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아노 Fabianus(?~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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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아노.

파비아노.


성인. 순교자. 교황(236~250) 축일은 1월 20일. 파비아노는 파스카 목요일에 새로운 성유를 축성하는 관례를 도입하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교황으로서의 그 의 행적이나 그가 제정한 법령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 져 있지 않다. 그런데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Eusbius Caesariensis, 260/265?~339)가 저술한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와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 등에는 파비아노의 교황 선출과 관련된 신비한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파비아노는 짧은 기간(235. 11. 21~236. 1.3) 재임하 였던 전임 교황 안테로가 사망하였을 때 지방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신자들은 성당에 모여 신임 교황 적임자로 지목된 여러 인물들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파비아 노가 그 자리에 참석하였을 때조차 그의 이름은 전혀 언 급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흰 비둘 기가 날아와 그의 머리에 앉았고, 신자들은 그 광경을 보 면서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비둘 기 모양으로 나타났던 모습(마태 3, 16)과 유사하다고 생 각하였다. 그리고 이를 교황 선출에 관한 하느님의 의지 가 드러난 것으로 여기고, 그 자리에서 안수를 통해 파비 아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후 파비아노는 로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일곱 구 역으로 분할하였으며, 부제를 각 구역의 지도자로 임명 하여 공동체를 관리하게 하였다. 이에 대해 에우세비오 는 후임 교황인 고르넬리오(251~253)의 편지를 인용하 였다. 그에 따르면, 당시 로마에는 46명의 장로(신부), 7 명의 부제, 7명의 차부제, 42명의 시종, 52명의 구마자 가 있었고, 그 외에도 강경품과 수문품을 받은 이들이 있 었다고 한다. 또한 파비아노는 교회를 위협하는 각종 이 단 교리의 확산을 막으려 하였는데, 이를 위해 여러 추문 을 일으킴은 물론 교회를 파괴시킬 수 있는 교리를 주장 하여 이미 단죄를 받은 바 있는 아프리카 람베시스(Lambaesis)의 주교 프리바투스(Pivatus)를 파문하였다. 나아 가 오리제네스(Origenes, 185~253)의 사제 서품 무효를 재 확인한 교황 본시아노(230~35)의 뜻을 지지하였다. 파 비아노는 로마의 갈리스도 카타콤바 내에 주교들을 위한 묘역을 건설하였으며, 막시미누스 트락스(235~238) 황제 에 의해 대립 교황(217~25)이었던 히폴리토(Hippolytus, 170~236)와 함께 사르데냐(Sarlegna)로 유배되어 사망한 본시아노 교황의 시신을 236년에 이장하였다. 에우세비오의 《교회사》에 의하면 당시 로마 제국의 황 제였던 필립푸스(244~249)와 그의 아들은 그리스도교 신자였다고 한다. 또한 한 순교 전기(Acta Martyrum)에 따르면 파비아노가 황제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필립푸스 황제 치하에서 고 통을 당하였으며, 원로원 역시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더욱이 당시의 정치 · 경제적인 이유들, 즉 국경 지역에서의 로마 군대의 패배와 가중되 는 군사적 위협, 제국 내부의 물가고와 기근, 248년에 거 행된 로마 건국 1,000년 축제 등은 로마의 전통 종교 부 흥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광적인 증오심을 촉발시켰다. 필립푸스에 이어 황제가 된 데치우스(249~251)는 로 마 제국의 종교적 기초가 국가 의식을 거부하는 그리스 도인들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하고, 그리스도교의 근절을 통해 모든 제국 국민을 로마의 국교로 복귀시킴 으로써 국가의 내적 쇄신을 꾀하였다. 249년 12월 그리 스도인들에 대한 체포가 시작되었으며, 이후 교회는 총 일곱 차례에 걸친 잔인한 박해를 통해 파괴되었다. 이 박 해 기간 동안 데치우스 황제는 로마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칠 것을 지시하는 칙서를 발표하였으며, 이를 이행한 자들에게 증명서를 발부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을 효 율적으로 색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수많은 신자들이 배교 하였다. 파비아노의 사망 이후 이러한 배교자들을 교회 와 화해시키는 문제를 놓고 교회 내부에서 심각한 논쟁 이 벌어졌는데, 온건 노선을 취하였던 교황 고르넬리오 에 맞서 엄격주의를 주장하면서 대립하였던 노바시아누 스(Novatianus, 200?~?)에게 성품성사를 준 이가 파비아 노 교황이었다고도 하지만 이는 불확실하다. 데치우스 황제 치하의 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파비아노 역시 이때 순교하였다. 교황의 시신은 갈리스도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성 세바스티아 노 대성전으로 옮겨졌으며, 1915년에 그의 이름이 적힌 무덤이 발견되었다. 1- 노바시아누스) ※ 참고문헌  Histoire des Papes, Paris, Administration de Librairie, 1842, vol. I, pp. 238~2391 E.G. Weltin, 5, 2003, p. 5841 G. Schwaiger, 《LThK》 3, pp. 1331~1332/ P. Godet, 《DTC》 5, pp. 2050~2051/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p. 16~17/ A. Franzen,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 출판사, 2001/ Rudolf Fischer-Wollpert, 안명옥 역, 《교황 사전》, 가 톨릭대학교 출판부, 2001. [邊琪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