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 로마나 [라]Pax Rom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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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팍스 로마나를 구가한 티베리우스(왼쪽). 이 도로를 따라 로마 제국의 평화가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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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팍스 로마나를 구가한 티베리우스(왼쪽). 이 도로를 따라 로마 제국의 평화가 퍼져나갔다.


라틴어로 '로마의 평화' 라는 의미의 용어. 로마의 초 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기원전 27~서기 14)가 내란의 종 언을 공포한 기원전 29년부터-학자에 따라서는 그가 로마 황제로 취임한 기원전 27년부터 -스토아 철학자 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가 사망한 서 기 180년까지 200여 년에 이르는 기간. 이 기간 동안에도 로마는 게르만족과 파르티아인들과 전쟁을 벌이기는 하였지만, 로마 제국은 평화를 구가한 시기였다.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1)에서 승리 하면서 번영의 계기를 마련하였으나, 그 번영으로 인한 변화에 원로원은 대처하지 못하였다. 예를 들면 정복 전 쟁으로 획득한 부, 특히 토지가 원로원 계층과 상공 계층 에게 집중되어 중소농층이 붕괴되면서 공화정 체제의 기 초인 시민군 제도가 붕괴되고 있을 때, 원로원은 그라쿠 스 형제 즉 티베리우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기원 전 163~133)와 동생 가이우스(Gaius Sempronius Gracchus, 기원전 153~121)의 토지 개혁 등 꼭 필요한 개혁에 반대 하였다. 그리고 로마의 대국 성장에 협력해 준 이탈리아 동맹시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데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자 장군들이 시민의 여망을 받으며 정치 실 세로 등장하였고, 기원전 1세기 마리우스(G. Marius, 기 원전 157?~86), , 술라(L.C. Sulla, 기원전 138~ 78), 폼페이 우스(G. Pompeius Magnus, 기원전 106~48), 체사르(G.J. Caesar, 기원전 100~44) 등의 장군들 사이에서 벌어진 권 력 다툼으로 로마는 오랫동안 내란 상태에 빠졌다가, 마 침내 옥타비아누스(G.IC.C. Octavianus, 기원전 63~서기 14) 가 내란을 종식시키고 로마의 체제를 정비하였다. '아우구스투스' (Augustus, 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원로 원으로부터 부여받은 그는 외적으로는 공화정 체제의 지속을 표방하였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권력이 집중되도 록 교묘한 장치를 만들었다. 제정(帝政)이 시작된 것이 다. 아우구스투스는 정부 각 기관의 장을 종전대로 원로 원 의원들 중에서 임명하였지만, 그 밑에서 실무를 담당 하는 자들은 자신의 사람들로 채웠고 군 통수권이 자신 에게 집중되게 만들었다. 그런데 자신의 입지를 교묘하 게 강화하면서도 제국 전체의 문제점을 파악해 가며 정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은 국가 대계가 되어 로마 평화의 기반이 되었다. 예를 들면 모자라는 시민군을 해결 하기 위해 그는 로마 시민권자로 구성되는 정규 군단 이 외에도 정복지의 속주민으로 구성되는 예비 군단을 만들 어, 정복된 지역의 사람들이 예비 군단에서 군복무를 하면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로마 제국의 제도권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로마의 평화' 의 후반기인 96~180년까지는 소위 '오현제' (五賢帝) 시대라고 불린다. 네르바(96~98), 트 라야누스(98~117), 하드리아누스(117~138),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다섯 황제 가 제국을 평화롭게 이끌었다. 태평성세가 이룩된 주요 원인은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국가 대계와 뛰어난 황제 계승법인 '양자 제도 에 있었다. 이 제도는 각 황제가 자 신의 혈육을 황태자로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젊 은이를 양자로 입양하여 황제 교육을 시키고 자신이 죽 은 후에는 그가 제위를 잇도록 하는 방법으로, 제위가 이 어질 때의 정치적 소요와 불안을 막고 유능한 젊은이가 제위에 오를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현제 중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다음에 그의 친아 들인 콤모두스(180~192)가 제위에 오르면서, 로마는 서 서히 쇠퇴기에 접어든다. 혹자는 무능한 콤모두스가 제 위에 오른 것이 로마의 쇠퇴 원인이라고도 하는데, 그것 도 하나의 이유이지만 더 큰 이유는 로마의 팽창이 한계 에 달하였다는 것이다. 로마는 오현제의 한 명인 트라야 누스 황제 시기에 최대의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로마의 번영은 정복 전쟁에서의 승리로 얻은 약탈품과 전쟁 포 로인 노예들이 유입되고 새로운 정복지를 얻는 데 있었 으나, 서기 200년경 팽창의 한계에 다다르면서 그러한 것들을 더이상 확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로마 제국이 제공한 평화는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으 로 퍼지는 바탕이 되었다. 그 정치적 평화가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는 그렇게 빨리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는 이질적인 그 리스도교라는 일신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바탕은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23~30)에 만들어 진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36~323)의 동방 정복 으로 시작된 헬레니즘 시대는 '세계' 라는 개념을 사람들 에게 심어 주었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 속에 살게 된 사람들은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는 신에 대한 개념을 갖 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의 신성이나 유일신의 개념은 '세계' 라는 개념 없이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 운 개념이다. 폴리스(polis, 도시 국가)와 폴리스의 경계, 민족과 민족의 경계, 국가와 국가의 경계가 사라질 때에 만 세계라는 개념이 나오는 것이고, 특정 폴리스의 수호 신 또는 특정 민족이나 국가의 수호신이라는 개념도 사 라진다. 그래야 세계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하나의 지고한 신성, 즉 유일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헬레니즘 시대는 정치적으로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 스가 마지막 남은 헬레니즘 국가인 이집트를 정복함으로 써 끝났지만, 로마는 '로마의 평화' 를 통해 헬레니즘 시 대의 '세계' 라는 개념을 더욱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었 다. 그로 인해 국가나 민족을 단위로 형성된 국가나 민족 을 위한 종교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잃게 되었고, 진정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과 구원과 내세를 말하는 종교가 사람들에게 필요해졌다. 그리하여 로마인들조차 로마의 국가 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사실 초기 그리스도교 호교가들은 세계가 로마 제국에 의해 정치적 · 경제적 · 문화적으로 통일되었을 때 교회 가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할 사명을 갖고 나타날 수 있도 록 하느님이 섭리하였다는 사상을 표명하였다. 로마 제 국은 그리스도교가 구원 사명을 다하도록 준비할 섭리적 인 사명을 갖고 있었으며, 정복한 민족들의 신과 종교 의 식을 로마의 국가 의식으로 통합하고 보편적인 일신론으 로의 준비를 하였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계 를 그에게로 데려오는 것' 은 아무런 장애가 없어 보였다. (→ 로마 제국) ※ 참고문헌  A. Franzen,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H. Kiing, 이종한 역, 《그리스도교- 본질과 역사》, 분도출판 사, 2002/ L.-J. Rogier · R. Aubert . M.D. Knowles, Nouvelle Histoire de L'Eglise I, Des Origines a Saint Grégoire le grand, Seuil, 1963. [吳興植]