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치오 Patricius(389? ~493)

글자 크기
11
성 파트리치오.

성 파트리치오.


성인. 주교. 아일랜드의 사도이자 수호 성인. 영어식 이름은 패트릭(Patick). 축일은 3월 17일. [생 애] 파트리치오는 스코틀랜드 던바턴(Dunbarton) 근처 킬패트릭(Kilpariic)에서 389년경 태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할아버지는 성직자였으며, 그로 인해 한 때 부제 생활을 하였던 파트리치오의 아버지는 지방 의 회 의원(decurio)인 귀족 칼푸르니오(Caphumius)이고, 어머니는 콘체사(Concesa)이다. 16세가 되던 해에 파트 리치오는 아일랜드인들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려가 북아 일랜드의 앤트림(Antim)에서 6년 동안 양치기 생활을 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열정적인 신앙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꿈 속에서 천사의 목소리를 듣고 용기를 내어 탈출한 그는 200마일이 넘는 길을 헤맨 끝에 킬랄라 (Kilala) 만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항해 준비를 마치고 있던 배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왔다. 파트리치오는 자신이 경험한 노예 생활이 앞으로의 사 도직을 위한 하느님 섭리의 준비 기간이자, 신자이면서 도 세속적인 젊은이였던 자신의 회개를 위한 계기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이 경험을 통해서 아일랜드에 신 앙을 전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겨나 소명으로 자라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명에 따라 그는 갈리아(현 프랑스) 지 방으로 가서 오세르의 제르마노(Gemanus Antisiodorensis, 378?~448) 주교를 찾아가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으 며 4년 동안 머물렀고, 그로부터 성품성사를 받았다. 당 시 제르마노는 교황으로부터 브리튼(현 영국)에 남아 있 던 이단인 펠라지우스주의(Pdalgimincoo)에 맞서 교회의 신앙을 옹호하라는 임무를 맡았는데, 그는 이 임무의 달 성을 위한 동료로 파트리치오를 선택하였다. 한편 파트리치오는 아일랜드를 회개시키려는 열망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교황청으로부터 그 임 무를 받았다. 431년 교황 철레스티노 1세(422~432)는 그리스도를 믿는 아일랜드인들을 위한 초대 주교로 팔라 디오(Palladius)를 임명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사망하자 파트리치오는 주교품을 받고 팔라디오의 후임자로 435년 3월 아일랜드에 도착 하였다. 그는 지방 영주들의 보호를 얻어내어 주로 아일 랜드의 서쪽과 북쪽 지역 전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 데, 그곳은 복음이 처음 전해지는 곳이어서 파트리치오 는 많은 곳을 돌면서 수많은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주었 다. 당시 아일랜드는 로마와는 달리 도시의 형태가 성립 되지 않은 곳이었으므로, 그는 수도원의 형태에 가까운 참사회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주교좌 성당들을 세웠다. 초기에는 신부들을 갈리아나 브리튼에서 데려왔으나, 점 차 현지인들 가운데에서도 사제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또한 수도승이나 수녀가 되려는 이들도 많아졌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수천 명을 개종시켰고, 여러 곳에 성당들을 건축하였다. 그가 만든 이러한 형태 의 수도원 성당은 지중해 해안을 따라서 널리 퍼졌다. 파트리치오는 아일랜드에서 활동하던 40년 동안 많은 위험을 겪으며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강 력한 반대 세력은 자연 종교 형태의 드루이드(Druid)였 다. 또 브리튼과 아일랜드의 사제들 중에는 파트리치오 가 직위를 위한 직위를 추구한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 었다. 특히 브리튼의 고위 성직자들이 이 비판에 동조하 자, 그는 자신의 '고생스러운 주교직' 으로 겪은 사건들 을 환기시키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그는 적어도 한 번 옥 에 갇혀 고생을 하였고, 브리튼의 영주 코로티쿠스(Coroticus)가 아일랜드를 공격하여 그가 개종시켜 세례를 준 이들을 죽이고 일부는 노예로 팔아 넘기는 일도 겪어야 하였다. 그로 인해 파트리치오는 코로티쿠스의 파문을 요구하였다. 복음을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면서도 이교인 들을 차별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항상 순교의 위험 속에 서 생활해야 하였다. 많은 기적을 보였던 그는 처음으로 성당을 지은 아일랜드의 다운패트릭(Downparick)에서 493년 3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파트리치오가 남긴 글로는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 을 기록한 영적 자서전인 <고백록>(Confessio) 및 코로티 쿠스의 공격과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브리튼인들의 박해 를 비판한 《서한》(Epistola)이 있다. 그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영적인 성장 과정과 자기 사명의 정당성에 대해 서 설명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보잘것없는 죄인인 자신을 사도직으로 불러 주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찬 미하고 감사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서한》은 주로 코로티쿠스를 꾸짖는 내용 및 자신과 아일랜드의 주교들을 비난하는 브리튼의 고위 성직자들을 논박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공 경] 파트리치오는 학식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 었다. 그가 남긴 글에는 자신이 받은 소명에 대한 확신, 헌신, 용기와 겸손이 가득 차 있다. 그에 대한 공경의 기 록은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최초의 기록은 벨기에 니 벨레스의 수녀원장이었던 성녀 제르트루다(Gernd von Nivelles, 626~659)의 전기이다. 9세기의 저술가 페어돔나 흐(Ferdomnach)는 파트리치오의 축일을 3일간 지냈다고 증언하였다. 아일랜드의 수도원장인 퍼시(Fursey, +650) 가 파트리치오의 공경 예절과 유해 일부를 프랑스의 페 론(Feronne)으로 전한 후, 성인에 대한 공경이 빠르게 프 랑스, 이탈리아, 독일로 전해졌다. 7세기가 끝나기도 전 에 파트리치오는 이미 많은 지역에서 공경을 받게 되었 으며, 그에 관한 전설은 계속 늘어났다. 그가 아일랜드에 있는 뱀들을 바다 속으로 몰아내어 없애 버렸다는 전설 도 그중 하나이다. 가장 유명한 전설은 그가 어떤 미신자 에게 한 줄기에 잎사귀가 3개 달린 토끼풀을 갖고 삼위 일체를 설명하였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아일랜드인들은 파트리치오를 기념하는 성 패트릭 데이(Saint Patrick's Day)에 국화(國花)인 토끼풀을 옷깃에 달고 녹색 옷을 입는다. 1- 아일랜드 ; 제르마노, 오세르의) ※ 참고문헌  L. Bieler, INCE》 10, 2003, pp. 952~955/ G. Mathon, 《Cath》 X, pp. 812~815/ M. O'Carrol, (Dspp XII-2, pp. 477~483/ David Hugh Farmer,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Univ. Press, 1996, pp. 379~381. 〔宋炯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