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토르, 루트비히 폰 Pastor, Ludwig von(1854~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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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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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가. 교황사학자로서 교황청 소장 문서들을 이용하여 교황 마르티노 5세(1417~1431)부터 비오 6세(1775 ~1799)까지를 연구한 저술로 유명하다. 〔생애와 활동] 1854년 1월 31일 독일 북서부의 아헨 (Aachen)에서 루터교 신자인 아버지 프리드리히 루트비 히 다니엘 파스토르(Friedich Ludwig Daniel Pastor)와 가 톨릭 신자인 어머니 안나 시빌라(Anna Sibylla Onnau)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파스토르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화학 약품과 염료를 다루는 가게를 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 난 직후인 1864년에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1870년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언어학과 문헌학적 소양을 쌓았으며, 이 김나지움의 역사 교사이자 독일의 가톨릭 역사가인 안센(Johannes Janssen, 1829~1891)을 통해 역사 방법론과 원자료를 대하는 교육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얀 센은 파스토르가 역사학을 향한 열정을 발견하도록 유도 해 주었다. 1873년 파스토르는 교황사학자인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의 주요 저서 《최근 4세기 간 의 교황들의 역사》(Die romischen Paipste in den letzten vier Jahrhunderten, 전 3권, 1834~1836)를 정독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16~17세기 가톨릭 교회의 부흥에 대한 그의 관 심이 촉진되었다. 그는 1875년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루뱅(Louvain) · 본(Bon) · 베를린(Berlin) · 빈(Wien) 대 학교 등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1878년 그라츠(Graz) 대 학교에서 역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회사에 관심이 있던 파스토르는 이탈리아에 소장된 다양한 문서들을 연구하였으며, 교황청의 문서들을 검토 할 수 있는 허가를 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교황청에 서는 학자들에게 1870년 이전의 한정된 자료만 개방하고 있었다. 이에 파스토르는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탄 원과 호소의 서한을 보냈고 그의 끈기와 노력은 결실을 맺어, 1879년에 마침내 교황 레오 13세(1878~ 1903)로부 터 열람 특권을 받았다. 그 후 1883년에 교황은 열람 제 한을 폐지하였는데, 이러한 허용 조치는 파스토르의 영향 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파스토르는 연구와 저술 및 교육에 헌신하면서 인 스브루크(Innsbruck)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1881~1901) 중이던 1882년에 본의 시장인 카우프만(Leopold Kaufmann)의 딸 콘스탄체 마리아(Constanze Maria)와 결혼하 여 두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낳았다. 하지만 1883년 정치적 압력으로 무급 조교수가 되었다가 1887년 다시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1889년 뢰벤(Löwen) 대학교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891년 교직 심사 위 원회에서 역사 부문 감독관이 되었다. 1899년에는 궁중 고문관이라는 직책을 받았으며, 1911년과 1914년에 브 레슬라우(Breslau, 현 폴란드의 브르추아프)와 인스브루크 대학교에서 명예 신학 박사 학위를 받는 등 수많은 명예 칭호와 훈장을 받았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황제에 의해 세습 귀족 계급의 지위에 올랐다. 1901년에는 로마에 있는 오스트리아 역사 연구소장으로 임명되었고, 1915 년 전쟁으로 로마를 떠났으나 1921년에 교황청 주재 오 스트리아 대사로 임명되었다. 파스토르는 로마에 머물면 서 학문적인 저술 활동뿐만 아니라 교회와 정치 사이의 조정 역할도 하였다. 그는 말년에 병을 앓다가 1928년 9월 30일에 인스브루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 술〕 파스토르는 많은 서적과 논문을 저술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중세 말 이후의 교황사》(Geschichte der Paipste seit dem Ausgang des Mittelalters, 1886~1933) 가 있다. 총 16권으로 간행된 이 책의 제1권은 1886년 에 발행되었으며 그의 생전에 제12권까지 발행되고, 이 후 4권은 그가 세상을 뜬 후에 발행되었다. 유럽의 각국 언어로 번역된 이 책은 55명의 교황을 다루고 있는데, 교회의 개혁을 드러내려는 목적으로 저술된 것으로 랑케 와 영국 성공회의 역사가이자 성직자인 크레이턴(Mandell Creighton, 1843~1901) 주교의 저술들을 능가한다. 또한 문서화된 교황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작품 으로 평가받고 있다. 파스토르는 교황의 내면 생활을 정 치적 · 문화적인 경향과 적절히 조화시켜 소개하였는데, 방대한 자료를 모자이크식으로 선별한 것에 대해 초기에 는 맹렬한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오직 가톨릭만 이 교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다는 그의 신념도 도전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대작에 기술된 어조 는 온건하며, 변증론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가 당시 까지 사용되지 않던 원사료들을 풍부하게 제공하고, 또 15~18세기의 교황들에 대해 박학다식하고 포괄적으로 설명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저서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의 또 다른 주요 저서는 스승인 얀센과의 공저인 《중 세 말기 이후의 독일 민족사》(Die Geschichte des deutschen Volkes seit dem Ausgang des Mittelalters)이다. 총 8권으로 1893~1926년에 걸쳐 발행된 이 저서는 얀센이 시작한 것을 파스토르가 완성한 것으로, 종교 개혁 시기의 독일 역사를 다루고 있다. 파스토르는 얀센의 사망 이후 마지 막 2권을 저술하였으며, 얀센을 기리는 2권의 전기 (1892, 1929) 및 그의 서한들을 수집 · 발행하였다(1920)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전기도 발행하였으며(August Reichensperger, Max von Gagern, Viktor Dankl), 교회사와 관련된 여러 저술들도 펴냈다(Die Korespondenz des Kardinals Contarini während seiner deutschen Legation 1541, 1880 ; Allegemeine Dekrete der Römiscchen Inquisition aus den Jahren 1555~1597, 1912 ; Katholische Reformatoren, 1924) . [영향 및 평가] 교황 비오 10세(1903~1914) 시대를 대 표하던 반(反)근대주의적인 정신과 가톨릭으로의 통합주의(Integralismus)에 있어서 파스토르의 영향력은 절정 에 달하였다. 그러나 교황 베네딕도 15세(1914~1922) 때 에 교황청에서 특권을 누리는 위치에 있었지만, 비밀리 에 이루어졌던 이탈리아 파시즘과 교황들의 협의에 대하 여 더 깊이 통찰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청년 시절부터 흔들리지 않는 교회적인 성향으로 교황청과 연계되어 있던 파스토르는 당시의 가톨릭 정신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로 인해 당시에 지배적이던 자유주 의 정신을 인정하지 않았고, 반근대주의자 소송에서 가 혹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교황사의 내용이 나 자료 선별 방식에 있어서 편파성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학자적 개성이 돋보이는 생생한 교황사 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교황사는 방대한 가톨릭 학문 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널리 인정받고 있다. (- 랑케, 레오폴트 폰) ※ 참고문헌  J.T. Covert, ANCE》 10, 2003, Pp. 937~9381 Alfred A. Strnad, (TRE》26, pp. 46~49. [梁蕙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