 2월 15일 85세에 심장 질환으로 선종하여 메리놀회 성직자 묘지 에 안장되었다. (→ 군종교구 ; 메리놀 외방전교회 ; 청 주교구 ; 평양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신문>/ 《경향잡지》 《가톨릭 사전》 《The Field Afar》/ 평양교구사 편 찬위원회 편, 《천주교 평양교구사》, 1981/ 《천주교 청주교구 연감》, 천주교 청주교구청, 1995/ 군종교 구사 편찬위원회, 《천주교 군종교구사(군사목 50년사)》, 천주교 군종교구, 2002. [崔先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