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올라 Fabiola(?~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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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성녀. 초기 교회의 기부자. 성 예로니모(Hieronymus, 347~419)의 친구. 축일은 12월 27일. 로마의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인 파비올라의 결혼 생 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녀는 첫 남편이 너무 방탕한 생 활을 하자 이혼을 하고 곧 재혼하였다. 그러나 이는 교회 의 허락 없이 이루어진 일이었기에 당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스캔들이었으며, 그로 인해 파비올라는 교회 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라테란 대성 전에서 부활 성야 때 주교와 성직자들 앞에서 공적인 참 회를 하였고, 그로 인해 교황 시리치오(384-399)로부터 성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이탈리아에 있는 수도원들을 지원하였다. 395년에는 친 척인 오체아노(0ceanus)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여행을 떠 났고, 그곳에서 성녀 바울라(Paula, 347~404)와 그녀의 둘째 딸인 에우스토키움(Eustichiun, +419?)을 만나 함께 머물렀다. 그리고 이곳에서 예로니모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그런데 오리제네스주의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자 파비 올라는 예로니모의 주장에 반대하는 루피노(T. Rufinus, 345~410)가 지지한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Joannes, 386~ 417)의 주장을 옹호하였고, 그로 인해 바울라와의 친분 이 끊어졌다. 비록 그녀가 예로니모의 공동체와 깊은 관 련을 맺고 있었으나, 금욕주의를 엄격히 실행하던 이 공 동체에 속하지는 않았다. 또한 베들레헴에서 머무는 동 안 성서 공부를 통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핵심은 이 웃 사랑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훈족의 침입과 교회 구성원 간의 신학 논쟁에 염증을 느낀 파비올라는 396년 로마로 돌아와 자선 사업에 헌신하였다. 그녀는 원로원 의원이었던 팜마키오(Pammachius)와 함께 포르 토(Portus)에 자선 병원(xenodochium)을 세웠다. 이 병원 은 서양 최초의 가톨릭 병원으로 여겨지며, 이곳에서 그 녀는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직접 돌보았다. 이 병원은 아마도 예로니모가 베들레헴에 세운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모범으로 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파르티아(Parthia)에서 브리튼(현 영국)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해졌 다. 로마에서 활동하는 동안 파비올라는 예로니모와 수차 례에 걸쳐 서한을 교환하였다. 이 서한에는 초대 교회에 관한 귀중한 정보들이 들어 있는데, 특히 397년에 작성된 예로니모의 64번째 서한에는 당시 고위 성직자들 복장의 신비적인 의미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다. 또한 78번째 서 한에는 그녀의 자금으로 만들어진 사막의 이스라엘 사람 들을 위한 42개 숙소(mansiones)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파비올라는 399년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장례식에는 로마의 모든 사람들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그녀는 가장 큰 은인이었 기 때문이다. → 바울라 ; 예로니모) ※ 참고문헌 E.D. Carter, 5, p. 585/ W.H. Tremantle, A Dictionary ofChristian Biography, H. Wace · W.C. Piercy, Hendrickson Pub., 1994, pp. 61~362/ J.P. Kirsch, V, 2003 [편찬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