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카시오 라드베르토 Paschasius Radbertus(785~~66?)
글자 크기
11권
성인. 아빠스. 성체성사에 대한 카롤링거 왕조 시대 (750~887)의 신학자. 축일은 4월 26일. [생 애] 785년경 프랑스의 수아송(Soisons)에서 태어 난 파스카시오는 갓난아이 때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베네 덕도회 수녀원에서 양육되었다. 청년이 된 후 아미앵 (Amiens) 근처에 있는 코르비(Corbie)의 베네딕도회에 입회하였다 당시 아빠스는 아달라르(Adalard, 814~821)였 는데, 그는 파스카시오의 개인적 스승이었으며, 후에 파 스카시오는 그의 전기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성서와 교 부들의 저술에 대하여 깊이 있게 공부한 파스카시오는 부제 서품을 받았다. 822년에 파스카시오는 독일 동부의 베스트팔렌(Westfalen) 지역에 새로운 코르비 수도원을 설립하기 위해 아 달라르를 따라 작센(Sachsen) 지방을 탐방하였다. 그리 고 신설된 수도원에서 수련자들 담당과 수도원 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그는 아달라르를 포함하여 4명의 아빠스 들을 보필하였는데, 마침내 이삭(Issac)의 뒤를 이어 843 년경 코르비 수도원의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아 빠스가 된 후에도 부제로 머물고 사제 서품을 받지 않았 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신부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겸 손함 때문이었다. 그는 847년의 파리 교회 회의에 참석 하였으며, 849년의 키에르지(Quierzy) 교회 회의에도 참 석하였다. 7년간 아빠스로 재임하는 동안 몇 차례의 내 부 의견 분열과 개혁 추진에 대한 반대를 겪었다. 결국 851년경 스스로 아빠스직을 사임하고 생리키에(SaintRiquier) 수도원에 머물며 학문과 저술 활동에만 전념하 였다. 그는 말년에 코르비에서 생활한 것으로 여겨지며, 860년경 세상을 떠났다. [저서와 사상] 파스카시오의 저술로는 마태오 복음서 의 12장을 주석한 《마태오 복음 주석》(Expositio in Evangelium Matthaei)과 《시편 44편 주석》(Expositio in Psalmum XLIVI), <애가 5장 주석》(InThrenos sive Lamentationes Jeremiae libri V) 등이 있다. 또한 그의 스승인 아 달라르의 전기(Vita S. Adalardi)와 그의 후임자인 왈라 (Wala)의 전기(Vita Walae, Epitaphium Arsenii)도 저술하 였는데, 특히 후자의 내용은 사료적 가치가 뛰어나다. 교 의에 관한 저술로는 《믿음, 희망, 사랑에 관하여》(De fide, spe et caritate)가 있다. 그리고 《성모의 출산에 관하 여》(De partu Virginis)는 성모 마리아가 평생 동정이었음 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 예로니모(Hieronymus, 347~419)의 편지로 알려졌지만 학자들에 의해 파스카시 오의 저술로 평가받는 <편지 9>(《PL) 30, 122~142)는 성 모 마리아의 승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 문서는 교 의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며, 중세에 그리스도론적 논 문에서 자주 인용되었다. 파스카시오의 가장 중요한 저서는 《주님의 몸과 피》 (De corpore et sanguine Domini)인데, 831년에 초고를 완 성하고 844년에 개정한 판본을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2 세(843~877)에게 헌정하였다. 샤를 2세는 이 책을 받은 후 코르비 수도원의 라트람누스(Ratammus, ?~868?)에게 책 내용을 비판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풀다(Fulda) 의 수도원장인 라바누스(Rabanus Maurus, 780?~856)가 개 입하면서 역사상 최초로 성체성사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 으며, 이 논쟁은 16세기의 칼뱅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칼뱅주의자들은 파스카시오의 주장을 적극 적으로 반박하였는데, 그 이유는 《주님의 몸과 피》에 성 변화(conscratio)를 설명하는 실체 변화(transsubstantiatio)에 가톨릭 교의의 뿌리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파스카시오는 이 책에서 교부들의 전통에 입각하여 실 체에 관한 포괄적인 해설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성체와 현실적인 육체의 일치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이 두 가지 양상의 차이를 명확히 밝히는 데에는 실패하 였다. 그의 주장에 대해 라트람누스는, 예수의 성체는 영 적 존재 양상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 않는 실체' 라고 보 고, 인간의 눈으로는 빵의 형상으로 드러나는 성체를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파스카시오가 왜 이에 관해 충분 히 설명하지 않았는지 그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 으나, 그의 개인적 신앙 체험이 그가 이러한 확신을 가지 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비판자들은 파스카시오가 형상(figura)과 진리(veritas)에 대한 명확한 구분에 실패 하여 성체의 상징적 개념과 현실적 개념을 구분 없이 함 께 사용하였다고 여기나, 이러한 비판에는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파스카시오는, 형상은 인간의 감각 기관으로 파악되는 외형적인 것이고, 진리는 믿음이 인간에게 가 르쳐 주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그도 비판자들 처럼 전통 교리를 바탕으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후에 교황 실베스테르 2세(999~1003)는 《주님의 몸과 피》De corpore et sanguine Domine)라는 동명의 저서를 통 해 그의 이론에 오류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성체에 관한 논쟁은 신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 쳤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감각적 외형을 구분함으로써 빵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성체의 심오한 의 미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파 스카시오의 이러한 논증을 통해 성체 변화의 개념이 보 다 명확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의 주장에 반대한 라트람누스에 대한 올바른 평가이 다. 