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티아 [그]Tiop0no. [라 · 영〕Parth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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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이란 민족이 중심이 되어 세운 고대 왕국(기원전 247~ 서기 226) . [역 사] 이 왕국은 중앙 아시아에 있던 유목 부족이 카 스피 해 남동부의 산악 지대인 파르타바(Parthava, 길이 약 480km, 너비 약 192km)에 정착한 데에서 기원하였다. 이들 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페르시아의 왕인 다리우스 1세 (기원전 522~486)의 통치 시기에 반란을 일으켜 정복당 한 주민들로 등장한다(기원전 521). 그 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36~323)에게 정복된 다음 셀레우 코스 왕국(기원전 312~64)에 복속되었다. 기원전 300년 을 전후한 시기에 파르니(스키타이)족을 비롯한 몇몇 유 목 부족들이 이 지역을 침입하여 정복하고 현지민 문화 와 지역 방언(이란 사투리)을 받아들였다. 이들의 지도자 로 파르티아 왕국의 첫 통치자인 아르사케스 1세(기원 전 250~211)가 셀레우코스 2세(기원전 246~225)의 이집 트 원정 시기에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였으며(기원전 246), 동생인 아르사케스 2세(기원전 211~191)는 세력을 키워 기원전 237년경 셀레우코스 2세로부터 완전히 독 립하였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왕국과 밀고당기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점차 이란 북동부로 영토를 넓혀 갔다. 후에 프라테스 1세(기원전 181~174)와 미트라다테스 1세(기원전 171~138)가 셀레우코스 왕국을 침략하여 동 부의 박트리아 일부, 서부의 바빌로니아, 메대 등을 정복 한 뒤 왕국의 중심을 바빌로니아로 옮겼다(기원전 141). 아르타바누스 2세(기원전 128~124)와 미트라다테스 2세 (기원전 124~87)는 동쪽의 인도 북부와 서쪽의 아르메니 아 일부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파 르티아 왕국의 수도는 티그리스 강 연안의 크테시폰 (Ctesiphon)이었다 그리고 프라테스 3세(기원전 70~ 58/57)는 기원전 66년에 시리아 일대를 점령한 로마의 폼페이우스(G. Pompeius Magnus, 기원전 106~48)와 동맹 을 맺고 아르메니아에 대적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크라 수스(M.L. Crassus, 기원전 115?~53)가 야망과 탐욕을 품 고 동맹 관계를 깬 후 공격하자, 카르헤(Carrhe, 현 Harran)에서 대파하고 로마 군기를 빼앗았다(기원전 53). 이 로써 로마 제국의 동방 진출이 저지당하였고, 그 뒤 유프 라테스 강을 경계로 줄곧 밀고당기는 대치 상태에 놓이 게 되었다. 기원전 40년에는 파르티아의 파코루스 왕이 티레(Tyre)를 제외한 시리아-팔레스티나를 점령한 후, 유대 의 민속 영주(Ethnarchon)인 요한 히르카누스 2세(기원 전 ?~30)를 내쫓고 조카 안티고누스를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기원전 36년에는 로마의 안토니우스(M. Antonius, 기원전 82/81~30)가, 서기 62년에는 패투스(L.C.Paetus)가 파르티아 군대를 격파한 뒤 두 나라는 소강 상 태를 유지하였다. 그 후 로마 제국의 황제 트라야누스 (98~117)가 114~116년에 파르티아의 상당 부분을 점 령하였지만, 117년에 파르티아인들과의 전투에서 목숨 을 잃었다. 162년에는 로마의 베루스(L. Verus, 130~169) 장군이 파르티아 왕국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오랫동 안 서쪽의 로마와 북쪽의 유목민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잦은 탓으로 국력이 쇠퇴해진 파르티아 왕국은 결국 226년 남부 이란에서 사산 제국을 일으킨 아르다시르 1세(224~241)에 의해 패망하였다. 〔문 화] 파르티아는 시대에 따라 국력이 미치는 영역 이 일정치 않아 영토를 확정하기가 어렵다. 행정 제도는 종주국이었던 셀레우코스 왕국의 제도를 따랐는데, 부족 장 등 토착 귀족들을 각 지역의 봉신 왕으로 삼고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그리스어가 공식적인 행정 언어 가운데 하나일 정도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 았으나, 미술은 전형적인 '동방' 양식을 취하여 후일 이 란과 이슬람 미술의 토대를 이루었다. 한편 고유 문자를 갖지 못하고 그리스 문자를 쓰다가 변형된 아람 문자를 이용하여 글을 썼는데, 표의(表意) 문자가 많아 판독하 기가 어렵다. 기원전 1세기에 포도주 배급에 관해 적은 2,000여 개의 오스트라카(ostraca, 글씨 쓴 옹기 조각)와 양 피지가 발견되었으나, 남아 있는 문헌이 거의 없어 대부 분의 정보는 로마 등 서구 자료에서 얻을 수밖에 없다. 또한 당시에는 화폐도 발행하였는데(새겨진 연수는 기원전 247~서기 226), 형상은 주로 인물 초상이었다. 종교는 다 신교로서 태양신인 미트라(Mithra)나 물의 여신인 아나 히타(Anahita) 등을 널리 숭배하였으나, 후기로 갈수록 페르시아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주신(主神)인 아후 라마즈다(Ahura-Mada)를 가장 강력한 신으로 섬겼다. 파르티아는 절정기에 서쪽의 로마와 동쪽의 중국-파르티아의 중국식 이름은 안식국(安息國)이다-을 잇는 교역로(후대의 실크로드)를 장악하여 막대한 부를 쌓아 3 대 강국의 하나로 꼽혔는데, 그래서 당시 파르티아 내에 는 유대인은 물론 불교 신자들도 많이 거주하였다. 500 년에 걸친 파르티아 왕국은 근동의 고대 세계와 이슬람 을 잇는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하였다. [성서에서의 언급]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 때 참석 한 유대인 중에는 파르티아 사람들도 있었다(사도 2, 9). 이들은 아마도 파르티아 왕국에 거주하던 유대인이거나 접경 지역에 살던 유대교 개종자로 추정된다(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5. 2. 2. 14). 일부 학자들은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말과 말을 탄 천사들의 이야기에는 유프라테스 강 동쪽에서 수시로 침입하던 파르티아 군대의 흔적이 배어 있다고 주장한다(묵시 6, 2-7 : 9, 17-19 : 16, 12). (- 페르시아) ※ 참고문헌 M.J. Olson, (ABD) 5, PP. 170~171. 〔李鎔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