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살리아, 카를로 Passaglia, Carlo(1812~1887)
글자 크기
11권
신학자. 교회론 저술가. [생 애〕 1812년 5월 9일 이탈리아 루카(Lucca) 시에 서 가까운 피에베 산 카를로(Pieve San Carlo)에서 태어난 파살리아는 15세 때인 1827년 11월 예수회에 입회하였 으며, 1827~1837년에 콜레조 로마노(Collegio Romano, 현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 였다. 이 대학에서 그를 가르쳤던 교수들은 당대의 유명 한 신학자들로, 이전과는 달리 스콜라학이 신앙심을 발 전시키는 데 필요하지만 신학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 은 아니라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교수들에게서 배운 파살리아는 신학에 있어서 다원주의적인 입장을 갖 게 되었다. 교수들 중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는 교의를 바탕으로 성서와 교부들의 연구를 통해 새로운 길 을 개척한 페로네(G. Perrone, 1794~1876)였다. 파살리아는 1840~1844년에 독일 기숙사의 신학생 학문 담당 주임을 지냈고, 레조 넬에밀리아(Reggio nell'Emilia)에 있는 예수회 신학교에서 교회법, 수학, 물리학 등을 강의하였다. 33세가 되던 해인 1845년에 그는 콜 레조 로마노의 교의 신학 교수가 되었으나, 1848년 봄 로마는 여러 가지 정치적인 시위로 혼란스러웠고 예수회 역시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에 과도하게 관련되어 시위의 탄핵 대상이 되었다. 이 같은 상황은 교황 비오 9 세(1846~1878)의 예수회에 대한 호감을 약화시켰고, 이 러한 분위기로 인해 예수회 회원들은 다른 나라로 피신 을 갔다. 파살리아 역시 영국, 벨기에, 프랑스를 떠돌아 다녔고, 당시 영국에서 성공회로부터 개종한 뉴먼(J.H.Newman, 1801~1890)을 알게 되었다. 1850년 로마로 되 돌아온 파살리아는 1857년까지 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하 였는데, 이 기간은 그의 학문 활동에 있어 최고의 절정기 였다. 그는 로마 신학자들을 대표하여 제1차 바티칸 공 의회(1869~1870)의 준비위원으로 발탁되어 성모 마리아 의 원죄 없는 잉태 교의를 확정하는 데 공헌하였고, 이 시기에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평생 동정인 하느님의 어 머니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하여》(De immaculato Deiparae semper virginis conceptu, vols. 3, Roma, 1854)를 저술하 였다. 이러한 공헌으로 교황 비오 9세의 호감을 얻고 친 분을 갖게 되었다. 1850~1857년 사이에 그의 신학서가 시리즈로 출판 되었는데, 이 중에서도 특히 《베드로의 특권에 대한 주 석》(Commentarius de praerogativis beati Petri, 1850)과 《그 리스도의 교회론》(De Ecclesia Christi, 1853~1856)이 유명 하다. 왕성한 학문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회 내에 서 총장이나 장상들과 갈등 및 긴장 관계에 있었는데, 주 된 이유는 그의 강의 방식 때문이었다. 장상들의 우려는 철학과 해석학, 비판적 방식을 신학 강의에 채택한 파살 리아의 강의가, 교회의 교의를 올바로 알려 주지 못한 채 신학생들을 졸업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장상들은 그에게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 1274)의 전통적인 방법을 강의에 적용하라고 요구하였 고, 이러한 긴장 관계는 더욱 심해졌다. 1857~1861년 에 파살리아는 위장병과 암에 걸려 생사를 헤매게 되었 고, 치료를 위해 마르케(Marche) 지방으로 휴양을 떠났 다. 1958년 로마로 돌아온 그가 다시 강의를 하려고 하 자 장상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교황 비오 9세의 호의 로 1858~1859년에 로마 국립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 하였다. 결국 1859년 1월 예수회를 퇴회한 그는 교구 신부로 입적하였고, 처음에는 영국 기숙사에서 머물다가 후에는 팔라초 스파다(Palazzo Spada)로 거처를 옮겼다. 여기서 그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 활동하는 해방주의자들과 접촉하였다. 특히 카보우르(Cavour, 1810~1861) 백작은 1859년에 그를 토리노(Torino)로 초빙하여 대화를 나누 었고, 이후 파살리아는 통일 운동(Risorgiment의 정치 분야에 개입하여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로마에서 많은 강연을 하였다. 1860년에는 로마 문제 연구위원회 위원 으로 임명되었으며, 1861년까지 카보우르 백작 가문과 교황청 사이에서 중재자로 활동하였다. 1860년 파살리 아는 <교황권과 수위권>(Ⅲ Pontifice e il Principe)이라는 글을 통해 세속 정치권의 상대적 필요성을 지지하면서 교황권이 우선적으로 이익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 다. 그러나 중재 노력이 실패하자, 그는 1861년에 이탈 리아 국가 건설을 위해 성직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책 《가톨릭의 주교들에게 이탈리아 문제를 위하여》(Pro causa italica ad episcopos catholicos, Roma, 1861)를 익명으로 출판하여 교황권이 세속권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 장하였다. 