비록 그가 파스카시오의 본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측면이 있지만, 파스카시오와 라트람누스의 논쟁은 교회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과적으로 볼 때 파스카시오의 주장은 가톨릭 교회의 성체 변화에 대한 공식적인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라트람누스의 주장은 프랑스의 종교 개혁가인 칼뱅(J.Calvin, 1509~1564)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적인 느낌을 주 는 그리스도의 영적 현존과 상징성에 관한 논리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교의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 이 논쟁 이 가톨릭 교회 가르침의 핵심 중 하나인 성체의 개념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이끌어냈다는 점만으로도 높이 평가 될 만하다. 파스카시오가 제기한 다음의 네 가지 질문은 오늘날에 도 여전히 유효하다. 즉 성체와 실존한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무엇인가, 여러 다른 장소에서 여러 번 미사가 봉 헌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성체가 동시에 실재할 수 있는 가, 성체 축성 이후의 빵과 포도주는 그 이전의 것과 무 슨 차이가 있는가, 상징과 그 상징이 지시하는 사물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등이다. 샤를 2세가 파스카시오의 책을 읽고 의문을 가진 것은 이 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질 문과 관련된 것이었다. 라트람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샤를 2세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하였다. 첫째, 신자가 미사 때 받아 모신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 과 피가 되는 것이 신앙의 신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둘째, 그 성 체가 성모께로부터 태어나서 고난받고 죽으셨으며 묻히 신 바로 그분인가? 파스카시오는 성체를 단순한 상징이 아닌 역사적으로 존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이 는 사실 논리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어 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체로서 여러 장소에 동시 에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파스카시오는 이 문 제의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하느님의 창조 섭 리에서 찾았다. "사람들이여, 놀라지 마라. 그리고 여기 에서 자연의 질서를 논하지 마라. 성령의 힘으로 성모 안 에서 몸이 원죄 없이 잉태되었듯이, 성령의 힘으로 그리 스도의 말씀 또한 성모의 몸에서 나온 것과 같은 몸이 되 는 것이다." 그래서 성체는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이며 단지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그 본질이 가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라트람누스는 성체를 이처럼 육체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는 빵과 포도주가 존재론 적으로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뀐다기보다는 다른 것이라고 명명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빵과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 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일 뿐이지만,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영적으로 들어있는 것이라고 주장 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서 츠빙글리(U. Zwingli, 1484 ~1531)와 같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만찬의 상징적 기념물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었 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 아우구스티노(Augustimus Hipponensis, 354~430)의 성체에 대한 상징적 이해 관점을 받아 들인 것이다. 파스카시오 역시 아우구스티노의 성체에 대한 이해를 받아들여 보이는 성체와 보이지 않는 성체 를 구분하였지만, 사실상 암브로시오(Ambrosius, 339~ 397)의 이론을 받아들여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성체 안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동일시하게 된 것이다. (- 성변화) ※ 참고문헌 R. Grégoire, XII-1, PP. 295~301/ H. Peltier, (DTC) 13, pp. 1628~1639/ K. Vielhaber, 《LThK》 8, PP. 130~131/ N.M. Haring, 10, 2003, p. 918/ 《ODCC》, p. 12271 K.-G. Wesseling, Biographion-Biblogropiokr Kirchenlexikon, Bd. VII, pp. 1390~1394. 〔李種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