이 책으로 교황청과 문제가 생기자 그는 로마 를 떠나 토리노로 이주한 뒤 토리노 대학에서 윤리 철학 을 가르쳤다. 1862년에는 9,000명의 이탈리아 신부들 의 서명을 받아 교항 비오 9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마 를 이탈리아의 수도가 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였 으나, 이 해 10월에 그와 서명을 한 사제들은 교황청으 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1862년 토리노에서 그는 일간지 인 <평화>(La Pace, 1864)와, 격주간으로 간행되는 정 치 · 종교 · 과학 · 문학을 취급하는 잡지 <중개자>(Ⅱ Mediatore, 1866)를 간행하였다. 1863~1864년에 파살리아는 토리노의 의원이 되어 활동하였고, 교황에게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무 집행 정지를 받았으며, 그의 저서들은 금서 목록에 포함 되었다. 그는 사제직을 떠났어도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잊지 않았으며, 특히 교회의 교리에 충실하였다. 그는 교 황 레오 13제(1878~1903)가 발표한 회칙 <영원하신 아 버지>(Aetemi Patris, 1879. 8. 4)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담긴 《영원하신 아버지, 레오 13세의 회칙을 따른 성 토 마스의 가르침에 대하여》(Aetemi Patris : Della dottrina di S. Tommaso secondo I'enciclica di Leone XIII, 1880)를 발표 하는 등, 1868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많은 저술 을 통해 교회와의 화해를 시도하였다. 파살리아는 얀센 주의와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교회 조직에 혁신 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교황의 권위에 반 대하였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였고, 결국 1887년 3월 8일 교회로부터 화해를 얻어냈다. 그리고 4 일 뒤인 12일 토리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신학 사상과 교회론] 1860년 이전의 교회 상황은 토 마스 아퀴나스의 사상만 중시하는 경향 때문에 근대 세 상의 요구에 경직되어 있었다. 다혈적이며 자유 분방한 파살리아의 성격은 정치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잘 나타난 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페타비오(Petavius, 1583~ 1652)만이 아니라 헤겔(G.W.F. Hegel, 1770~1831)과 칸트 (I. Kant, 1724~1804) 등 독일 철학도 연구하였고, 그의 스 승 페로네처럼 성서와 교부학을 연구하여 이 모든 것을 신학에 적용시켰다. 그러나 페로네의 신학은 이전부터 기존의 가톨릭 교회의 호교론을 재확인하기 위한 것이었 고, 이에 파살리아는 신학이 호교론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을 비판하였다. 다른 학문들처럼 신학 역시 자체의 독 립성과 존엄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이러한 신 념을 갖고 성서나 교부들의 저서를 연구하여 신앙 진리에 기반을 둔 신학 사상을 구축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신학 적 경향은 당시의 신학 풍토에서는 참신한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신학은 두 가지 과제, 즉 분석적이며 종 합적인 면을 가져야 하였다. 분석적인 면에서 신학은 당 시까지 전해 온 전통을 따라야 한다. 스콜라 신학 역시 예외적이어서는 안 되고,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도 없다. 그러나 계시된 각각의 진리를 서로 분리하여 보아서는 안 되며, 종합적인 안목에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안 에서 신적 아이디어, 즉 로고스(Logos) 자체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철학은 신학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등장하게 된다. 신학의 이러한 기능은 스콜라 신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1844~1848년 사이에 그의 신학 사상은, 신앙의 객관적인 규범은 하느님의 말씀에 있고 이 하느님 말씀의 구체적인중개자는 교회라는 것에 집 중된다. 결과적으로 그의 신학 대부분은 교회에 대한 사 상으로 형성되었다. 한편 교회론에 대한 그의 저서인 《그리스도의 교회론》은 이전의 교회론과는 다른 획기적 이며 새로운 전환점을 보여 준다. 첫 장부터 교회의 개 념을 정의하는 이 저서를 통해, 파살리아는 그 개념을 법률이나 사회적 정의에서 찾지 않고 성서에서 찾으려 고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모든 성서적 비유, 예를 들면 교회를 상기시키는 왕국, 성전, 신비체 개념 등을 분석 · 정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징어들을 어떻게 살아 있는 전승 속에 적용할 수 있는가를 고심하 였다. 그에 의하면 교회의 본성은 신적인 동시에 인간적 인데, 신적인 것은 영원한 것이므로 변화시킬 수 없으 며, 인간적인 것은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 한 교회의 두 가지 본성 관계에 대한 해명을 위해 노력 하였다. 이 관계가 해명되면, 왜 교회가 성스러운 동시 에 죄인인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인간으 로 구성되어 있지만, 인간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하더 라도 교회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 교회의 인간적 측면 이나 조직적 측면을 신성화시켜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 고 해서 오점 없이 새롭게 구축되는 유토피아적 교회를 믿어서도 안 된다. 파살리아에 의하면, 교회의 존재 목적은 일정한 백성 (그리스도인)만을 껴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를 껴안는 구원의 역사(historia salutis) 속에 있다. 이러한 그 의 사상에서는 교부들의 영향을 볼 수 있는데, 교회의 본 질은 성령을 통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흐르는 사랑의 영원한 순환에 있으며, 모든 인간은 바로 이 사랑의 순환 과 충만한 화해에 참여하기 위해 초대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교회론에서 교회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개념 이 명확히 드러난다. 파살리아는 결과적으로 교회를 세 상과 분리하여 경계지을 수 없고, 조직체로서의 교회(그 리스도인)를 그 조직 밖에 있는 비그리스도인으로부터 분 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교회는 역사적이고 가시적인 차원에서 아버지가 원하였던 화해의 수단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봉사하고 모든 이를 위해 존재하게 해 야 하며, 하느님 백성들의 갈망을 받아들이는(껴안을 수 있는) 모성적 이미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확언하였다. 그래서 그는 교회가, 철학의 새로운 종파에서 흔히 볼 수 있듯 단지 진리의 위탁소라는 경직된 이미지를 거부하 며, 교회론을 다른 신학 분야와 연관지어 분석하는 것 외 에도 자신의 사상을 교회의 구원 경륜적인 개념에 기반 하여 진행시키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성 령 중심적인 전망이 서로 긴밀히 연결 · 종합된 삼위 일 체 사상에 입각한 교회론이다. 다시 말해 그의 교회론은 삼위 일체적이다. 교회는 삼위 일체로부터 나온다. 즉 아 버지로부터 태어나 아들의 선교를 위해 존재하고, 역사 를 통해 이 선교를 계속하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연장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교회 일치는 바로 신적 삼위의 일치에 기반한다. 파살리아의 교회론에서는 법률상의 교 회와 역사 안에서 계속 발전하는 성령적 교회론의 종합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계속적 육화' (Incarnatio continuata) 사상과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신 비체' (Mystici Corporis Christ)로서의 두 본성은 그에 의 해 종합되었다. [평 가] 예수회에서 퇴회한 후 교황청과 불편한 관계 에 있던 시기에 파살리아는 특히 교황 지상주의(Uliramontanismus)에 대항하였고, 평신도의 특수한 역할을 강 조하였다. 또한 교황권에 집중된 절대 군주제적인 교회 모델에 반대하는 반면, 주교들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권 한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의 신학 사상, 특히 교회론은 당시 로마 학파의 신학자들과 그레고리안 대학의 제자들 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그의 교회론 은 더욱 심화되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파살리아의 교회 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교회론에도 크 게 공헌하였다. → 교황 지상주의 ; 교회 ; 교회론 ; <영 원하신 아버지>) ※ 참고문헌 I. Biginelli, Biografia del sacerdote c. Passaglia, Torino, 1887/ A. Della Torre, Il Cristianesimo in Italia daifilosofisti ai modermisti, Palermo, 1913/ S. Heribert, Carlo Passaglia und Clemens Schrader, Roma, 1938/ -, Die Einwohmms des Heiligen Geistes, Freiburg, 1941/ M. Valent, Bibliografia di C. Passaglia, Rassegna storica del Risorgimento 30, 1943, PP. 253~2551 P. Pirri, Pio Ⅸ e Vittorio Emmanuele II e il loro carteggio privato, I-II, Roma, 1951/ G. Filograsi, Teologia e filosofia del Collegio Romano, Gregorianm 35, 1954, PP. 512~540/ C.G. Arvalo, S.J. Some aspects of the theology of the mystical body of Christ in the ecclesiology of Giovanni Perrone, Carlo Passalia e Clemens Schrader. Theologian ofthe Roman College in the mid Nineteenth century, Roma, Pontifica Università Gregoriana, 1959/ W. Kasper, Die Lehre von der Tradition in der Römischen Schule, Freiburg · Basel . Wien, 1962, Pp. 173~200/ M. Tedeschi, Cavour e la questione romana 1860~1861, Milano, 1978. [李再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